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글러터니 (3)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일격이 벼락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간.
신경질적으로 사방에 공세를 퍼붓고 있던 글러터니의 꼬리가 갑자기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 캬오오오오!
크기만 다를 뿐 사자의 그것과 별 차이 없어 보이던 꼬리가 은회색 뱀의 머리로 변하더니, 강렬한 영파를 뿌리며 글러터니의 둔부 위쪽으로 거대한 검붉은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 글러터니는 겉모습만 보면 육탄전에 특화된 무식한 괴수 같은데, 실제로 그 본체가 싸우는 모습 역시 몇 가지 권능을 쓴다는 걸 제외하면 그 추측이 크게 틀리지 않아. 본체‘는’ 말이지.
- 그런데 급박한 상황이 되면 그 꼬리가 뱀 머리로 변하면서 8서클급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한다. 그게 정말…….
엿 같았지.
저릭이 타이니의 그 말을 떠올린 순간.
녹색의 벼락은 그대로 검붉은 마법진을 관통해 그 꼬리, 아니 뱀 머리를 꿰뚫었다.
- 끼에에에에에에에에!
육성이 아닌 영파로 내지르는 뱀 머리의 비명에 글러터니의 거대한 몸이 움찔했다.
그리고 그 순간, 끝도 없이 쏟아질 것 같았던 암흑 오러의 공세가 미세하게나마 흐트러졌다.
그 찰나의 순간을, 저릭은 놓치지 않았다.
‘이젠 내 차례다!’
파바바바박.
“합!”
정신없이 날아오는 창살, 아니 털로 만들어진 암흑 오러의 비를 쳐 내며 그 사이로 몸을 날렸다.
오러익시더의 경지에 올라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무력을 얻었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반신급과 직접 부딪치고 보니 그 일각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살이 저릿저릿하게 떨리고 있었다.
물론, 스릴과 흥분의 떨림이었다.
‘짜릿하군.’
그리고 생각했다. 고민해서 길을 찾기를 잘했다고.
사실 그의 특성 ‘약자 멸시’는 다수의 하수들과 싸울 때는 무적에 가깝지만, 군단장과의 전투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괜찮아. 너는 그 육체만으로도 인간 오러익시더보다는 강할 테니까. 그 ‘아너(Honor)’의 효과도 그 강점을 훨씬 증폭시키는 거고.
- 아너가 아니라 훈데트겔(фгввЗ)…….
- 뭐든 뜻만 통하면 됐지.
- 에라이, 쌍…….
그 말을 해 준 게 타이니 놈만 아니었어도 곧바로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힘으로 자신을 꺾은 놈의 말이기에 고민했고, 궁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만들어 냈다.
자신보다 상위의 존재에게도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술을.
‘간다!’
파아아아아앙!
그의 애병, ‘아너’가 주인의 의도에 따라 변이된 영역의 힘에 바람의 오러를 싣고 휘둘러졌다.
그리고.
영역 변이&달빛 가르기.
특화 영역 전개. 전쟁의 길(War Road).
콰콰콰콰콰콰.
그 은빛 오러가 글러터니의 공격을 모조리 비켜 내며, 목표인 놈의 목까지 내달릴 공간을 시원하게 뚫어 냈다.
그 대가로 검제, 타이니와 연동하던 영역의 동조가 깨어졌다.
이젠 약간의 시간을 버는 대신, 그 백 배 이상의 시간 동안 영역의 힘도 없이 글러터니의 공격을 받아 내는 샌드백 신세가 되겠지만.
지금은 그 ‘약간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뒈져라!’
마수왕이 전신에서 암흑 오러의 비를 쏟아 내면서도 정면에서 워해머를 휘두르는 기사를 견제하느라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짧은 틈새.
아무런 방해 없이 최대 속도로 순간 가속한 저릭의 몸이, 그가 낼 수 있는 최선의 힘으로 그의 명예(Honor)를 휘둘렀다.
저릭식 도끼 살법, 월식(Lunar Eclipse).
새하얀 바람의 오러로 달빛을 그려 내던 저릭의 도끼가, 이번엔 변두리만 은빛으로 빛나는 새까만 원을 그려 냈다.
거대한 글러터니의 머리 전체를 가두는 새까만 원을.
그러나 그 순간.
- 흥!
글러터니의 목에 어지럽게 휘감겨 있던 뿔들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자라나며 놈의 상반신을 갑주처럼 뒤덮었고.
터어어어어어어어엉!
