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봉인
5일 전.
갑작스레 나타나 적진의 중심으로 튀어 나가던 광휘의 기사.
그 모습은 크롬벨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끔찍했던 고대의 기억과 놀랍도록 비슷한 장면이었으니까.
- 안 돼!!
자연스럽게 고함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고대에 솜누스가 튀어 나가는 걸 봤을 때도, 처음에는 그가 인류의 영웅으로서 적진으로 용감하게 돌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솜누스는 자신이 가진 운명의 파편을 고대의 폭식, 그 세 머리 용을 통해 마왕에게 넘겼고.
파편의 힘으로 섭리를 무시하고 잠시 세상에 강림한 마왕은, 당시 가장 강대했던 통합 제국에서 수천만 백성의 영혼을 ‘수확’하여 솜누스에게 영생의 힘을 부여했다.
마왕에게는 중간계의 저력을 박살 내고 반신급 전력을 하나 추가하는, 그야말로 득 될 것밖에 없는 거래였고, 인류에게는 사상 최악의 재앙이었던 사건.
그 사건이 다시 벌어지게 둘 수 없었다.
-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정령을 타고 질주하는 타이니의 속도는 너무 빨랐고, 자신은 그에게서 너무 먼 곳에 있었다.
- 빌어먹을! 또……
좌절하던 그때, 강림의 문을 중심으로 노을빛 파멸의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자신이 쿼드러플 8클래스의 전력을 간직하고 있을 때도 넘보지 못했던 절대적 파괴력을 가진 그 일격은, 마수병단의 악마급 마수 대부분을 단번에 지워 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차원문 밖으로 살짝 존재를 드러냈던 현대의 폭식 역시 꽤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 어떻게 저런…….
그것은 솜누스의 전철을 밟을 거라 걱정했던, 아니 확신했던 ‘현대의 용사’에 대한 의심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눈앞에 드러난 결과를 보면서도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자 생각이 다른 곳으로 뻗었다.
‘생각해 보면 운명의 파편도 흔적이 안 보였지.’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그 사실을 눈치챘을 때부터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줄곧 의심만 했다.
‘내가 왜…….’
부활한 후부터 자신의 성정이 급해지고 잔인해진 것 같다는 자각은 이전에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통렬하게, 아프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에 의심은 부서지고, 확신했던 자아는 흔들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계속 생각나는 것은 하나였다.
‘엄청난 일격이었어.’
신화의 흔적마저도 사라진 시대.
용의 축복도, 사도의 축복도 받지 못한 인간이 상상 이상의 힘으로 마족들을 압도하는 광경.
그것은 의심과 함께 자신의 상식마저 깨부수기에 충분했으니까.
자연스레.
- 미래의 일은 미래의 용사에게 맡기세요, 크롬벨.
검은 머리 성녀가 했던 말이 떠오르며, 스스로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광휘의 기사를 의심하지 않고 왕국 연합의 세력을 집결시키는 데 협조했다면, 인류의 희생도 훨씬 적었을 텐데.
괜히 자신이 운명을 거슬러서 안 좋은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자책 하나에 무너지기에는 크롬벨의 정신은 너무 견고했고, 그는 금세 새로운 답을 찾았다.
‘성격이 조금 변했다 한들, 전투에선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야.’
과거의 그는 우유부단하고 순하기만 했던 탓에 여러 번의 기회를 놓쳤고, 결국 마왕을 밀어 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으니까.
운명을 거스른 부작용이 이것뿐이라면 오히려 기꺼울 뿐이다.
‘변한 성격마저 이용하면 된다.’
그렇게 다짐했다.
거기다.
- 마족은 다 때려죽여야 할 적. 그는 분명히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적어도 그 말에는 거짓이 없었습니다.
흔들리는 그를 위해, 고결한 속죄자가 굳이 영성을 낭비하면서까지 또 한 번 확인해 주었다.
진실의 신언. 회피할 방법도 많고 소모되는 대가만 큰 그 비효율적인 방법을 써 가면서 말이다.
그 때문에 속죄의 길이 10년은 길어졌을 터인데, 왜 그랬냐고 물으니 대답이 참으로 간결했다.
- 당장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여신의 적이 본격적으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자신의 영혼, 그 죄의 길을 더해 가면서까지 여신의 뜻을 좇는 자.
그의 모습에 크롬벨은 다시 한번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연 여신의 뜻을 좇았는가, 아니면 그저 자만하고 질투했던 것인가.’
답은 쉽게 나왔고, 결론은 자연스레 이어졌다.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 이제부터 하나만 생각한다.
- 과거에 이루지 못한 과업, 마왕을 소멸시키는 일만.
그리고 그렇게 결심하자마자 또다시 전투가 벌어졌고, ‘현대의 용사’가 다시 한번 그 엄청난 무력을 보여 주었다.
5일 전의 그 일격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가늠조차 되지 않는 엄청난 일격으로 마수병단의 남은 정예를 쓸어 버린 것이다.
의심의 콩깍지를 벗고 보니, 아무리 회귀자라 해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축복도 받지 못한 인간이 저런 괴물 같은 힘을 보이다니,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온 걸까.’
신화가 사라진 이 시대에, 아마 그는 고대의 천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고.
‘모르스라고 했던가? 귀족 출신이라고 했었지.’
잘은 모르지만, 어려서부터 이 시대의 명가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을 것이다.
그런 이가 생을 두 번째 살고 있는 거라면, 저 무력도 어찌어찌 납득이 될 것 같았다.
