313화. 다시 엘븐하임
파바바바박.
파아아아아아앙!
거대한 은빛 빛살이 너른 들판을 가로지르자, 그 뒤로 엄청난 흙먼지의 폭풍이 번져 나갔다.
그 결과.
후드드득.
계속해서 부족 단위로 서쪽으로 이동 중이던 오크의 전사들이 애꿎게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보통의 오크 전사들이라면 당연히 화를 낼 만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 나 봤어! 검은 머리!”
“광휘의 기사다!”
“오크의 은인이다!”
“우와아아아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 거대한 은빛 늑대의 실루엣.
그리고 자세히는 못 봤지만, 그 위에 타고 있던 검은 머리 인간 하나.
과거 오크의 내란을 막아 낸 은인이자, 현재 대륙 12대 기사 중에서도 가장 어리면서도 최강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인간족의 영웅.
- 광휘의 기사가 엘븐하임으로 향한다!!!
그가 자신들과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장으로 이동 중인 오크들 사이로 퍼져 나가며, 그들의 발걸음을 조금 더 빨라지게 만들었다.
-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있어.”
파바바박.
질주하는 와중에 귓가에 닿은 그림자에서 루나의 목소리가 울리자 타이니는 칼같이 대답했다.
“차원 관측기가 알려 준 좌표는 마역과 엘븐하임 사이 대수림의 어딘가일 뿐. 거기서 또 어느 지점을 특정하기에는 너무 넓어.”
- 그래서? 균열 나오기 전에는 찾지도 못하잖아?
“아니, 난 찾을 수 있어.”
- 어떻게?
“말로 설명은 못 해. 다만 내가 괜히 한 달 동안 차원 관측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아니야!”
- 역시.
그 말을 끝으로 루나는 침묵했고, 그림자 속에서 ‘역시 내 동생은 천재구나’ 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타이니의 발언은, 아르곤이 들었다면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펄쩍 뛰었을 만한 말이었다.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애초에 지금 인류가 차원 관측기에 의지해서 허둥지둥 움직이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물론 그 사실은 타이니 역시 인식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자신하는 방법은 널리 알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건 나밖에 못 해.’
오러익시더 너머의 벽을 두드리기 시작하면서 찾아온 영감과 차원 관측기를 통해 스피릿액셀을 성취하면서 또다시 상승한 영격은, 이제는 진짜 그 벽 너머의 경지를 어렴풋이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세상의 이면에 있는 차원의 벽이 느껴지고, 거시적으로 세상을 아우르는 법칙의 존재까지 희미하게나마 와닿았다.
드워프들의 직감이나 최근 자신을 움직인 영감의 작동 원리까지도 이해가 되어 가는 것.
즉 종으로서의 한계뿐만 아니라, 세상의 벽조차 초월할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을 건드릴 수 있는 힘을, 자신이 이미 갖고 있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아마…….’
마족들과 펜릴이 말한 운명의 파편이라는 것은, 자신의 영혼 안에 단단히 숨어 있던 모양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영혼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니, 찜찜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지만.
‘신성의 파편이라고 했던가.’
더 강해질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것은 아직은 자신의 의지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그의 영혼 근간에 존재함으로써 벽 너머를 보기 더욱 편해졌다는 것.
마치 벽 너머를 구경할 수 있도록 영혼을 받쳐 주는 든든한 디딤돌 같은 느낌이었다.
덕분에 그는 원래 지금의 경지로서는 불가능했을 일, 차원의 벽을 느끼는 것도 모자라 그것이 얇아지고 있는 지점을 특정하는 일까지 가능할 것이라 확신했다.
“최대한 빨리 가서 그 근방의 마물들을 싹 치워 버려야 해. 전투에 방해가 될 나무들도 죄다 벌목해서…… 아니, 아니다 그걸로 아예 함정을 만들어도 좋고.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하는 말.
그것은 그가 검제에게 보인 자신감의 근거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파편과 차원의 벽. 그 인과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면, 나중에는 이게 없이도…….’
