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311화 (311/500)

311화. 차원 관측기

“으아아아아아! 진, 짜!”

아르곤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월랑의 질주에 그 등판 위에서 연신 비명을 질렀다.

“어쩌라고!”

아무리 마법으로 세반고리관을 마비시키고 시야가 흔들리지 않게 고정했다 하더라도, 무시무시한 기세로 상하 운동을 반복하는 늑대의 등판 위에서 암호문을 해석하는 것은 오러유저이자 7서클 마법사인 그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집중이 안 되잖아. 집중이!’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두가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으니까.

‘이놈의 주둥이가 방정이지. 내 팔자 내가 꼰 거고. 으으으.’

제이시 가문이 타란에 남긴 흔적, 그 폐허의 지하 깊은 곳 금고에서 나온 것은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흑마법서 몇 개와 이 암호문뿐이었다.

실망하던 타이니 앞에서 그 암호문의 패턴을 얼추 확인해 보다가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

- 어? 화학식 같은데? 여기, 이 부분은 재료 말하는 거 같고. 여기 도형 보면, 주먹만 한 크기의 뭔가를 만드는 과정…….

그 말을 듣는 순간, 타이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 폭뢰. 주먹만 한 돌 같은 게 2서클급 폭발 마법과 비슷한 충격을 내는 물건이다.

- 여기에 남은 흔적을 보면,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도 만들 수 있는 거야.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거지. 그래서 그놈들이 그렇게…….

- 아세리안에 도착하기 전까지 해석해 놔!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정해진 일.

거기다.

“무조건 해내! 네 성과에 따라서 병사 몇만, 아니 몇십만이 더 살수도 있어!”

앞에서 버럭 소리를 지르는 타이니의 말이 반만 사실이라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마나가, 의지가 실리지 않았기에 8단계 이상의 마족들에게는 상처 하나 줄 수 없다지만, 그 미만의 마물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것만 해도 어딘가.

“연합군의 전력이 비약적으로……!”

“알겠다고! 그러니 좀 닥쳐! 정신 사나워!”

까드득.

“……너, 못 하기만 해 봐라.”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치고 보니 으스스한 협박이 돌아왔다.

‘흐미, X바. 내가 왜 그랬을까. 이놈의 주둥이…….’

모두가 이 괴물 때문이었다.

놈한테 끌려다니면서 초월급 마물들을 강제로 사냥해야 했던 그때부터, 자신의 마음과 입이 때때로 따로 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원흉을 대놓고 탓할 수는 없었다.

“실패하면 이빨 싹 다 털어 주마, 넌 칼만 있으면 마법 쓰지?”

무서우니까.

X바. 눈빛만으로 사람 잡겠네.

거기에 더해, 그 순간 그림자에서 슬쩍 튀어나온 날카로운 살기가 그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 그땐, 내가 직접 빼 줄게.

남매가 아주 쌍으로……. 빌어먹을 모르스.

“……맡겨 둬.”

아르곤이 제 입을 스스로 찰싹찰싹 때린 직후부터, 그의 집중력은 극도로 높아졌다.

“아오오오오오오!”

거대한 월랑의 몸체가 수 킬로미터 절벽을 뛰어넘건.

“직진!”

꽈아아아아아앙!

그 무식한 주인이 산에 구멍을 내 가며 질주를 하건 간에, 양피지를 꼭 붙들고 암호문 해석에만 몰두하기를 무려 이틀.

저 멀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 아세리안의 성벽이 보이고, 타이니의 살벌한 눈길이 슬쩍슬쩍 뒤를 향하던 어느 순간.

필사적으로 집중력을 끌어 올리던 아르곤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나는 느낌이 드는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해, 해냈다! 해석해 냈어!!!”

마침내 그가 자신의 이빨을 지켜 낸 순간이었다.

* * *

철컹.

조율기라 불리는 그 커다란 열쇠처럼 생긴 아티팩트가 거대한 오르간 같은 구동 장치의 어느 부분에 맞물리는 순간.

드르르륵, 쿵.

우우우우웅.

황궁의 거대한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던 고대의 유물, 차원 관측기가 여태까지와는 이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홍안의 백발노인,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흘흘, 제대로 작동하는구먼. 뼈가 시리도록 바쁘게 날아온 보람이 있어.”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서 차원 관측기의 변화를 지켜보던 타이니가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름답군요.”