무겁고 예리한 살기를 담은 저릭의 도끼는 강렬한 파열음을 내며 주인의 몸과 함께 빙글빙글 돌며 튕겨 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막상 튕겨 나간 저릭의 얼굴에는 호쾌한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권능, 불굴의 갑주. 사용하게 만들었다, 타이니.’
애초에 글러터니가 저 갑옷을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으니까.
이내 그 뿔의 갑주가 다시금 스르륵 사라져 가는데, 그 그림자 속에서 보랏빛 머리의 하프 엘프가 튀어나왔다.
마수왕의 눈동자가 세로로 좁혀지는 순간.
“꿇어라!”
위력 봉쇄(Power Lockdown)
쿠우우우웅.
어느새 곁에 다가온 검은 갑옷을 입은 중년의 기사가 붉은 검을 땅에 찍는 순간, 글러터니의 한쪽 무릎이 꺾이고.
죽음의 낙인(The Stigma of Death)
뿔의 갑주가 사라진 목덜미에 검은색 실선이 파고들며, 죽음의 기운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르르르르!”
글러터니에게는 그것이 타격은 되었을지언정, 치명상이 될 수는 없었다.
물론 그것이 끝이었다면 말이다.
- 감히!!
콰, 콰, 쾅!!
건방진 인간 놈들을 단숨에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려던 앞발과 이빨이 육중한 해머에 막히고, 그대로 그의 거체가 뒤로 밀려났다.
쿵. 쿵.
앞발 하나만 해도 연약한 중간계에서라면 이 주변의 지반을 통째로 가라앉힐 만한 힘이 담겨 있었는데, 저 혐오스러운 정령을 탄 작은 인간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밀려나 버렸다.
권능의 발톱을 무시하는 저 신의 무기도 당혹스러운데, 힘에서까지 밀리고 만 것.
심지어 그 정도의 힘의 충돌이라면 처음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충격파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려만, 이상하게 그런 여파마저도 충돌 지점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그 여파를 지워 버리고 있는 것처럼.
그게 자신은 아니니, 지금 상대하고 있는 이놈이 여력을 남겨 놓고 그 파장을 없애 버리고 있다는 말일 수도…….
“크와아아앙!”
- 그럴 리가!
분노와 신경질, 짜증이 뒤섞인 포효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며 그 틈을 노리려던 다른 잡것들을 다시금 멈칫하게 만들었지만.
영혼살의 권능과 피어의 권능이 동시에 섞인 포효가 고작 그 정도에 그쳤다는 사실은 글러터니의 분노를 더욱 키울 뿐이었다.
그리고 반신, 칠죄종, 폭식의 자존심은 그것이 인간의 능력 때문이라 여기지 않았다.
- 빌어먹을 신의 무기!!!
특히나 눈앞의 저것.
실제로도 저 작은 망치에 어린 힘은, 무엇 때문인지 반신의 인지 능력으로도 파악이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 대체 그건 뭐냔 말이다!!
콰아아앙!
그사이, 다시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여신이시여!”
진절머리 나는 여신의 힘을 전신에 두른 껍데기가, 겁도 없이 그 혐오스러운 힘을 두른 채 돌진해 오고.
“풀려라, 얼음!”
신의 무기를 5개나 쓰는 놈이 차가운 오러로 잡스러운 공세를 쏟아 내자.
“합!”
은발의 작은 인간이 그것을 차가운 바람으로 묶어 내더니 위력을 몇 배 증폭시키며 쏘아 냈다.
웨폰 마스터&북풍의 기사 연계기.
혹한의 바람.
거기에.
“아우우우우!”
거슬릴 정도로 눈꼴 사납게 움직이던 털북숭이가 벼락을 만들어 내자.
[增幅(증폭)]
그 뒤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특이하게 꼬챙이로 마법을 쓰는 놈이 그 위력을 몇 배로 불렸고.
“이쯤!?”
쾅!
신의 인형에 탄 난쟁이가 갈색 불꽃 같은 오러가 이글거리는 망치를 어중간한 위치로 휘두르자, 그 벼락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와 망치의 오러에 더해져서 쏟아졌다.
문나이트&마도 기사&기갑왕 연계기
불타오르는 벼락.
그 와중에 앞에서 워해머를 든 채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놈은 여유만만하게 웃고만 있었고.
뒤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불쾌한 여신의 힘을 가진 놈과 중간계의 생명치고는 조금 커다란 놈이 틈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억지로 피하려는 순간 바로 앞뒤에서 덮칠 것처럼.
- 감히!
급박한 순간에도 모든 상황을 파악해 낸 반신의 감각이, 이 한순간에 쏟아지는 공세를 ‘불굴의 갑주’ 없이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려 왔다.
