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그래서 어디?
인류의 정예가 마수왕을 쓰러트렸다!
강림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는 각 지역의 지배자들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으니.
지형이 완전히 바뀌다시피 한 대륙 최대 곡창 지대의 풍경과 거기서부터 제국 남부에 빠르게 퍼지기 시작한 대량의 마물들에 관한 소식은, 대륙의 모든 신민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모두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정말로 마족들의 군대가 이 땅에 나타났다!
그럼에도 인류가 승리했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래도 이겼다잖아.”
“그럼 끝난 거야?”
“그건 아니라던데…….”
와글와글.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같은 주제에 관해 떠들었으며, 모든 국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 총동원령을 내렸다.
설마 그 전설의 마계 대전이 정말로 벌어질까.
여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명령 때문에 마지못해 정예들만 오렌 평야와 이너빌로 보냈던, 미온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지도자나 귀족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흩어진 마물들을 찾아내 박멸하라!”
“연합군에 병력을 더 충원하자!”
인류 연합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순간 악마추종자로 몰려 처형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가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전쟁에 관한 긴장감이 차오르면서도 결코 절망하지는 않는, 지배자들이 원했던 전의가 들끓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인류의 승리를 이끌어 낸 지도부는, 정리도 되지 않은 전장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시작은 크롬벨이 꺼낸 한마디 때문이었다.
- 다음 강림은 49일 뒤에 시작될 것입니다. 더 빨라질 수도 있고.
이미 한차례 큰 격전을 치른 연합군은, 그 말로 인해 다시금 긴장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가장 큰 걱정은, 다음 칠죄종의 군단이 강림할 장소가 오렌 평야가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근거는?”
“고대에도 그랬습니다. 폭식 다음에 이어진 질투의 군단도, 탐욕의 군단도 각기 다른 위치에서 강림했죠. 뭐 그때는 폭식도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한 상태라 간신히 살아남기에도 바빴으니, 큰 의미는 없었지만.”
12대 기사와 4명의 마도사들, 사실상 인류의 핵심 전력인 그들의 안색이 동시에 굳었다.
크롬벨은 그 모습을 보고는 너른 천막의 가장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온 십여 명의 성기사들이, 둘둘 말려 있는 양피지 뭉치들을 품속에서 꺼내 들었다.
“신전에서 보관하고 있던, 마계 대전에 대한 자료입니다. 20부로 준비했으니, 다들 보시죠. 세월이 지나며 오류가 생긴 부분은 제가 수정했으니 모두 참고하시길.”
초인들은 성기사들이 자신 앞에 내미는 뭉치들을 무거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받아 들었다.
“요약하자면, 과거 폭식이 강림했던 자리도 이 오르크, 아니 오렌 평야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군단의 강림 위치도 참고만 하시죠.”
“그럼 이 자료를 보는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 반박하는 검제의 태도는 꽤 조심스러웠다.
크롬벨의 신분이 확인된 이후로 그에 대한 경계심이 누그러진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물론 다른 초인들도 대다수가 검제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말이다.
더불어.
“강림의 위치도 칠죄종도 변화했겠지만, 적어도 그 군단의 특성은 크게 변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그것만 인지하고 대비해도 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크롬벨의 태도 역시 거만하지 않고 정중했으며, 이전과 달리 타이니에게도 날을 세우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이미지는 날로 좋아지고 있었다.
물론 한 사람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못했다.
“그렇게 알고 준비했다가, 강림하는 군단의 순서도 달라진다면?”
삐딱하게 찔러보는 타이니의 반문.
그럼에도 크롬벨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니 모든 게 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유동적인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럼…….”
“잠깐, 나부터 묻겠네…….”
검제나 솔레인, 그리고 다른 마도사들까지 용사의 말에 한두 마디씩 보태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타이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타이니는 여전히 그가 못 미더웠다.
글러터니가 강림하기 직전, 마물들의 피와 마기를 흡수한 크롬벨의 역량이 미친 듯이 상승한 것을 보았을 때부터 거슬렸던 것이다.
