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305화 (305/500)

305화. 다음은 다음이고

“X발, 인생, 진짜…….”

우드드득.

스아아아.

갓 핸드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신성한 빛이 어긋난 뼈를 바로잡고 찢어진 살을 아물게 하는데.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한 그 회복의 과정 중에서도 타이니는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눈을 부릅뜬 채 동료들을 노려보며 투덜거리고만 있었다.

우드득.

“오래 살다 보니 별 희한한 경험을 다…….”

우득.

“크, 하는구나. 개고생해서 마수왕 때려잡았더니, 동료들한테 암살당할 뻔하질 않나…….”

현생 나이 17년 몇 개월(추정)짜리가 할 만한 소리는 아니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 모두가 그 말에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바로 앞에서, 우울한 표정이 된 루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 내가 받았는데, 너 더 무거워졌어. 계산 미스.”

태연한 안색으로 ‘동생, 튼튼. 괜찮!’ 하고 엄지를 치켜세우면서도 뒤에서는 그림자 오러로 타이니를 받아 냈던 그녀.

“올케, 놀리는 게, 재밌어서…….”

우물쭈물 변명을 하는 루나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괜찮아, 누나. 누나 덕분에 살았으니까. 딴 새끼들은 웃고만 있었는데, 뭐.”

타이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다시금 다른 이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기 바빴다.

그제야 안색이 조금 밝아지는 루나.

“진짜……?”

“그럼.”

말을 더듬는 버릇도 많이 나아졌고 표정도 한층 다채로워진 그녀의 모습이 타이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따스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녀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회복하지 못할 치명상을 입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저놈의 올케 얘기 정도는…… 봐주자.’

타이니는 놀란 마음을 겨우 달래고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잠들어 버린 에스티나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가뜩이나 회복이 느린 엘프가 낙일시까지 썼으니 체력이 진작 바닥났을 텐데, 이제야 잠들었다는 게 더 신기할 노릇.

‘……못 들었겠지, 뭐.’

에스티나의 차림새가 차림새인 만큼 자세가 다소 민망하기는 했지만, 중상을 입고 탈진한 이들이 갓 핸드의 성법을 같이 받으려면 이보다 나은 자세는 없었다.

타이니는 에스티나에게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다른 동료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다들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는 가운데, 혼자 양심이 없는 듯한 콧수염 신사가 헛기침을 했다.

“어흠흠. 타이니 경, 그래도 다들 신분이 있는데 새끼까지는 좀…….”

“좀 뭐요?”

“아니, 아닐세.”

아무 짓도 하지 않은, 하지만 그 탓에 타이니를 방조 치사(?)할 뻔했던 그리드가 거듭 헛기침을 하며 슬쩍 물러났다.

그러자 타이니는 그 뒤에 숨어 있던 갈색 머리 청년과 절로 눈이 마주쳤다.

까드득.

이 가는 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렸을까.

화들짝 놀란 아르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난 그래도 도왔어!”

“쿠션 살짝 깐 게 도운 거냐? 제일 높이 날려 보낸 게 네놈인데?”

“아, 그. 미, 미안…….”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쥐 잡듯 잡아 놓은 보람이 있는 것인지, 이제야 만족할 만한 반응이 돌아왔다.

“킁.”

우우웅.

겉으로 보이는 상처도 그제야 다 아물어 가고 있었고.

“고맙습니다. 성기사 영감.”

영감, 그 마법의 단어가 갓 핸드의 투구를 파르르 떨리게 만드는 것을 못 본 체하며, 타이니는 고개를 돌렸다.

좋은 날이니 이쯤 해 둘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49일 남았다.”

기분 나쁜 목소리, 아니 기분 나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사 크롬벨. 그의 말이 전생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글러터니가 강림했던 그때.

- 49일 후 다음 군주들의 병력이 올라오기 전에, 내 군단이 먼저 너희 인류를 끝장내리라.

물론 현생에서는 글러터니가 그런 말을 내뱉기도 전에 끝장내 버렸지만, 그런데도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49일……. 고대의 마계 대전에서도 그러했나?”

그 반문에 크롬벨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옆에 있던 펜릴을 쏘아보았다.

- 이제 와 숨길 필요는 없지 않나, 크롬?

“……2천 년이 지나도 네 녀석의 입은 여전히 싸구나, 펜리르.”

- 펜릴이라 불러라, 크롬. 이제는 나도 그게 편하다.

