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무법 도시 타란 (1)
“차원 관측기를 더욱 정밀하게 복원하면, 차원문이 열리는 장소를 열흘 전에 특정할 수 있다?”
황궁 마탑에서 찾았다는 방법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다만 거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열흘이라는 게 긴 것 같아도, 군대를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입니다. 바로 근처에 열린다면 모를까, 여기서 아세리안까지의 거리만 되어도 보병들은 전부 떼어 놓고 내달려야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아세리안에는 남겨진 병력이 있지 않소?”
“비교를 하자는 겁니다, 비교를! 엉뚱한 곳에 차원문이 열리면 답이 없다는 뜻이라고요!”
일단 그 애매한 기간이 첫 번째 문제였고.
두 번째는, 차원 관측기를 복원하는 데 필요한 부품이 이미 오래전에 유실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생각이 닿지 못한 겁니까, 크롬벨 경?”
아직도 완전히 경계심을 놓지 못한 듯한 검제의 날카로운 말이 크롬벨을 찔렀지만,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차원 관측기라는 거, 고대에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후대가 차후의 마계 대전을 예비해 만든 것이겠지요. 아쉽군요. 미리 알았다면 일이 좀 더 쉽게 풀렸을 텐데요.”
“……결국 그 조율기를 찾는 게 우선이겠군요.”
“차라리 다른 나라에 있다면 상황이 상황인 만큼 쉽게 얻을 수 있을 텐데, 하필…….”
그 와중에 차원 관측기로 부품의 현 위치를 알아보니, 꽤 공교로운 곳에 있었다.
“무법 도시 타란이라면, 대륙 동쪽 끝 아닙니까? 거기까지 왕복하는 시간도 문제인데, 무법 도시면…….”
물론 그 거리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직접 가겠어. 지금 나와 월랑이라면 타란까지 이틀 안에 왕복할 수 있어.”
“저도요. 카일룸은 하루 안에 가능해요.”
이곳에는 이 시대 최강의 정령술사들이 존재했으니.
“펜릴 님도 충분히 가능하십니다!”
- 우란, 네가 문제다. 무법 도시에 네가 나타나면, 다들 도망가고 볼 테니까.
“어…….”
“그런 의미에서, 혈기사라 불리던 크롬벨 경도 안 됩니다.”
“음?”
“신전의 용사가 혈기사였다는 소문은 왕국 연합과 도시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미 확 퍼져 있으니, 무법 도시에선 성기사만 나타나도 싹 다 숨어 버린다더군요.”
- 혈기사? 그게 무슨 소리지, 크롬?
“……변장이야 마법으로 해결이 가능…….”
“타란은 범죄자들의 도시인데, 얌전히 목표물만 찾으실 수 있겠습니까? 칼부림 없이? 혈기사의 행보만 보면 믿음이 안 가는데요?”
- 블러드 나이트? 크롬, 네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니까?
“흠…….”
크롬벨은 펜릴의 질문에는 대답해 주지 않은 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제 변해 버린 성격을 자각하고 있는 그는, 범죄자들을 눈앞에 두고 어찌 행동할지 스스로도 자신할 수 없었으니.
이미 자신이 정령술의 8단계, 스피릿액셀을 달성했으며 심지어 현생의 정령 오투르가 비행형이라는 것을 어필할 의미도 잃은 것이다.
뭐, 그렇다고 굳이 약점을 밝힐 필요는 없으니.
“타이니 경은 아직도 저를 불편해하시니, 저는 빠지는 것이 맞겠지요.”
그는 광휘의 기사를 언급하며 슬쩍 발을 뺐다.
그런데 그때, 혹한의 마도사 아프만이 말을 보탰다.
“그럼 광휘의 기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루센티아나 에낙센 등지에서 벌인 혈사에 대한 소문도 이젠 암암리에 퍼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스티나 님 혼자…….”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에스티나에게 몰렸지만.
