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글러터니 (2)
콰직.
쿵.
검은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싯누런 털로 뒤덮인 발.
길이만 2m는 될 법한 그 앞발이 튀어나오자마자 차원 균열을 봉쇄하던 모든 봉인진이 깨어져 나갔다.
저것 역시 글러터니의 힘 중 하나.
“권능을 무시하는 발톱.”
정확히는, 그저 스치는 것만으로도 의지나 영혼이 실리지 않은 모든 이능을 분쇄하는 힘이었다.
“하…….”
“진짜 X 같은 능력이네.”
“저걸 저렇게 쉽게…….”
타이니의 말에, 차원문 앞에 모여든 초인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저마다의 초월무구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권능을 가지고도 차원의 벽을 넘는 일은 힘겨운 것인지, 글러터니의 거체는 서서히, 아주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파지지지직.
우우우우웅.
우르르르르릉.
그저 그 육체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대기가 떨리고 대지가 진동하자, 자연히 장내에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역시 재생했네. 씁, 앞발 하나는 박살 낸 줄 알았는데.”
그나마 덜 긴장한 듯한 사람은 타이니와 크롬벨뿐.
물론 그 둘도 상대적으로 조금 덜하다 뿐이지, 아예 풀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신급의 적을 상대로 방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상황은 더없이 좋다.’
비록 많은 부분이 예상과 어긋났지만, 어떻게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타이니에겐 충분한 자신감이 있었다.
솔레인에게 한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으니.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미 전생에 비해 월등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 혼자서도 글러터니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완전히 긴장을 떨칠 수는 없었다.
꿀꺽.
“쯧.”
지금 균열에서 튀어나오는 저 괴물은 전생에 자신이 목숨을 잃게 된 원흉이었으니까.
놈 역시 종국에는 자신의 해머에 골통이 깨졌지만, 다대일의 전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명백한 자신의 패배였다.
그리고 자신은 이번 생에서 한시도 그 일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혼자서도 이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있더라도, 그 자존심 때문에 글러터니와 일대일 전투를 치를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몰매를 놓을 생각이었다.
파지지지직.
“이제 곧이다. 모두 준비해!”
자신을 제외하고 이곳에 자리한 모두가 칠죄종, 반신급과의 싸움이 처음일 터이니, 경험을 쌓게 해 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경험이라…….’
스스로도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였지만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마계와의 전쟁은 결코 마수병단이 끝이 아닌 데다가…….
- 네가 대미궁에서 죽인 것이 내가 세계수와 함께 처박아 버린 당시의 굴라가 맞다면, 지금의 폭식은 칠죄종의 근원이 되는 힘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 즉, 놈은 당대의 칠죄종 중 가장 약할 것이다.
……라고 저 밉상, 아니 고대의 화석, 아니 용사가 말해 주었으니까.
‘이 상황에 헛소리는 안 했겠지.’
이 와중에도 펜릴을 힐끔거리는 크롬벨의 모습을 일견한 타이니는, 혀를 차며 다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글러터니에게 집중했다.
저번에 놈이 강림할 뻔했을 때에는 악마급들도 몰려 있으니 앞뒤 가릴 것 없이 빅뱅을 후려갈기고 봤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한번 뜨거운 맛을 본 글러터니가 이미 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거의 확실하겠지. 보기보다 교활한 놈이니.’
자신은 일단 전위에 서서 놈을 유인하고 막아서는 역할을 맡는 것이 옳을 터였다.
솔직히 크롬벨의 말이 아니더라도 놈들이 다름 아닌 ‘칠’죄종이라는 걸 자신 역시 알았고, 그 위에 마왕이라는 격상의 존재가 있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나마 전력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 칠죄종을 상대로, 아군 최정예들의 힘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실험해 보는 것이 최선의 수가 될 것이다.
이곳에 있는 동료들 역시 그에 동의했으니.
결국 이 전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최대한 아군의 전력 손실 없이 글러터니를 잡을 수 있도록 전투를 이끄는 것이다.
“모두 적당히 몸 사려. 누구라도 죽을 것 같으면 내가 바로 놈을 때려죽일지도 모르니까. 연습은 확실히 해야지!”
“컹!”
타이니가 월랑을 소환해 올라타며 과한 너스레를 떨었다.
누군가 웃어 주길 바랐지만, 거기까지는 욕심이었던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파지지지직.
쿠우우우웅.
차원 균열 너머로, 그 크기만 3m는 될 법한 글러터니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고양잇과 맹수와 비슷한 형태의 그 머리에는 이마와 그 위쪽으로 두 쌍의 뿔이 우뚝 솟아 있었고, 목덜미 쪽에는 가느다란 뿔이 갈기처럼 수도 없이 돋아 있었다.