“하…….”

그 짧은 대화는 신성력을 내뿜으며 석상처럼 서 있던 갓 핸드를 움찔하게 만들었고.

타이니의 눈총을 피해 딴청을 부리고 있던 다른 초인들의 귀까지 사로잡았다.

그중에서도.

“무슨 말이냐, 타이니? 고대 마계 대전? 2천 년?”

검제가 가장 빠르게 반응했다.

“정말로 이자가 부활한 게 맞다는 뜻이냐?”

타이니에게 그리 물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크롬벨을 향해 있었는데.

“정말로? 부활?”

그 질문에 타이니는 오히려 어리둥절해할 뿐이었고, 크롬벨의 안색은 더욱 굳어졌다.

“어차피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군요…….”

-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

“넌 닥치고, 펜리르.”

- 펜릴이라고 불……. 아, 알았다.

크롬벨의 푸른 눈이 무섭게 노려보자,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던 고대 정령이 바로 붉은 눈을 내리깔았다.

둘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봐도,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한 번에 알 수 있는 모습.

그에.

“펜릴 님, 굳이…….”

가만히 있던 우란 누드가 발끈한 모습을 보였지만, 펜릴이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 내가 성녀와의 약속을 어겼다. 그것을 크롬벨이 이제 알아 버렸으니…….

“아무리 그래도.”

- 너야말로 예의를 갖추거라, 우란. 크롬벨 라이언하트는 고대에 이 세상의 멸망을 막았던 영웅. 너와 지금의 인류가 이 세상을 온전히 걷고 있는 데에는 그의 덕이 크다.

펜릴의 그 한마디가 멍하니 듣고 있던 다른 초인들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들었다.

“정말로…….”

“정말로, ‘그’ 용사?”

“그 용사가 부활한 것이라고?”

“말이 돼?”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

하지만 크롬벨은 그들의 의문에 일일이 대답해 주지 않고 타이니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때도 그랬다. 칠죄종 중 하나가 강림하고 49일째 되는 날, 다른 군단의 강림이 시작됐지.”

“왜 49일이지?”

“글쎄. 그것은 신화시대부터 이어져 온 법칙이니. 이 세상을 움직이게 만드는 죄와 덕의 본질, 즉 칠죄종과 칠주덕이 그와 관련이 있다는 것밖에 모른다.”

“고작 49일……?”

옆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크롬벨은 인상을 찡그리는 타이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폭식을 잡고 돌아온 것이라지? 그럼 알고 있겠지만, 더는 이리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야. 폭식을 이리 쉽게 처리할 수 있었던 건 그대가 놈의 권능과 약점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라도 몰랐다면 여기 있는 이들 중 몇은 이미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을 테지.”

“흥.”

나 혼자서도 이길 자신 있었다.

그런 확신이 있기에 콧방귀를 뀌어 보였지만, 타이니 역시 크롬벨의 말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바였다.

글러터니와 싸운 전생의 경험이 없었다면 정말 개고생을 했을 테니까.

거기다.

“그리고 다른 칠죄종은 폭식보다 강할 확률이 높다. 놈들이 어떤 권능을 쓰는지도 모를 테니, 대비하기는 더욱 힘들 테고.”

이어진 크롬벨의 말은 도저히 한 귀로 흘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8단계 악마급 마족이 단순히 ‘영역’을 사용하는 강력한 마물이라 생각한다면.

9단계 반신급인 칠죄종은 영혼살의 권능을 비롯하여 일반적인 마법이나 기술의 상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권능이라 할만한 특징을 몇 가지씩 더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나머지 군단장의 특징이나 권능에 대해 아나?”

“과거 마계 대전 당시의 칠죄종에 대해서는 알지. 하지만 현시점의 그들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당장 아까 폭식이 썼던 이능 무효화도 과거의 폭식에게는 없었던 힘이니까. 다른 놈들도 내가 모르는 능력이 더 생겼을 가능성을 무시 못 한다.”

“……일단 과거의 칠죄종에 대한 얘기라도 들어야겠군.”

“당연히 그래야겠지.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뭐를?”

정말로 몰라서 한 반문이었는데, 크롬벨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리고.

“……본디 연 단위를 격하고 일어났어야 할 마수 군단과 폭식의 강림이, 불과 며칠 사이를 두고 이루어졌다.”

“그건……!”