이내 그들은 그녀의 차림새와 얼굴을 보고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괜한 분란만 만들겠죠. 한바탕 피 보라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 조율기 가지고 있다는 놈이 우연히 낚이면 좋겠지만, 괜히 고생만 하실 겁니다.”
“무법 도시는 인간의 다른 도시하고도 다르니까요.”
그에 이번엔 웨폰 마스터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왕국 연합의 병력을 투입해서 직접 조사하게 만들죠. 그리고 조율기를 찾아내서 아세리안으로 보내면…….”
“빨라야 한 달은 걸리겠지. 무법 도시에 들이치자마자 조율기를 찾아내고 곧바로 배송한다고 해도 말이야.”
그러나 그의 의견은 검제에 의해 가뿐하게 무시되었다.
결국 쉽게 답이 나오지 않자.
“……그냥 내가 간다. 머리만 염색해도 누군지 잘 모를 거야.”
스슥.
대놓고 정령 합신을 일부 운용하여 머리까지 새하얗게 변한 모습을 보여 주자, 그제야 좌중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람들 인식이 묘한 게, 굳이 변신까지 할 것도 없이 특징적인 외모만 바꿔 줘도 확실한 변장이 되더라고.”
“……스피릿액셀도 얼마 남지 않았군. 어떻게 보통 인간이…….”
용사의 어이없다는 듯한 혼잣말에 잠시간 시선이 몰렸지만, 당장 한시가 급한 상황에 다른 의견을 내는 이는 없었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혼자가 빠르겠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가리온 왕국 쪽에서 무법 도시를 압박해 놓도록 조율 좀 해 주세요, 무기 영감님. 가능하면 미리 찾아내면 더 좋고. 내가 배달만 하게요.”
“무기 영……? 하, 너 이 색……. 크흠. 아, 하하. 자, 자네. 이젠 이름도 멋대로 부르는가. 우리 품위 좀…….”
웨폰 마스터 그리드가 발작하려다 말았지만, 놀랍게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에 뻘쭘해진 그가 탄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달은 해 놓겠지만, 가리온의 병력보다 자네가 더 빨리 도착할 거네. 왕복 이틀이면 가는 데는 하루면 된다는 거 아닌가?”
씁.
“그럼 어쩔 수 없죠.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찾으려고?”
“제가 또 뒷골목 출신 아닙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죠.”
그 순간, 그 말을 들은 모든 이들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뒷골목……?”
용사만이 미묘한 의문을 내보였을 뿐.
“걱정된다.”
“너무 걱정된다.”
“어떻게…….”
다른 초인들이 황급히 불안한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
“나, 나! 따라갈 수 있어. 그럼 믿을 만하지?”
다시금 끔뻑끔뻑 졸고 있던 루나가 언제 깨어났는지 손을 번쩍 들며 폴짝폴짝 뛰었다.
물론 반응은 좋지 않았다.
“더 걱정되는데…….”
“저 아이, 계속 자고 있지 않았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솔레인 님.”
“그럼?”
“저 아이도 모르스거든요. 타이니랑 같은…….”
“뭐?!”
검제에 말에 이어 쏟아지는 부정적인 눈빛에 루나의 표정이 샐쭉해지고, 타이니의 얼굴 역시 불퉁해졌다.
‘저 흰 수염 할배는 날 언제 봤다고…….’
킁.
살짝 불쾌했지만, 그래도 사안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는바.
그에게는 다른 동료들의 생각까지 감안한 해결책이 있었다.
“아르곤도 데려가겠습니다. 그럼 믿을 만하죠?”
“뭐!? 날!? 왜!?”
“필요하니까.”
막상 당사자가 격렬한 반대를 해 왔지만, 타이니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오오, 우리 아르곤.”
“그래도 똑똑한 놈 하나 붙여 놓으면 괜찮겠지.”
“전에도 몇 달 같이 다니지 않았나?”
“아, 다행이군.”
다른 동료들 모두가 동의하는 순간, 아르곤의 운명은 정해졌다.
* * *
“우와아아아악!”
“이제 적응할 때 안 됐냐!? 좀 닥쳐!!”