이 찜찜한 무언가가 없어도, 스스로 벽을 넘을 수단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거기엔 아무런 근거도 없으니 무의미한 기대일 뿐이었다.
‘적어도 아직은 말이야.’
그리고 그것은 지금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전생에 싸워 보지도 못한 다른 칠죄종의 군단을 상대해야 한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정보, 그리고 그 밉상에게 들은 경험담뿐이라.
더 이상 꾸물거릴 틈은 없었다.
“빨리 가자.”
파바바바박.
순식간에 지나쳐 가는 들판, 그리고 같은 속도로 눈앞에 다가오는 구릉 지대의 풍경.
대수림이, 엘븐하임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이었다.
* * *
“동쪽에서 무서운 속도로 접근 중인 어르신과 그 위에 탑승 중인 인간 발견.”
“광휘의 기사, 타이니 경으로 추정됩니다.”
“그래?!”
요정어로 이루어진 보고가 들리는 순간, 에스티나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곧장 동쪽 장벽으로 향하려는데, 옆에서 살짝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나가시는 겁니까? 제가 왔을 때랑은 대접이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수호자님?”
금발에 푸른 눈, 잘생긴 얼굴, 온몸을 빈틈없이 감싼 갑옷. 마치 성기사의 표본 같은 남자.
용사 크롬벨이 농처럼 던진 말에 에스티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지나쳤다.
“당연히, 사람이 다르니까요.”
그 말에 용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지금 이곳 엘븐하임의 중심부에 그런 그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순간 장로들 대다수가 어색한 웃음으로 시선을 피할 뿐.
“이거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이번에 제대로 속죄해 보겠습니다.”
이어진 그 말에도 제대로 반응해 주는 이가 없었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신전에서 내세운 용사라는 신분은 엘프들에게 애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세상을 구했지만, 고대의 세계수를 파괴해 버린 자.
엘프들이 용사를 환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특히 지금의 크롬벨이 고대의 ‘그 용사’가 부활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장로들은 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티나는 그 상황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 단순히 지금 오고 있는 것이 타이니라서 유독 환대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응, 그런 거야.
“음. 음.”
에스티나는 유난히 가벼운 발걸음으로 빠르게 동쪽 장벽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엘븐하임의 은인을! 인간의 영웅을 맞이하라!!”
아름다운 노랫소리 같은 요정어가 그녀의 입에서부터 엘븐하임 전체로 퍼져 나가며, 사방의 엘프들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이내.
“♪♬~!(은인!)”
“♬♪♬!(은인께서 오신다!)”
우우우우웅.
전투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모여든 일부 엘프들의 환호와 함께 꽃가루가 쏟아지며 동쪽의 담장이 열렸다.
그러자 저 멀리서부터 대수림의 관도를 따라 흙먼지의 폭풍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은색 거대한 물체가, 이내 담장을 통과해 바로 그녀 앞에서 정지했다.
그그그극.
콰콰콰콰.
뒤늦게 그 뒤를 따라 달려온 바람이 엘븐하임 내에 흙먼지를 흩뿌리는데.
“티나, 오랜만……”
은빛 늑대 위에서 뛰어내린 타이니가 인사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에스티나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와 줘서 고마워, 타이니.”
“어, 어. 근데 나 지금, 머, 먼지가 좀 많은데…….”
“뭐 어때?”
오히려 등을 팡팡 두드리며 웃는 에스티나.
조금 당황한 타이니가 어색하게 굳어 버리던 그때,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루나가 입을 삐죽이며 그를 구원해 주었다.
“올케. 나도, 있는데.”
“오! 루나 양. 와 줘서 고마워. 큰 힘이 될 거야.”
“응. 당연히.”
한 달 넘게 붙어 다니면서 서로 더 으르렁대게 된 타이니와 아르곤과는 달리, 저 둘은 유난히 사이가 좋아진 것 같았다.
“올케가 여기, 있다고 하니, 타이니가 바로 여기로, 오겠다고 하더라고.”
“오, 그래?”
아니야!!