그렇다면.
- 전부 꿇어라!!!
진정한 강자로서 그 위엄을 보여 주면 그뿐.
영파와 함께 그의 최강의 권능 중 하나가 발동되는 순간.
그를 향해 쏘아지던 모든 이능과 에너지들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능 무효화 선언.
마계 최강의 육체를 가진 글러터니가 전대의 폭식까지 잡아먹게 해 준 최강의 권능이 주변의 모든 마기, 마나, 신성력, 정령까지 일순간에 지워 버렸다.
“헙!?”
“헉!”
“이게……!”
전력을 다한 공세가 일순간에 사라지고 극심한 탈력감이 초인들을 사로잡을 때.
최강의 마수는 정령까지 사라진 채 속이 텅 비어 버린 눈앞의 먹잇감을 향해 곧바로 커다란 입을 벌렸다.
- 네놈!
- 파편이 개화했다면, 그 변수는 우리에게 협력할 수도 있다.
- 개화한 운명의 파편은 신성을 담고 있으니, 놈이 전향한다면 그것을 그분께 넘겨라.
나태가 자신에게만 넌지시 일러 준 예측도 어긋난 상황이지만, 지금은 그 문제를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직전까지 벌레들이 자신을 몰아붙이게 만든 중심, 이놈이 운명의 변수가 아니면 뭘까.
왜인지 당연히 느껴질 거라던 파편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 나의 자양분이 되어라!
신성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놈을 그대로 씹어 삼켜 다른 칠죄종에 비해 ‘다소’ 부족한 격을 채워서 그 나태를, 아니 그 너머의 진짜 왕위까지 먹어 치울 수 있는 카르마를 쌓을 것이다.
일 초를 수백 분의 일로 쪼갠 듯한 그 짧디짧은 순간.
뱀처럼 세로로 찢어진 글러터니의 눈은, 더없이 달콤한 꿈에 젖어 들었다.
그 벌린 턱 아래에 상상치 못한 충격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내가……!!”
--------깽!
우드드득.
엄청난 충격에 글러터니의 턱이 강제로 닫히는 것도 모자라, 그 머리가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 창살 같은 이빨들 다수가 서로 어긋나 산산이 부서지며 파편을 쏟아 낼 때.
“……그 엿 같은 수법 때문에!!!”
검은 머리 기사가 그저 육체의 힘만으로 수십 미터 상공으로 솟구쳐, 육중한 해머를 다시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깨애애애앵!”
“생명력을 갈아 넣었었다!!”
쿠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르릉.
“알아? 생긴 거 같지 않게 꼼수만 가득한 짐승 새끼야! 넌 오늘 뒈졌어!”
퉤.
글러터니를 마수왕으로 만들어 준 절대적인 권능을 꼼수로 폄하하는 말.
하지만 상상치 못한 상황에서 쏟아진 폭력에 꽤 큰 데미지를 받은 글러터니로선 반박할 정신도 없었다.
“크르……?”
- 이, 이게……?
발밑의 땅덩어리가 그 덩치만큼 푹 꺼지며 그대로 지면에 틀어박힌 육체가 발끝까지 저릿저릿한 통증을 호소했다.
심지어 저 망치에 제대로 얻어맞은 부위에서는 왜인지 재생력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둘째 치고.
‘중간계의 생명체가, 이능도 없이 이런 힘을 낼 수 있다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의 뇌가 오작동을 일으켰, 아니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
정확히 무언지는 몰라도, 이놈은 자신의 최고 권능인 이능 무효화를 무시할 수 있는 신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 이능 무효화, 취소.
“크와아아앙!”
- 어디서 꼼수를……!
다시 돌아온 마기를 그대로 쏟아 내며 기세 좋게 몸을 일으키는 글러터니.
하지만 그런 그의 앞에는 어느새 털이 새하얗게 변한 몸을 약간 부풀린 채 노을빛 오러를 뿜어내는 놈이 다가와 있었다.
“꼼수는……!”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솟구치던 마기가 금세 분쇄되어 휘날리며 글러터니의 머리가 다시 하늘로 치솟고.
“……네놈이 쓰는 거고!”
꽈아아아아아앙!
‘대체 어떻게?!!!’
강렬한 통증과 함께 머릿속이 당혹감으로 뒤덮인 글러터니의 몸이, 이어지는 타격에 재차 지면 깊숙이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르릉.
깊게 파인 크레이터에 다시금 그 깊이가 더해지고.
번쩍.
그런 거대 괴수의 육체 위로, 다시금 노을빛 유성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