“그, 그래도, 우어어억! 너, 너무 빨라!”
마법으로 균형 감각을 마비시킨 아르곤이 사색이 된 얼굴로 타이니의 허리를 붙잡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 땅을 밟기는 하는 것인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발을 움직이는 월랑 때문에, 그 거대 늑대의 등 뒤에 탄 이의 시야 밖으로 주변의 모든 것이 일그러지듯 사라지는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 조금만, 처, 천천히!! 쫌!!”
“닥쳐! 시간 없어!”
이렇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말소리가 전달되지도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 그 속도를 만들어 내느라 위아래로 쉴 새 없이 진동하는 늑대의 등판 탓에, 아무리 균형 감각을 마비시켰다고 한들 그 물리적 운동을 견뎌 내기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아으, 아으으으.”
자신이 오러유저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나가떨어지지 않았을까 싶은 속도.
심지어 그렇게 질주하느라 너무 빨리 지나가는 공기 때문에, 타이니의 너른 등판 뒤에 숨어도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물론 힘들어하는 건 아르곤뿐이었다.
[얘, 바보 같아.]
월랑의 그림자에 숨은 루나가 그림자 전성으로 키득거리는 목소리를 전해 오고.
[어, 천잰데 바보야.]
타이니 역시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아르곤의 호들갑을 무시하며 뒷담화를 나눴다.
일행은 그렇게 관도를 무시한 채 무법 도시 타란까지 일직선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팍.
“우와아아아악!”
아르곤의 비명을 배경 삼아 월랑이 몇 킬로미터는 될 법한 절벽을 단번에 뛰어넘고.
“수, 숨! 이렇게 올라갈 거면 뚫고 가는 게 더 빠르지 않…….”
90도에 가까운 높은 봉우리를 그대로 오르며, 하소연하는 목소리 따윈 묵살하…….
“오! 좋은 생각!”
……지 않고 즉시 반영하는 타이니.
콰아아아아앙!
“우와아아아악! 아파! 돌 튄다고! 아프다고! 위험하잖아, 인마!!”
콰르르르르르릉.
말 그대로 장애물을 무시하며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월랑의 질주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아우우우우우우우!”
으슥한 밤이 찾아와, 간신히 숲속의 공터에서 쪽잠을 잘 때가 되어서야.
“수면은 2시간이다. 충분하지?”
아르곤은 창백해진 얼굴로 잠, 아니 기절하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은데.
“2시간 지났다. 일어나.”
“으, 응? 버, 벌써……?”
“그래.”
“조, 조금만 더…….”
“안 돼.”
“지금 뭐 하…… 우와아아악!”
- 아우우우우우우!
- 야, 이 미친놈아!!!
비몽사몽간에 느닷없이 칼바람을 맞은 아르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반복된 질주는, 태양이 중천에 닿을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일행이 오렌 평야의 연합군 진지를 떠난 지 딱 하루가 지났을 때.
그들은 멀리 자유 도시 연합의 북쪽 끝 도시, 다른 말로 무법 도시라 불리는 타란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걸어간다.”
월랑이 스르륵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백발로 바뀐 타이니를 보며, 아르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끄, 끝난 거지?”
“이제 시작이지.”
“도착했으면 끝난 거나 마찬가지지.”
“타란의 장물아비들이 잘도 아티팩트를 토해 내겠다.”
“흥. 네가 조지는데, 어떤 놈이 버티겠어.”
“버틴다. 여기 있는 놈들은.”
“뭐?”
“인생 막장에 몰린 놈들은 목숨을 잃더라도 제 이득을 포기 못 해. 죽어서라도 엿 먹이겠다는 각오로 버티다가 그냥 죽는 놈들 여럿 봤다.”
아르곤은 굳이 언제 어디서 봤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타이니의 음울한 표정을 보며, 아마도 전생에 저 도시에서 안 좋은 경험이 많았던 모양이라고 추정할 뿐.
물론 그렇다고 지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 미친놈들이 있다고?”