자신을 보고 눈을 빛내는 에스티나를 보며 타이니는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루나의 단어 선정에는 여전히 유감이 있었지만, 당사자가 아무렇지도 않아 하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에스티나…….’
그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전생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은 사실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전생의 기억을 공유한 부작용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오러익시더에 스피릿유저인 데다 영혼의 힘도 인식하고 있는 에스티나가 고작 그 정도로 인격에 영향을 받을 리 없었다.
루나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단어에 아무 거부감도 없는 것도 그렇고, 유독 자신에게 살갑게 구는 태도도 그렇고.
아무리 자라 온 환경 때문에 여자를 병적으로 멀리하고 관심조차 두려 하지 않으려 하는 타이니라 해도, 이래서야 그녀의 마음을 모르기가 더 어려웠다.
그렇다고 에스티나가 어디 부족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과분하지.’
다만.
‘내 마음이 문제야.’
동료로서의 신뢰라면 이미 한가득하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연인 관계에 대해 잘 모른다 해도, 그것이 애정과는 거리가 있는 감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려워…….’
그 사실을 인정하자니,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네가 있어서 정말 든든해. 아! 물론 루나 양도.”
웃고 있는 그녀를 보니 자꾸 표정이 어색해지는데.
새삼 어린 시절의 사건으로 인한 자신의 상처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체감되며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런 것도 상처겠지.’
영혼에 남겨진, 보이지 않는 상처.
그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또 하나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이 비록 무력적인 성장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도, 영혼을 다루는 지금의 그에게는 그 둘이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아직도 멀구나.’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 길.
그 길의 끝에 닿으면, 자신도 이 마음의 거리낌을 지우고 그녀를 똑바로 볼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이런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지.’
타이니가 생각을 정리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 순간.
“설마 여기까지 와 놓고 자신이 없어서 한숨을 쉬는 겁니까?”
갑자기 들려온 밉살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크롬벨…….”
“뭐, 자신이 없다면 뒤로 빠져 계셔도 괜찮습니다. 이쪽에서 나올 것이 질투의 군단이건 탐욕의 군단이건, 어쨌건 제가 당신 몫 이상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도발하듯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서 이전과 같은 꺼림칙함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말하는 꼬락서니부터 행동까지, 여전히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저 웃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 듯한 위선적인 느낌이 사라진 것뿐.
대놓고 웃으면서 도발하는 것은 오히려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뜻으로 보이기도 했다.
다만.
‘저 서클은 상태가 더 심각해진 것 같은데.’
녀석의 심장에서 느껴지는 서클. 8개를 넘어 9번째가 생길락 말락 할 정도로 진한 마기의 고리.
그 안에서 느껴지는 힘이, 여전히 녀석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저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연히 타이니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방해나 하지 마. 내가 나오는 족족 쓸어 버릴 테니까.”
“한 방으로 끝나고 기절하시는 거 아니고요?”
“그 한 방으로 네 이빨을 뭉개 주기 전에 닥치지?”
“과연 누가 뭉개질까요.”
파지지지직.
한순간 둘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번갯불.
오직 기세의 충돌만으로 이루어진 파장이 한순간 물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며, 둘 사이의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듯한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현상은 대치하고 있던 당사자들의 눈빛조차 변하게 했다.
‘호?!’
얼핏 강자들끼리의 기세 겨루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근간은 달랐다.
그것은 둘 모두가 완벽하게 이능을 컨트롤하며 영역까지 갈무리한 상태에서 일어난 현상.
서로의 의지가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마치 에너지를 동원한 것처럼 파장이 일어나는 것은 그들도 처음 겪는 현상이었다.
“역시, 당신도…….”
“당신도?”
크롬벨의 의미심장한 눈빛과 함께 타이니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만! 뭐 하시는 거죠, 크롬벨 경?! 타이니 너도!”
“유치해, 동생.”
둘 사이에 끼어든 목소리들에, 그 대치가 한순간에 깨어졌다.
사실 시작을 따져 보면 루나의 말대로 유치하기까지 한 도발들이었으니.
할 말이 없어진 타이니는 그저 머쓱하게 웃으며,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