이내 놈이 머리 전체에 비하면 십 분의 일이 채 안 될 것 같은 가느다란 눈을 굴리며, 균열을 포위하고 있는 초인들을 세로로 갈라진 샛노란 동공으로 훑어보았다.
위턱에서 길게 삐져나온 한 쌍의 송곳니가 턱 끝에 닿을 정도로 꽉 맞물린 입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의지는 전장에 있는 모두에게 울려 퍼졌다.
- 호오, 기습을 할 줄 알았는데?
자신의 병단이 모두 죽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아군 하나 없이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담담하기만 한 영파.
그러나.
찌이이이잉.
딱히 마기를 싣지 않았음에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일순간에 전장을 장악했다.
영혼살의 권능.
“큭.”
“듣긴 했는데.”
“기분 더럽군.”
8단계에 오른 이들은 영역의 힘으로, 그렇지 못한 이들은 각자가 가진 초월무구의 힘으로 그 반신의 권능을 버텨 냈다.
- 호오. 신의 무기로 무장한 벌레들이라? 내 부하들이 당할 만하군.
그그그그극.
그리 말하면서 서서히 빠져나오는 놈의 거체.
그에 따라 열두 명의 오러유저와 한 사람의 스피릿 유저 역시 덩달아 격렬한 기세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놈의 몸이 절반 이상 튀어나왔을 때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저놈, 균열의 힘을 끌어내서 보호막으로 삼고 있어요! 다 나오기 전에는 공격하지 마요, 괜히 힘 빠지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진화한 영역의 힘으로 ‘타겟팅’을 시전해 놈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있던 에스티나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첫 계획의 무산을 알렸다.
[……제법 괜찮은 능력을 가진 벌레도 있고.]
쿠쿵.
점차 드러나는 놈의 거체.
머리와 목덜미에 존재하는 뿔이 아니라면 그저 갈색 사자의 몸에 작은 박쥐 날개가 달려 있을 뿐인, 마물치고는 덜 위협적인 형태였지만.
반만 드러난 몸의 길이만 해도 10m는 훌쩍 넘길 것 같은 거체는, 그 크기만으로도 막대한 위압감을 주었다.
물론 그마저도 누군가에게는 아주 익숙한 모습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한 방 먹고 나서 쫄았나 보네? 꼼수도 준비하고.”
그 말 한마디에 글러터니의 눈동자가 타이니에게 고정되었다.
- ……그래, 그때 그놈이로구나. 네놈이 운명의 변수겠지?
“그래. 네놈의 골통을 부수어 줄 분 되시겠다. 쓸데없이 떠들지 말고 빨리 튀어나오시지? 쫄았냐?”
쿠궁.
그 말이 신경을 거슬렀는지, 글러터니의 앞발이 밟고 선 자리가 움푹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천천히 빠져나오던 놈이 한순간에 그 뒷다리까지 차원 균열 밖으로 드러냈다.
흠칫한 초인들이 반 박자 늦게 뛰어나가려는 순간.
쿠우우우우웅.
우르르르르릉.
“캬오오오오오오!”
글러터니의 표효와 함께 막대한 마기가 퍼져 나가며, 달려들려던 초인들을 짓눌렀다.
영혼살과는 다른, 피식자를 압박하고 억누르는 권능. 피어(Fear).
동시에 놈의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 서로 죽여라.
소름 끼치는 영파와 함께, 타이니의 시야에 비치는 동료들의 모습이 갑자기 마물처럼 변했다.
“키륵!”
“키르르륵!”
“크와와!”
실감 나는 살기와 짙은 마기까지 느껴지니, 곁에 있던 동료들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습격할 것 같았다.
환상시(幻像視). 전생에 타이니와 동료들을 가장 혼란스럽게 했던 놈의 권능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흥!”
환상 따위!
타이니는 콧김 하나로 글러터니의 권능 중 하나를 뿌리쳐 냈다. 그리고 사라진 환상 너머,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던 글러터니의 앞발을 녹턴으로 후려쳤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콰콰콰콰콰콰콰콰콰.
마수왕의 앞발이 녹턴과 부딪치는 순간, 노을빛 오러와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거센 충격파를 일으켰다.
우르르르르릉.
쿵. 쿵. 쿵.
땅이 뒤집히는 듯한 진동 속에서 글러터니의 거체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는데.
적과의 체급 차이를 무시하는 것처럼, 월랑을 탄 타이니는 그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단순히 그가 크레이터의 경사면 위쪽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차이.
‘역시…….’
타이니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질 때.
- 역시 운명의 변수. 하지만 네놈 하나로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분노한 글러터니의 영파가 퍼지던 순간.
사방에 흩날리는 흙먼지 속에서 정확히 열한 명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크르!?”