단순히 그 역량이 지금의 자신조차 짐작하지 못할 정도라서 경계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저 마기 서클, 거슬린단 말이지.’
눈에 보이듯 분명히 인식되는 크롬벨의 마나 서클이 점차 마기에 물들어 가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기 때문.
하지만 그런 면을 공개적으로 따지고 들 수는 없었다.
애초에 자신과 루나가 마기를 흡수하는 광경도 모두가 보았으니,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로 보일 테니까.
게다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다른 변화도 있었다.
‘신성력도 엄청나게 강화된 거 같은데, 그럼 저 마기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대체 저건 어떻게 되먹은 놈이야? 하…….’
저런 말도 안 되는 여러 가지 에너지를 동시에 품고 있다니.
마기의 마나 치환식에 대해 알려 줄까도 싶었지만, 용사는 대놓고 여신의 종을 자처하는 자인 만큼 그것 또한 이단으로 받아들일 터였다.
저쪽에서 경계심을 풀고 자신을 대하고 있는데, 섣불리 찔러봤다간 오히려 악감정을 다시 부추기는 꼴이 될 수 있다.
“하…….”
또다시 한숨만 나오는데.
“……그렇군요. 타이니 경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새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갑자기 질문의 화살이 제게로 돌아왔다.
“응?”
어리둥절해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오른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루나를 제외한 다른 동료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그 순간.
“하…….”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런 그들의 눈빛이 ‘네가 그럴 줄 알았다’ 등의 의미를 담고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것은 피해 의식일까?
아니, 그럴 리가.
“뭔데? 딴생각 좀 하고 있었는데, 왜!?”
그래서 오히려 더 당당하게 나갔다.
그러자.
“흠냐?!”
화들짝 놀라 깬 듯한 루나가 입가의 침을 닦으며 눈을 떼구루루 굴렸고.
[그런 말 당당하게 하지 마! 내가 쪽팔려.]
타박하는 에스티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바로 왼쪽 옆에 있으면서, 귓속말도 아니고 전성으로.
“왜……?”
이상해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 꿋꿋하게 다른 동료들을 바라보는 에스티나의 목덜미가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진심인가 보다.
‘왜 네가 쪽팔리는데……?’
칫.
“……다음 강림을 대비한 연합군의 주둔지를 어디로 할까 얘기 중이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의견만 묻는 거다.”
다행히, 검제가 빠르게 거들어 주었다.
다만 그 물음 자체가 타이니에게는 이상하게 들렸다.
“그냥…… 오렌 평야에 있는 거 아니었어?”
몇 번 눈을 껌뻑이다가 그리 되묻자, 또 동시에 한숨을 쉬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인간들이 진짜…….’
“아니, 시간이 얼마나 남았다고 군진을 이동해!? 병력이나 물자 보충이나 받을 것이지!”
그에 이번에도 오히려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데.
“우리는 연합군을 제국 중심부와 왕국 연합의 중심인 그리드 왕국 쪽으로 나누는 방안을…….”
“그리고 다른 곳에 차원문이 열릴 수도 있지만, 여기서 또 열릴 수도 있는 거잖아!? 그걸 누가 장담해?”
그저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토해 낸 말.
하지만 그 말에 검제와 용사, 대마도사 솔레인이 동시에 움찔했다.
“허허…… 그럴, 수도 있지?”
“흐음. 허에 허를 찌른다라…….”
“마족도 머리가 있을 테니, 일리가 있어.”
“만약 놈들이 일부러 장소를 지정하는 게 아니라 임의로 정해지는 거라고 쳐도, 같은 곳에서 문이 열릴 확률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뭐야…….
그냥 해 본 말인데?
“사실, 오렌 평야가 대륙 전체로 보면 중심이긴 하지요. 다음 차원문이 어디서 열릴지 모른다면, 차라리 이대로 뭉쳐 있는 것이 답일 수도 있겠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병사들의 피로도도 생각하면요.”
“괜히 아세리안과 그리마로 분산했다가 혹시라도 다시 오렌 평야에서 문이 열리면, 그게 최악의 경우가 될 겁니다.”
“흠, 저 돌대가리 녀석 입에서 쓸 만한 말이 나올 때도 있군.”
