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글러터니 (1)
제일 먼저 차원 균열 앞에 떨어져 내린 이는, 그들 중 가장 초라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남루한 로브를 걸친 채 너저분한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백발의 마도사.
하지만 사실 그는 현 대륙에서 유일한 8서클 대마도사로 알려져 있는 현자의 마탑주, 솔레인이었다.
대륙 마법의 종주인 현자의 마탑주라는 이유만으로 젊었을 적 이명은 자연스럽게 잊힌 자.
그가 전장에 내려서자마자 탄식을 토해 냈다.
“이럴 수가…….”
노쇠한 음성의 주인이 직시하는 것은 차원 균열 앞, 그 비스듬하게 파인 거대한 크레이터 앞에서 땅에 검을 꽂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거대한 차원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대부분 막아 내고 있는 마법이 바로 그 청년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솔레인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8서클의 마법? 저 나이에?’
누군지는 안다.
신전에서 내세운 용사.
하지만 저 어린 모습으로 펼쳐 낸 마법은 자신이 지나온 세월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내.
‘……아니, 아니군. 겉모습만 젊어 보일 뿐이야.’
수명이 다해 가는 대마도사 솔레인은 용사의 주변 마나의 흐름만 보고서도 단숨에 그의 비밀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너무 묘한 느낌에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끊어 냈다.
‘지금은 아군의 비밀이나 캐고 있을 때가 아니거늘.’
클클.
귀천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이놈의 호기심은 당최 줄어들 줄 모른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생이 다하기 전에 이런 위기가 도래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면 그뿐.
“……안 그런가, 아프만?”
자신의 옆에 내려선 가장 가까운 후배한테 동의를 구해 보지만.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리둥절한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아, 아닐세. 내가 또 혼자 생각하고 물어본 모양이야.”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새삼 느껴지는 아쉬움에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언제나 그렇듯 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한숨을 쉰 그가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자, 말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니.”
쿵.
지팡이 끝에서 퍼진 마나의 파동이 차원 균열이 있는 수백 미터 아래의 공간까지 뻗어 나가 빼곡한 마나의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흐르는 마기 위에 그대로 덮어씌우듯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 낸 것.
그러자 그 곁에 있던 아프만과 록펠러도 아티팩트 지팡이를 꺼내 들며 솔레인의 마법에 힘을 보탰다.
번쩍.
우우우우우웅.
삼각형으로 대형을 만들고 선 그들을 중심으로 마법진이 확대되며 입체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할 때.
“……탑주님, 저 균열을 닫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마법진의 규모와 근처의 마기를 얼추 계산해 본 지진의 마도사 록펠러가, 평소의 푸근한 얼굴을 버리고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내 목숨을 바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는 게 좋겠지.”
“예?”
“오! 오는군.”
솔레인은 록펠러의 반문에 답하는 대신 마나를 움직여 진형을 변형했다.
이미 형성된 마법진의 중심에, 그 축이 될 공간 하나를 더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백발을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온 붉은 눈의 마도사가 바로 자리했다.
“늦었습니다!”
“늦었으면 힘 좀 더 쓰게.”
“예.”
우우웅.
아스란 황실 마탑주,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의 합류와 동시에 마법진이 더욱 크게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우우우웅.
대마도사 마력 동조.
대마법진 전개.
악마 멸살진(Demon Extinction Hexagram).
우르르르르릉.
강대한 마나가 마기가 가득한 공간 한가운데서 퍼져 나가고.
번쩍!!
거대한 차원 균열 주변으로 푸른빛이 솟구치더니, 균열로 스며들던 마기를 마치 마나로 씻어 내듯이 없애 나가기 시작했다.
스아아아아아아아.
그 장엄한 광경을 보면서도 솔레인의 표정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시간을 늦출 뿐이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겠지.”
그 말에 직전에 물음을 던졌던 록펠러가 다시금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솔레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부언했다.
“이미 세상에 발을 디딘 칠죄종이다. 그의 인과가 이 세상에 닿았으니, 섣불리 차원 균열을 닫았다가는 폭식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강림하는 수가 있다. 그것이 최악이야.”
솔레인의 시선이 그 칠죄종을 다시 한번 마계로 밀어 낸 검은 머리 영웅을 한번 스치더니, 이내 8서클급 마법으로 마기의 흐름을 흐트러트리고 있는 용사에게로 향했다.
저들이 그걸 몰라서 마기만 막고 있겠냐는 제스처였다.
한편 아프만은,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눈에 들어온 그 광경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저, 저거! 아르곤한테 마기를 주입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군. 거기다 마나로 변환? 호오? 저건 좀 신기하구먼.”