처음으로 영파가 아닌 육성으로 터져 나오는 글러터니의 음성은 그 당혹감을 고스란히 반영했고.
- 감히!!
반 박자 늦게 터져 나온 영파와 함께, 놈이 전신의 털을 곤두세우더니 곧 사방으로 쏘아 냈다.
푸슉.
파아아아아아아앙.
쏘아져 나온 털들에는 이글거리는 암흑 오러와 주변을 현혹하는 환상의 마력이 가닥마다 담겨 있었다.
털들이 놈의 몸뚱이에 붙어 있을 때야 작은 가시처럼 보였지만, 인간의 시선에선 가느다란 장창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쏟아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면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
열두 명의 초인들은, 각자가 준비한 방법대로 그 쏟아지는 장창들을 막아 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이것 역시 타이니가 말한 대로.’
조금 떨어진 하늘 위.
어느새 카일룸을 소환해 전장의 상공에 떠 있던 에스티나는, 자신을 향해 쏘아진 몇 가닥의 암흑 오러를 바람의 오러를 동원해 가볍게 막아 냈다.
그리고 거대한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그 안에 자욱한 흙먼지 속 가장 큰 거체를 향해 아르쿠스(Arcus)를 겨누었다.
동시에.
- 끼루루루루루!
카일룸의 거대한 몸이 그대로 그녀의 전신에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우드드드득.
에스티나의 육체가 전체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그 등 뒤에서 새하얀 날개가 솟구쳐 올랐다.
정령 합신, 카일룸.
가뜩이나 급소 부위만 보호하던 엘븐나이트 전용 갑옷이 커진 몸을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이 모습이 다른 인류, 특히 남성들에게 어떻게 어필되는지 알기에 가능한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 처음 한 방으로, 할 수 있는 전력을 다해서.
타이니가 요구한 최선의 일격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들은 대로, 이제는 익숙해진 패턴을 따라 마나를 끌어 올렸다.
‘아니, 나는 직접 봤으니까 본 대로라고 해야 할까?’
에스티나의 입가에 심각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어린 것도 잠시.
엘븐나이트 비전의 마력회로, ‘대자연의 힘’이 근처에 다가온 막대한 마기에 반발하듯 강하게 맥동하며, 평소보다 50% 이상 강력한 마나를 그녀의 활에 공급했다.
엘븐나이트의 수장, 세계수의 수호자를 위해 신화시대부터 대대로 전승되어 온 초월무구, 아르쿠스에.
우우우웅.
이내 그 활시위에는 진녹색 오러의 화살이 은빛 바람을 싣고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간다.’
시위를 당긴 그녀의 손 위로, 49개의 오러의 화살이 환영처럼 떠올라 중첩되었다.
우우우우우웅.
아르쿠스의 능력 중 하나, ‘화살 비’. 하루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그 권능이 하나로 합쳐지며,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한껏 당겨진 에르쿠스의 시위를 진동시켰고.
우우우웅.
에르쿠스에 상시 적용되는 부가 특성인 관통과 폭발 중 폭발의 힘이 거기에 부여되었다.
“어머니 세계수의 이름으로.”
타아아앙!
굉음을 내며 놓아진 시위에서 튕기듯 쏘아진 녹색 화살이 에스티나의 영역, ‘필중’의 유도를 따라 목표를 향해 날아가고.
쉬이이이익.
수호자 비전, ‘증폭의 궁술’이 그 위력을 다시 몇 배로 증폭시켰다.
이전에 그리마 왕국의 상공에서 마주했던 여성 악마 귀족을 한 방에 빈사 상태로 만들었던 일격이 다시 한번 펼쳐진 것이다.
그녀가 단 한 방에 쏟아부을 수 있는 최고의 위력이 담긴 공격이자, 타이니가 그의 기억을 통해 보여 준 미래의 필살기.
- 난 그걸 낙일시(落日矢)라고 불렀어. 무슨 뜻이냐고? 해를 떨어트리는 화살.
- 뭐, 석양의 화살이라는 중의적 뜻도 되고 낭만적…….
그게 뭐야.
- 엥? 너도 좋아했는데?
네가 말하니까 좋은 척한 거겠지.
일격에 모든 힘을 집중한 필살기라니, 내가 누구를 보고 만들었을까.
‘본래 이름은 따로 있어.’
아마 전생의 나라면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그때의 내가 바라보던 이의 이명을 따라서.
그랬기에 그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을 이름.
“……천벌.”
우르르르르릉.
파멸의 힘을 담은 화살이 지상의 목표를 향해 쏘아졌다.
- 반드시 꼬리부터 없애야 해. 그땐 그걸 몰라서 우리가…….
바로 저 글러터니의 거대한 육체 뒤편에 얌전히 늘어져 있는, 별 특징도 없어 보이는 마수왕의 꼬리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