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질투와 탐욕
- 폭식이 소멸했다.
마계의 중심에서 담담히 흘러나온 영파 한 줄기.
좀처럼 먼저 나서는 법이 없던 칠죄종의 수장, 나태의 영파가 군단을 조율하던 다른 칠죄종들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 흐, 그 바보 짐승 놈이 결국?
마계의 무덤에서 다시금 어둠을 뚫고 나타난 데스 로드, 그린 아이가 이글거리는 녹색 불길을 토해 내며 마계의 중심을 응시했다.
그의 영파에는 일말의 안타까움도 들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기꺼움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내 차례가 온다. 흐흐흐흐.’
우우우우웅.
우르르르르릉.
마계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솟구친 망자의 왕의 투기가 지저를 진동시키고.
콰직, 콰직.
새하얀 뼈들, 망자의 군단이 땅을 뚫고 튀어나와 주인의 투기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폭식의 소멸 소식을 듣고 느낀 바는 다른 칠죄종도 비슷한 것인지.
- 푸하하하. 그 머리 나쁜 짐승이 드디어 일을 냈구나.
- 그 한심한 것이 칠죄종의 이름에 먹칠을 했어.
- 아무리 반푼이라도 중간계의 저력이 그 정도였나?
- 운명의 변수인가 하는 그것 탓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나태?
연달아 전달되는 영파에는 안타까움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린 아이는 그것을 인식한 후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래, 이것이 우리의 본질.’
애초에 이곳 마계는 지독한 적자생존의 세계.
아니, 망자의 왕 입장에 생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니, 적자존재의 세계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것이 그들 칠죄종이었다.
‘싸우고 경쟁하며, 발전해 나아간다.’
심지어 죄악을 상징하고 그 개념의 본질을 흡수하며 신성을 얻기까지 한 이들이, 어찌 협력을 이야기할까.
그저 못난 경쟁자 하나가 도태되었음을 기뻐하는 것이 마계의 올바른 도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 운명의 변수를 먼저 제거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그자는 강림이 이루어진 후에도 전향을 택하지 않은 채 폭식을 소멸시켰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심각한 변수라 생각하신다.
이어지는 나태의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변수가 생길 것을 알면서도 군단의 순서를 바꾸지 않고 내보내지 않았는가.
글러터니가 카르마를 소모해 가며 시기를 앞당겨 움직였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순번을 바꾸는 것보다 더 큰 변수를 줄 수 있었을까?
솔직히 말은 안 했지만, 자신을 비롯한 다른 칠죄종도 그것이 폭식을 희생하여 중간계의 저력을 테스트해 본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 터였다.
가장 약한 자를 앞세웠을 때 그가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하면 좋지만, 그게 아니어도 적을 방심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애초에 원래부터 서열 최하위였던 폭식은 언젠가부터 죄악의 개념도 일부 소실하여 영혼의 격에서마저 차이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아마도 그 얼마 전 죽었다는 고대의 폭식인지 뭔가가 개념을 일부 빼앗아 간 거였겠지.’
다른 칠죄종 모두가 짐작하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사실.
그것을 빌미로 폭식을 제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테라포밍에 관한 건 확실히 핑계였을 텐데.’
아니, 만약 그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폭식이 선두여야만 했던 거라면…….
- 다음 강림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시다. 그러니…….
한번 시작된 의심은, 그린 아이가 다른 칠죄종의 대화조차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혼자만의 생각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 운명의 변수가 폭식과 만나면 전향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 뜻이었던 건가?’
억지로 나태의 논거를 되짚어보면, 이렇게 말이 안 되는 헛소리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질투’의 본질은 시기하고 의심하는 것.
그린 아이는 그 헛소리가 사실일 것을 가정하고 이전의 대화를 되짚어 봤다.
‘그자를 먼저 제거하지 못한 게 잘못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마치 중간계의 그 운명의 변수라는 것이 당연히 전향했어야 하는데 안 해서 문제라는 듯한 나태의 영파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전향할 거라 생각했다면, 제거하라고 할 이유도 없었을 텐데?’
뭔가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 나태나 지배자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수많은 상념이 동시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전향할 거라 확신했다면, 왜 그전에는 변수를 제거하라 했던 것일까.