그 순간, 그 당사자가 그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기, 록펠러 영감님! 마법진 유지는 한 명만 있어도 되잖아요! 돌아가서 연합군 후퇴시켜요!!!”
“여, 영감?”
그 황당한 호칭에 마도사들이 일순 멍해졌다.
“록, 자네 저 타이니 경과 친분이 있었나?”
“그럴 리가요.”
“저 친구가 미래에서 왔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긴 합니다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황망한 얼굴의 마도사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다가 다시 타이니를 바라보는 순간.
“에이씨, 말 안 듣네. 지금도 버거운데…….”
투덜거린 타이니가 후읍, 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이내.
- 검제 영감님!!! 연합군 후퇴시켜요!!! 적어도 지평선 너머까지!!!
찌이이이이이잉!
전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을 내질렀다.
“억!”
가까이에 있던 마도사들이 혼비백산해서 마나로 귀를 틀어막자.
- 글러터니가 강림하는 순간 눈에 띄면 다 죽는다고!!!!
- 지연시키는 동안 후퇴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그 호칭이야 연합군의 사령관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사실상 연합군 전체에게 전하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저, 저, 미친…….”
여전히 전투 중인 연합군의 군세가 혼란에 빠져들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듯한 고함.
그런데 곧이어.
- 알고 있다, 이놈아!!!
대군의 중심에서 그에 응답하는 고함이 들려오더니, 잠시간 소란스러워졌던 대군이 금세 진형을 바로잡았다.
그러고는 아직 처리하지 않은 마물들을 내버려 둔 채 서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남은 마물들은 어쩌려고? 분명히 후환이 될 텐데…….”
록펠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리 말했지만, 솔레인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칠죄종의 능력이 문헌에 적힌 대로라면 광휘의 기사 말대로 하는 것이 맞아.”
대마도사의 심유한 눈이 타이니를 응시하는 가운데, 그 옆에 선 차가운 인상의 마도사가 바로 말을 보탰다.
“영혼살의 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건 전설에나 나오는…….”
“지금 우리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 같은가?”
“아…….”
록펠러의 시선이 다시금 고함을 지른 이에게 향하는데.
그 당사자는 신경질적으로 피를 토해 내며 주변의 마기를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에 가득한 마기를 흡수해서 자신의 힘을 회복하고, 눈을 감고 있는 루나에게 흘러드는 마기의 양을 조절하면서 아르곤에게는 마기 변환법을 강제로 주입하고 있는 상황.
마도사들은 그 자세한 사정이야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저 강력한 기사가 그 근방 수십 미터를 장악한 기운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대단한 젊은이 같긴 합니다.”
얼마나 스스로에게 확신이 있는 것인지 그 행동에 거침이 없는 데다 그 가진바 힘이 워낙 강하니.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따라 주변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갈 듯 움직이는 것조차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저희 황제 폐하께서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계시죠.”
티네스가 웃으며 그런 타이니를 칭찬하는데.
잠깐 피를 토해 낸 타이니가 다시 그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웃고 있어요!? 그 마법진 유지하는 건 가운데 영감님만 있어도 될 것 같은데!! 다른 영감님들은 새로운 방법 좀 강구해 봐요!! 적어도 며칠은 벌어야 한다고!”
“또, 또 영…….”
“버릇은 좀 없지만요. 하, 하.”
헛기침을 하며 동시에 타이니를 외면하는 마도사들이었지만, 이내 다시금 차원 균열을 보며 생각에 잠겨 갔다.
-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방법.
그가 요구한 것을 찾아내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집중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연합군의 진영이 서서히 후퇴해 감에 따라 마물들이 구심점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가던 무렵.
연합군 후방에 있던 수많은 마법사와 사제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 * *
사흘 뒤.
온갖 마법적, 성법적 조치가 덧칠된 차원 균열은 사흘 전에 비해 그다지 그 규모가 커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 이제 오러유저만 남겨 놓고 모두 후퇴한다.”
그 작업을 진두지휘하던 대마도사 솔레인은 모여든 모든 인력들에게 후퇴를 명했다.
“저, 탑주님. 그 칠죄종이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겁니까?”
“왜? 궁금하더냐?”
“눈만 마주쳐도 죽는다는 말이 있던데, 너무 과장된 게 아닌가 싶어서…….”
마법진 형성을 돕던 마탑의 젊은 제자가 그렇게 묻자, 타이니가 불쑥 끼어들었다.