“그래. 그러니까 인류를 위해 아티팩트를 내놓으라는 식의 말은 안 통할 거야.”
“어차피 협조 안 하면 죽는데?”
“그래, 어리석지. 어리석은 짓이야. 인류가 멸망하면 자기도 끝인데 말이야.”
아니, 너한테 죽는다고. 너한테.
‘그럴 거잖아, 너.’
아르곤이 어색하게 웃으며 속마음을 억지로 삼킬 때.
타이니는 아련한 얼굴로 멀리 보이는 타란의 성문을 응시했다.
“이득을 포기하느니 죽겠다. 그런 각오가 없다면 저기서 못 살거든. 뭐, 애초에 그런 놈들만 모인 곳이기도 하고. 용병으로 구를 때 고생 좀 했다.”
“허……. 소문은 들었는데.”
“탐지 잘해라. 나도 신경 쓰겠지만.”
- 나도.
타이니의 그림자에서 갑작스레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아르곤이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왜, 왜 아직도 그림자에 있는 거야, 이 여자? 무섭게!”
손가락을 부들부들 떠는 꼴을 보니 진짜 놀란 듯했지만, 받아 줄 이유는 없었다.
“에스티나를 안 데려온 이유지. 저긴 여자, 그것도 아름다운 여자가 얼굴 드러내 놓고 돌아다닐 만한 동네가 아니거든.”
- 나, 예뻐?
“그래, 누나 예뻐.”
타이니는 피식 웃으며 쉽게 대답했지만, 덕분에 그의 그림자는 그 안에 숨어 있는 사람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며 춤을 추듯 요란하게 꿀렁거렸다.
물론.
“염병을…….”
그 모든 것이 그저 고깝기만 한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아르곤이 작게 투덜거리는 순간.
- 너, 죽고 싶어?
섬뜩한 전성과 살기가 그의 귓가에 와닿았고.
“어, 어으으. 저, 절대.”
도리도리.
아르곤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고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어정쩡한 걸음으로 급히 타이니의 뒤에 따라붙었다.
“목적.”
“거래.”
“통과.”
심문이랄 것도 없는 단순한 대화.
검문은커녕 가로막는 이도 없이 버젓이 열려 있는 성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겉보기에는 멀쩡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카룬에서 흘러들어 온 동대륙의 보물……!”
“제국 남부에서 막 올라온 물건입니다. 구경들 하십쇼……!”
“그리마에 난리 난 거 아시죠들? 그 난장판에서 왕궁의 보물이 흘러나왔는데, 여기 한번 보시라!”
마치 현재 대륙 중앙에서 벌어지는 난리는 자기들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 북적거리는 시장통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고 있었다.
마계 대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흔한 대도시의 시장터 같은 광경.
다만 그 풍경 속에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스각.
“아아악!”
“이 새끼가 어디다 손을 대!? 엉!? 너 누구 파야!?”
장터의 한곳에서는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상품에 손을 대려던 소년의 손등을 칼로 내리찍고 있었고.
쾅!
“썩 꺼져!”
우당탕탕.
“내, 내 돈……!”
여관으로 보이는 건물에서는 알몸이 된 남자가 던져지듯 튕겨져 나와 거리에 나뒹굴었으며.
“악!”
“꼬맹아! 기술 잘못 쓰다 걸리면 손목 잘린다는 건 안 배웠냐?”
다른 한쪽에서는 왼쪽 손목에 손 대신 갈고리를 단 남자가, 자신의 품속에 손을 넣으려던 꾀죄죄한 소년을 보며 누린내 나는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거였다.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는 난장판이 만연해 있었으니.
“하하. 개판이네.”
아르곤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왕국 연합과 도시 국가 연합, 그리고 카룬과 멀리 떨어진 제국과 각 종족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탓에 어떤 범죄자도 다 받아들이게 되었고, 덕분에 대륙의 수배범들 대다수가 숨어든다는 곳.
무법 도시 타란에서는, 그 모든 것이 일상의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