평소라면 울컥했을 검제의 매도에도 타이니는 떨떠름할 뿐이었다.
‘……다들, 정말 그 가능성은 고려 안 했던 거냐?’
그렇게 잠시 멍해 있는데.
“조금 아쉽네요. 타이니 경이 더 많은 미래를 보고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용사의 그 한탄은 그 와중에도 그냥 들어 넘길 수가 없었다.
쾅!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죽었었다. 나와 검제를 비롯한 모두가 다! 그것도 그 시점에 인류가 대비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갈아 넣었던 일이야! 그걸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라!”
아직 빅뱅의 후유증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몸으로도 넓은 천막 안에 있는 모두를 떨리게 만드는 살기가 배어 나오는데.
그 앞에 선 용사가 난처한 기색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 이런.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압니다, 알아.”
“뭐라고……?”
“저 역시 마계 대전을 겪은 몸이라는 걸 잊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타이니 경. 우리 때도 그 못지않게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순간 그럼에도 이겨냈다는 자랑인가 싶었지만.
“저와 제 동료들도 최선을 다했지만, 당시 아직 이 세계를 떠나지 않았던 신화종들과 신의 흔적들이 뒤늦게나마 돕지 않았다면 인류는 그대로 멸종했을 겁니다. 그저…….”
그 말을 하며 허공을 바라보는 크롬벨의 눈빛에는 짙은 허무감과 아련함이 담겨 있었다.
“그저 마족의 저력을 알기에 아쉬움에 한 말이었을 뿐입니다. 미안합니다, 타이니 경.”
답답함과 암담함이 묻어 나오는 씁쓸한 표정.
생각지 못한 용사의 약한 모습에, 타이니는 처음으로 그에 대한 경계심이 살짝 누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은, 동료들이 하나하나 죽어 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전생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런 느낌을 그만 받은 것은 아닌지, 순간 천막 안이 온통 침묵에 잠겼다.
그러자.
짝.
손뼉을 치며 모두의 이목을 모은 검제가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자, 이제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 봅시다. 다행히 더 좋아진 것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무슨?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자, 검제가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 네가 쓰러져 있을 때 나온 얘기다. 마지막에 우리를 도우러 온 최정예들. 그 친구들이 그냥 생각 없이 죽으러 온 게 아니었더라고.”
“아. 성물……!”
성물?
호응하는 크롬벨의 목소리가 더 궁금증을 유발했다.
“정령으로 성물의 핵을 옮길 수 있다는 얘기는 너도 들었지? 정령들이 그렇게 성물의 핵을 보유하면, 그 반경 500m 범위에 영혼살의 권능을 막아 낼 수 있는 방벽이 생긴다더군. 그 안에 담긴 성력을 회복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말이야.”
“뭐!?”
“성물의 힘이 닿는 범위 안에 있다면, 적어도 칠죄종이 노려보는 것만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얘기다.”
“어…….”
“저기 계신 솔레인 님이 옛 자료에서 찾아내신 정보라더군.”
“내가 아니외다. 우리 마탑의 제자들이 찾아낸 거지.”
“뭐, 어느 쪽이건 간에요. 덕분에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습니다.”
검제와 대마도사가 웃으며 서로 덕담을 건네는 순간, 타이니는 그제야 전생에 들었던 말 중 일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성물이 있었으면 달랐을 거다. 그 말이 그런 뜻이었나?”
“그래. 사라진 성물 2개를 지켰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았겠지만 말이야.”
“어차피 대륙을 아우르는 대결계를 쓰지 못한다면, 그렇게 활용하는 것도 괜찮겠지요. 제가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진 못했습니다. 다시금 사과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크롬벨 경.”
초인이나 초월무구 없이도 칠죄종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거니, 사라진 성물에 대한 아쉬움 정도는 신경 쓰이지도 않을 정도로 좋은 소식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이어 나가려 하던 그때.
“티네스 님! 황궁, 아니 탑에서 급보로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방법을, 방법을 찾았답니다!”
갑작스레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온 기사의 보고가 모두의 귀를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