“사실이다. 그리고 영혼살을 버텨 내는 이들은 글러터니가 오히려 먹을 만한 것이라며 입맛을 다시지. 알았으면 얼른 꺼져.”
그에 젊은 마법사가 불편한 얼굴이 되어 주춤거리는데.
“그의 말이 맞아. 전부 후퇴하도록.”
솔레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탑의 마법사들과 신전의 사제들이 차원 균열 앞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앙!
마법사들은 서로 연계 마법을 발동해 가며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두두두두두.
사제들은 성력으로 축복받은 성기사들의 말에 몸을 싣고 완만한 크레이터의 벽을 올라 후방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남는다.”
쿵.
오러유저가 아님에도 그 자리를 지키는 이는 웨어비스트의 왕실 제사장, 우란 누드뿐이었다.
타이니로선 초월무구 하나 없는 그가 걱정되긴 했지만.
- 우란은 영혼살에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있으니.
고대 정령 펜릴의 보장이 있다면 믿을 수 있었다.
우란 누드와 펜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타이니.
“자! 다시 검토해 보자고! 글러터니 전투법. 숙지했지!?”
그가 큰 소리로 동료들을 끌어모았다.
“경험담처럼 얘기하는데, 자네 정말 미래에서 온 건가?”
그런데 정작 마법사들이 후퇴할 때 가장 먼저 움직였어야 할 노마법사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타이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씁. 그거 수뇌부에는 다 퍼졌다던데, 아닙니까?”
“나도 듣긴 했지만, 다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하지만 눈빛을 보니 정말인 거 같은데…….”
“믿고 싶으면 믿으시고, 아님 마십쇼. 지금 그런 걸로 언쟁할 때가 아니니까요. 빨리 가시라니까요?”
솔레인이 어찌 반응하는지는 관심 없다는 듯, 타이니의 눈동자는 온갖 마법과 신성력으로 떡칠을 했음에도 조금씩 커지고 있는 차원 균열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조치도 이제 곧 한계입니다. 영감님도 떠나십쇼.”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아쉽구먼. 내가 몇 년만 젊었어도 이 역사적인 전장에 함께하는 건데 말이야.”
“흰소리 마시고 보중이나 잘하십쇼. 대마도사는 귀한 인재입니다. 괜히 개죽음당하면 안 되죠.”
“오, 이 늙은이를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는 건가?”
솔레인이 느물거리며 웃어 보이는데.
“영감님, 얼마 안 남았죠?”
훅 들어온 한마디가 그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정말 시간 회귀자가 맞는가 보군. 그렇네. 내가 언제쯤 죽는지도 아나?”
“회귀자라서 아는 게 아닙니다. 지금 영감님 상태 보고 아는 거지.”
“호?”
상태를 보고 알았다?
믿기 힘든 말이지만,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눈앞의 젊은이가 신화에나 나올 법한 오러마스터를 연상시키는 괴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 감각을 가졌다니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활동할 때쯤에는 당신은 아예 없었습니다. 하지만 록펠러 영감님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이 있었다면, 마도사들이 악마 귀족들에게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거라고.”
계속해서 이어진 그의 말이 솔레인을 솔깃하게, 또 의문스럽게 만들었다.
“호오. 록, 저 친구가? 아니, 그러고 보니 아프만은?”
“벤투스, 그러니까 그 날개 달린 검은 사자한테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벤투스와 네불라, 티그리스가 함께 현자의 마탑을 습격했었거든요.”
“그렇다면 록도…….”
“그때 록펠러 저 영감은 땅굴을 파고 숨어서 살아남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말세의 끝까지 부끄럽다면서 땅속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지요.”
“허…….”
“뭐, 그때보단 상황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
솔레인이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타이니가 그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지금 인류가 유리한 이유 중 하나가 당신의 존재일 테니, 무리하지 마시고 물러나세요. 그리고 다음 강림이나 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음? 자네, 칠죄종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글러터니 하나 잡자고 돌아온 거 아닙니다. 그놈은 그냥 시작일 뿐이죠.”
타이니의 자신감 넘치는 살벌한 미소가 차원 균열을 향하는 순간.
우우우우우우웅.
파지지지지직.
그 균열을 중심으로 기껏 구축해 낸 마법진과 성력진에 갑자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것도 예상보다 빨라?!”
남겨진 초인들의 안색이 일시에 확 변하고, 타이니는 솔레인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가십쇼!”
“쯧, 보중하게나.”
솔레인의 몸이 푸른 마나에 휘감겨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콰직.
차원 균열 밖으로, 거대한 검은 발톱 하나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