“응?”

철컹, 드르르륵.

우우우우웅.

“……저게?”

온갖 기계 장치가 어지럽게 움직이는 거대한 아티팩트.

도대체 초고대에 어떻게 이런 물건을 만들었는지 신기하긴 했지만, 빈말로도 아름답다고 말할 만한 외견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 아름답습니다.”

대답하는 타이니의 표정은 정말로 황홀해 보일 정도였다.

‘이 친구가 결국 미친 건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온 영웅.

그런 사연을 떠나서도, 지난번 마수병단을 상대하던 그 무력은 초인일수록 더 감탄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무언가 부작용(?)이 있다 해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그, 그런가. 음,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이 젊은 영웅의 여린 영혼(?)이 다치지 않도록, 티네스는 말을 조심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곁에 있기는 싫은지 슬쩍 뒤로 빠지려는데.

그런 그의 움직임을 모르는 것처럼, 타이니의 시선은 차원 관측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말 아름다워.’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파이프를 통해 푸른 마나가 들락거리고, 그것에 연동한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광경.

그의 감각으로 읽히는 차원 관측기와 마나의 조화는, 그 외에 다른 단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조율기를 가지고 이곳에 오는 동안에도 그 안에 단단하게 묶여 있는 마나 패턴을 해석하며 몇 번이고 감탄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본체와 결합되었을 때 보인 변화는 그 전의 감탄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났다.

“2차 강림, 앞으로 40일…… 정도 남았던가요?”

멍한 눈으로 차원 관측기를 보면서 내뱉은 질문에, 물러서던 티네스가 멈칫했다.

“음? 아, 자료 분석 결과로는 그렇긴 하지. 그리고 이제 이 차원 관측기가 열흘 전에는 정확한 시간과 장소까지 가르쳐 줄 테고.”

“그때까지 제가 여기 있어도 되겠습니까? 이 아티팩트 좀 관찰해 보고 싶은데요.”

마법사도 아닌 네가 왜?

티네스의 얼굴에 당연한 의문이 어렸지만.

“……뭐, 그러시게. 폐하께는 내가 그리 보고드리겠네.”

“아, 그리고 제 일행인 루나 모르스와 아르곤에게 초월무구 창고를 개방해 주실 수 있는지도 좀 여쭤 주십시오.”

일개 기사, 그것도 제국 소속도 아닌 기사가 대놓고 황실에 보물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꼴이었지만.

티네스는 그런 요구를 듣고서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건의드려 보겠네. 아마 흔쾌히 허락하실 거네. 물론 초월무구의 선택을 받아야겠지만.”

실제로 광휘의 기사는 더는 일개 기사로 보기 힘들고, 마족의 침입은 이미 시작된 상황. 현명한 젊은 황제는 아까워하지 않고 창고를 열 것이다.

“맞는 게 있을 겁니다. 보기 드문 천재들이니까요.”

그 말에 티네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가오는 겨울에나 고작 열여덟 살이 될 눈앞의 오러익시더이자 스피릿유저가 하는 말이 조금 어이가 없었으니까.

“자네는? 자네도 구할 수 있는 게 있을 텐데? 아니, 자네 정도라면 자격이 안 되는 초월무구가 더 적지 않을까?”

“아닙니다. 저에게 초월무구는 세 가지 정도 쓰는 게 딱입니다. 보통은 둘 정도일 테고요.”

“음?”

“그 이상은 몸에 부담만 가고, 영혼에도 과부하가 걸려서 성장에 지장을 주게 됩니다.”

그 말은 티네스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는데?”

“저도 최근에나 느낀 겁니다. 아무튼 제 일행에게도 그리 전해 주십시오. 욕심은 내지 말라고.”

“……아, 알겠네.”

저치는 지금 자신이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을까.

수천 년간 초월무구와 초인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해 온 마탑에서도 그 둘의 확실한 관계성을 찾지 못했는데, 일개 기사가 그냥 저 혼자 느꼈을 뿐인 사실에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례를 보면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아.’

삼백여 년 전, ‘아티팩트 마스터’라는 특이한 특성을 개화한 뒤로 황실의 초월무구들 십수 개를 연동하며 싸웠던 로열 나이트.

빛나는 천재성으로 어려서부터 일곱 개의 초월무구에게 선택받았던, 백오십 년 전의 세븐 나이트.