‘아니, 굳이 제거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지.’
그러고 보니, 나태가 그에게만 따로 전한 말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소생시킨 몽마의 여왕에게 그리 전달했었다.
변수가 더 커지게 만드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 제거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변수가 더 커지게 만들어라.
그때만 해도 그는, 그 운명의 변수라는 존재가 운명을 더 크게 흔들어 차원벽을 얇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누가 들었어도 그렇게 이해했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혹시 본질이 그것이 아니라…….
‘운명의 변수, 그 존재 자체를 커지게 만들라는 거였다면?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왜?’
강림의 시기가 되어서는 놈의 전향을 당연시하였으면서, 그전에는 제거하려 했다.
즉 운명의 변수는 일정 시기가 되기 전에는 제거해야 할 적이지만, 그 뒤에는 포섭할 수 있는 아군이 된다는 것.
그렇게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운명의 변수. 그 존재에게 무언가 있다. 나태나 그분만 알고 있는 무언가가.’
그렇게 생각하면, 심각한 변수라는 것은 아마.
‘마족과 적대하던 자가 폭식과 대면하는 순간 전향을 택할 정도로 변화했어야 하는 무언가. 그 무언가가 변하지 않은 거다.’
질투는 시기하고 의심하는 자.
인간 출신으로 감히 그의 위에 군림하는 시기의 대상, 나태가 그에게 준 작은 단서가 씨앗이 되어 커다란 의심의 열매가 자라났다.
구멍투성이의 논리지만, 그린 아이는 왠지 그것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 그런 거야.’
폭식의 권능이 강자를 먹어 치우며 강해지는 것이라면,
질투의 권능은 시기할수록 강해지고, 의심할수록 논리를 초월하는 직감을 얻는 것.
그린 아이는 질투답게 그 구멍투성이 논리에서 답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순간.
- ……웬일로 그린 아이가 조용하군.
- 그러게, 카르마를 소모해야 한다며 지랄할 줄 알았는데.
- 더구나 파이조차 나눠야 할 마당이니, 질투의 성미에 길길이 날뛰는 게 정상인데 말이야.
- 혹시, 겁이라도 먹었나.
- 푸하하하하!
다른 칠죄종들의 조롱이 날아들었다.
“흠?”
- 카르마 소모? 나눠? 그게 무슨 말이지?
- 망자의 왕이 잠이라도 잔 건가…….
- 답지 않은 말이다, 그린 아이.
-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다. 다시 설명해 달라.
- 진짜 겁이라도 먹은 건가.
- 우습군.
다시금 날아드는 다른 칠죄종들의 비난에 그의 몸에서 녹색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할 때.
- 다음 강림은 그린 아이와 애버리스가 같이 나선다.
다시 끼어든 나른한 목소리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 내용은 달갑지 않았지만 말이다.
- 같이?
- 그래. 원래 두 번째와 세 번째 강림 예정이던 질투와 탐욕의 군단이 동시에 강림하여 제대로 정벌을 시작하라는 그분의 지시다.
“무슨……!!!”
쾅.
우르르르르르릉.
쩌저저적.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린 아이의 발밑에서부터 지진이 일어났다.
점차 크게 갈라지기 시작하는 망자의 무덤.
고오오오오오,
그 갈라진 땅속 깊숙한 곳에서 무수한 뼈다귀들이 솟구쳐 오를 때.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나의 언데드 군단만으로 충분하다, 나태!!!
- 그분의 뜻이다, 그린 아이. 글러터니가 당했다. 그것을 명심하라.
- 나를 감히 그 덜떨어진 짐승과 비교하는 것인가!!
- 클클클. 난 함께하게 되어 나는 기쁜데 왜 그렇게 성질을 내지, 그린 아이?
- 닥쳐라, 애버리스! 내 밥상에 숟가락을 올릴 생각하지 마라!!!
그린 아이는 진실로 분노했다.
지배자와 나태가 칠죄종에게도 숨길 만한 비밀이라면 하나뿐이다.
‘신성.’
필멸자를 신의 권능에 닿게 만들고, 반신을 온전한 신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그 절대의 힘.