“물론! 그 과정에서 네가 놈들이 그 이상의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는 것은 짐작하지.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것은 분명 이상한 상황. 차후의 강림도 내가 알던 방식과 다르게 이어질 수도 있음이다.”

이어진 말에는 듣고 있던 모두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에 검제가 대화에 끼어들어 보려 했지만, 크롬벨은 아예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으며 타이니만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듣고 싶다고 다그치는 것처럼.

하지만.

“……그나마 첫 단추를 잘 끼웠으니, 앞으로도 잘 해내 봐야지.”

그 기대 섞인 시선에 비해, 돌아온 답은 실망스러웠다.

“그게 전부인가?”

“그럼 어쩔까? 포기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부딪쳐 보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해결책을 생각해 내야지.”

“생각해 내지 못한다면?”

“죽기밖에 더할까? 어차피 난 한 번 죽어 봤으니, 밑져야 본전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죽게 된다면, 그땐 어쩔 수 없지. 남겨진 이들에게 남은 운명을 맡길 뿐.”

“안 되면 죽으면 된다? 너무 무책임한 말 아닌가?”

“내가 어찌 혼자 세상을 책임지겠어? 나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제일 센 사람이긴 하지만. 흐.”

“인류를 이끄는 리더로서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 무책임하다. 실망이군.”

“리더? 내가? 푸하. 크크크, 재밌는 농담이야.”

“농담? 이들을 불러 모은 것이 모두…….”

“이봐, 크롬. 난 그냥 칼, 아니 망치일 뿐이야. 칠죄종이나 마왕의 대가리를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깰 수 있는 망치. 그거면 충분해. 리더니 뭐니, 복잡하게 머리 쓰는 일은 저기 있는 저 영감한테나 시켜.”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잠든 동료의 품에 안겨 있는 주제에.

그 터무니없는 말에서 풍기는 기세만큼은 여전히 당당하기만 한 타이니였다.

졸지에 리더로 지목된 검제가 쓴웃음을 짓는데.

피식.

만난 이래 처음으로 크롬벨의 얼굴에 미소가 보였다.

‘이 새끼가……?’

비웃는 건가 싶었지만, 딱히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아 혼란스러운데.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겠어.”

헛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뱉은 크롬벨은 더 이상의 선문답을 때려치우고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순서가 그때와 같다면, 다음에 강림할 칠죄종은 질투, 언데드 군단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질투하는 망자의 군단. 그리고 내가 겪었던 질투, 인비디아의 특성은…….”

“어, 잠깐……!”

그렇게 갑작스레 시작된 크롬벨의 경험담은, 순간 귀를 쫑긋한 실버 팽의 고함에 의해 중단되었다.

파지직.

그가 번갯불과 함께 단숨에 상공으로 치솟아 오르고.

“뭐야 이거?”

“이 소리는?”

거의 동시에 소리를 들은 초인들이 그를 따라 일제히 구덩이 위쪽을 향해 뛰어오르는데.

“나, 나는?”

졸지에 에스티나와 둘이서 남겨져 버린 타이니는, 하늘로 솟구치는 동료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느껴지는 땅이 울리는 감각.

두두두두두.

점점 거세지는 그 진동과 함께.

- 각하! 저희가 도우러……!!

어딘지 그의 귀에도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내.

- 푸하! 다 뭐 하는 것들이야? 블루윙에, 바토르의 오크 정예, 로얄 엘븐나이트들에, 엘로랑 드워프 전사단?

- 최정예들은 다 왔네.

- 멍청한 것들이, 오면 다 죽는다니까 왜…….

- 왜 성물을……?

동료들의 한탄하는 듯한, 그럼에도 기분 좋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늦었다, 이놈들아! 전쟁은 우리가 승리했다!”

저릭의 우렁찬 목소리가 전장 전체로 울려 퍼지며, 하늘 높이 은빛 늑대의 형상이 그려졌다.

그리고.

-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구덩이 밖에서 들려오는, 천지를 울리는 듯한 함성이 홀로 남겨진 타이니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를 만들었다.

‘49일 남았다고 했던가.’

그렇다 한들 어떠한가.

어차피 정비를 위해서라도 쉬긴 해야 하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 흐뭇한 기분을 즐기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렇지, 티나?”

고로롱.

“하…….”

완전히 탈진해서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육체도, 자신의 어깨에 기댄 채 불편한 자세로 잠든 에스티나의 고롱거리는 콧소리도.

타이니에게는 기분 좋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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