그리고 최근에 무려 다섯 개의 초월무구와 계약하며 다시금 왕국연합의 빛으로 떠오른 웨폰 마스터까지.

모두가 세계 최강이 될 것이라 추앙하던 그들은, 결국 오러익시더의 벽조차 넘지 못하고 세상의 유수한 강자 중 하나로만 남았었으니까.

‘영혼의 과부하라……. 영혼이 고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자료를 본 것도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결국 타이니의 한마디는 티네스의 영감을 자극하며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는 타이니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차원 관측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한 달 후.

마계 대전의 와중임에도 황도 아세리안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것을 넘어 오히려 활기차게 느껴졌다.

“연합군이 이겼다잖아!”

“마족들도 뭐 별거 아닌 거 아냐?”

“그러게. 이대로면 뭐, 걱정 없지.”

대륙의 지배자들이 연합군의 승전 소식을 적극적으로 홍보한 결과.

오렌 평야에서부터 흘러나온 승전보가 이제는 빈민가의 아이들에게도 전해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 소문은 점점 살이 붙더니, 이젠 아예 부풀 대로 부풀어서.

광휘의 기사가 휘두른 망치 한 방에 마물들이 죄다 쓸려 나갔다.

12대 기사가 고위 마족들까지 추풍낙엽처럼 쓸어 버렸다.

수많은 마물들은 연합군의 창날 아래 무참하게 분쇄되었다.

연합군의 사상자는 백 명도 안 된다더라!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거리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그 소문들이 우울해할 수 있는 백성들의 사기를 올리다 보니, 황실에서도 굳이 정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얍! 얍! 내가 광휘의 기사다! 마물들은 무릎을 꿇어라!”

“바보! 광, 뭐 기사는 망치 쓴다. 검 아니고.”

“그럼 난 소드 엠퍼러. 자! 내 검을 받아라!”

“그럼 난 웨폰 마스터!”

“웨폰 마스터는 왕국 쪽이잖아!”

“뭐 어때, 다 연합군인데.”

“치. 난 그래도 북풍의 기사 할래!”

“그럼 난 용사!”

골목의 아이들이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12대 기사 놀이를 할 무렵.

제국을 비롯한 왕국 연합과 신전, 오크, 엘프, 드워프, 수인족의 군대가 조금씩 규모를 늘려 가며 연합군으로 파병되기 시작하는데.

그 중심이 되는 아스란 황실의 분위기는 마냥 좋을 수가 없었다.

“……소문이 너무 과장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급 귀족들로부터 병력 차출에 대한 회의감을 담은 상소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오렌 평야로 몰리는 물자 소모에 대한 비용도 점차 부담이 커지고 있습니다.”

제국의 재상, 로안 디트로 후작의 보고에 황제가 인상을 찡그렸다.

“물자는 모든 종족과 나라가 나눠서 부담하고 있지 않소?”

“그게…… 왕국 연합의 다른 나라들, 특히 육망성의 재앙을 당했던 그리마 왕국을 중심으로 지원 물자를 조금씩 줄이고 있는 모양샙니다.”

“뭐라!?”

“자국의 피해 복구를 우선하겠다는 건데, 지배자들이 직접 퍼트린 소문에 스스로가 안심하는 꼴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아무래도 마계 대전의 희생자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등 소문 단속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

피로가 가득한 얼굴의 황제가 인상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데.

“폐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황후, 클로이의 손에서 새하얀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며 황제의 피로감을 조금 덜어 주었다.

“고맙소, 황후. 하. 이를 어쩐다?”

그러나 대전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에는 여전히 갈등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현실을 알리고 긴장감을 조성하면, 전쟁과 관련이 없는 도시의 생산성까지 떨어지고 만다.

그렇다고 긍정적인 소문만 퍼트리고 있자니 내부에서부터 일어나는 균열을 두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젠 한 방향을 선택해야 할 때였다.

고심이 깊어지던 그 순간.

- 폐하!!

대전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황제와 모든 신하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쿠우웅.

후다다닥.

다급히 뛰어 들어오는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의 표정도 불안하기만 한데.

이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장내에 더욱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차원 관측기 확인 결과, 차원문이 열릴 지점이…… 두, 두 군데입니다!”

열흘 뒤의 파국을 예고하는 말.

그 말에 대전이 온통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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