‘마왕께서 나태에게 그냥 영원성을 내려 준 게 아니야. 애초에 고대에 녀석이 갖고 있던 것 자체가…….’
한낱 인간이 나태라는 죄악의 본질을 얻어 마족이 되고 영원성까지 얻게 만든 힘.
그런 것이 중간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을 얻을 확률을 나누자고?
“어림없는……!”
- 어림없는 소리 마라!!!
우르르르릉.
그린 아이의 분노와 함께, 마계의 가장 낮은 곳에서 솟구친 살기가 가장 높은 하늘을 꿰뚫었다.
“끼이이이.”
“끼리리릭!”
공포를 느끼지 못할 언데드 군단마저 뼈를 떨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꾸어어어!”
“크르르르!”
두두두두두.
마계의 무덤과 그 주변에서 움직이던 마족과 마물 모두가 그 살기의 중심지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 치며, 일대에 소란이 일어났다.
굳이 영파 때문이 아니더라도, 칠죄종이라면 마계 끝에서도 느낄 법한 그 살벌한 기세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그린 아이의 마음가짐을 여실히 보여주었지만.
- 미친 건가, 그린 아이?
- 아무리 질투라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 아무래도 이번 대의 질투는 죄악의 권능에 영혼까지 먹힌 X신인가 보군.
- 어리석다.
- 이렇게 나오면, 대체 그 짐승과 다를 게 뭐지?
다른 칠죄종들의 반응은 비웃음뿐이었다.
거기다.
- 정말 내 말을 안 들은 모양이야…….
나른한, 하지만 분노 섞인 영파가 엄습하는 순간에는 단호하던 그린 아이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 강림의 순서는 고대부터 이어받은 권리! 그래서 글러터니 역시 가장 먼저 나서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 권리를 비틀겠다고!?
이미 죽은 글러터니까지 언급하며 고집을 부려 보지만.
- 마수병단이 차원 균열을 통해 흘려보낸 중간계의 카르마가 얼마나 될 거 같은가?
그 이어진 한마디에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 무슨 뜻이지?
- 정말 못 들었나 보군. 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 네게 물은 것이 아니다, 애버리스!!!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해 다오, 슬로스.
- 1만도 채 되지 않는다.
나른하게 돌아온 그 대답에 그린 아이의 녹색 안광이 크게 일렁였다.
- 1만? 농담이겠지?
- 내가, 농담을 했다?
- ……진실인가. 정말로? 하…….
나태의 영파에 서린 감정을 느낀 그린 아이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마수병단이 당했음을 알면서도 당당히 홀로 나서겠다고 했던 것은, 이미 그들이 초토화시켜 놓았을 중간계를 날로 먹어 보겠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었다.
설령 글러터니가 운명의 변수에 당했다 하더라도, 그 군단만큼은 중간계의 나약한 생물들이 버텨 내지 못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
그런데…….
- 대체 그 짐승은 얼마나 X신 같은 짓을 한 거지!? 혼자 부하들을 학살하고 자폭이라도 한 건가!?
이미 죽어 버린 글러터니가 눈앞에 있다면 제 손으로 다시 찢어발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래서야 단독으로 나서겠다 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 이 내가 전향하지 않고 중간계의 힘을 규합해 저항했다고 상상해 보아라, 그린 아이. 그럼 마수병단이 어찌 되었을까?
나태의 이어진 말이 그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나태가 아닌 인간이었을 적 나태에 관한 이야기라면, 질투에게 전해진 전승만 해도 엄청났다.
지금의 나태가 괜히 칠죄종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 아니란 뜻이다.
자연히 견적은 쉽게 나왔다.
- ……몰살이겠지.
- 그분께서는 지금의 결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 그런…….
- 그래도 홀로 나서길 바라는가?
마지막으로 이어진 나태의 영파는 비웃음까지 품고 있었지만.
그린 아이는 차마 거기서 더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 받아들이겠다.
- 좋다, 방식은…….
마계의 군주들 사이에서 다시금 회의가 시작되고.
마계의 가장 깊은 곳, 마계의 무덤은 그 한참 뒤 일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