그런 이라면 자신과 더불어 마왕을 물리칠 파트너가 될 수 있을 테니 좋은 일이다.
‘그래, 좋은 일이야…….’
크롬벨은 가슴속 서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불쾌한 감정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그것은 눈앞의 이 거대한 차원 균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 때문일 테니까.
일단.
“……이 상황부터 해결해야지.”
우우우우웅.
수백 미터 깊이의 완만한 절벽이나 다름없는 크레이터 안에 열린 거대한 차원 균열과, 그 안으로 스며드는 마물들의 피와 마기.
그것을 본 크롬벨이 성검 포이나를 뽑아 들었다.
우우우웅.
그러자 그의 전신에서 쏟아진 푸르른 빛이 성검에 모여 찬란한 성광으로 변했다.
‘대마법 전개.’
현세에 강림한 마족들의 피가 다시 마계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다.
세부 조건 설정. 인식된 마물 종류 127종. 렙톤, 크리온, 타르난, 이헤스…….
타겟팅 씰, 데몬 블러드(Tageting Seal, Demon blood).
번쩍.
성검에서 쏘아진 성광이 차원 균열을 뒤덮으며 새하얀 빛을 뿌렸다.
그리고 이내.
우우우웅.
성광이 균열 안으로 흘러 들어가던 마물의 피를 막아서기 시작했다.
크롬벨은 그 상태 그대로 성검을 땅에 꽂았다.
푹.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나의 주…….”
우우우우우.
번쩍.
용사의 기도가 시작되자, 그의 전신에서 빛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고, 차원문으로 흘러가던 마물들의 피와 마기 중 일부가 성검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성검이 마물들의 피와 마기를 마시는 듯한 모습.
그리고 그렇게 흡수한 기운은 그대로 차원 균열을 막아서는 마법을 유지하는 힘으로 쓰였다.
얼핏 봐도 완벽한 효율의 마법과 성법의 연계 활용.
그것은 그 광경을 지켜보던 타이니에게도 깨달음을 주었다.
“아! 하, 씨! 그렇지, 흡수하면 되지!? 내가 왜……!”
“엑!?”
황당한 혼잣말로 아르곤의 고개를 획 돌아가게 만든 타이니가 갑자기 제자리에 주저앉더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차원문과 성검으로 흘러들던 마기 중 일부가 타이니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아르곤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데.
“아! 그럼 나도.”
그 곁에 서 있던 루나마저 주저앉으며 타이니를 따라 마기의 일부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엑!? 미친!”
아르곤으로서는 환장할 노릇.
‘얜 또 뭐야? 미친 건가?’
용사는 말 그대로 용사고, 타이니는 가늠이 안 되는 괴물이다.
하지만 저 여자는 뭔데 타이니를 흉내 낸단 말인가? 자살 시도나 다름없는 짓인데?
아르곤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는데, 이내 더 황당한 일이 그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스아아아아아아.
타이니와 저 보라색 머리 여자가, 몰려드는 마기를 온전히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로, 정말로……?’
게다가 ‘변이’나, ‘중독’의 증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타이니의 ‘영역’이 에너지를 흡수하고 변환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이 되는 광경은 아니었다.
‘어떻게 인간이 마기를……?’
그리고 그제야 아르곤은 타이니에게 강제로 굴려질 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 마나나 마기나, 그 근원은 같아.
미친놈이 또 개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누굴 죽이려고 그러는 건지.
그렇게 속으로 욕하고 넘겼던 말이 눈앞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언뜻 자신이 미쳐서 헛것을 보는 건가 싶기도 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음…….”
용사를 따라 뭔가를 하려던 성령 기사가, 한동안 타이니와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무언가 갈등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러다.
쿵.
“신이시여!”
이내 결심한 듯 무릎을 꿇은 갓 핸드의 전신에서 성광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찬란한 빛줄기가 뻗어 나오더니, 차원문을 가로막은 크롬벨의 대마법에 더해져 마물들의 흐름을 막고 마기를 정화하는 또 하나의 벽을 만들었다.
우우우우웅.
연달아 더해진 변수에 차원문에서 치솟아 오르던 마기가 일순 주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마기가 다시 조금씩 짙어지는 것이 아르곤의 피부로도 느껴졌다.
더구나 그 와중에.
“아르곤, 어디다 정신 빼놓고 있어!? 넋 놓고 뭐 하는 거야!?”
갑자기 눈을 번쩍 뜬 타이니가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정말 마기를 마나처럼 흡수한 것인지, 그새 화색이 좀 도는 듯한 모습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너 때문이다, 새끼야.’
아르곤이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화들짝 놀라는데.
“흡수 못 하겠으면 갓 핸드 경을 도와! 그리고 마도사님들을 불러! 마물들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으니 이젠 괜찮을 거야! 빨리!”
어느새 후방의 상황까지 보고 있었는지, 타이니가 그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아직도 눈앞에서 벌어진 이적이 이해가 안 되긴 했지만, 몇 달간 들들 볶인 아르곤의 몸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고 있었다.
‘젠장, 어떻게든 방법을 연구할 생각은 안 하고 남만 보고 넋을 놓고 있다니! 한심하게.’
이를 악문 그의 검, 마기아가 허공에 다시금 동대륙의 문자를 그려 내고.
[傳聲(전성)]
- 스승님! 차원문을 막거나 소환을 지연시켜야 합니다! 마도사분들은 다 이쪽으로 와 주세요!
그 메시지를 담은 마나의 공이, 그에게 가장 익숙한 마나 패턴을 품고 있는 마도사를 향해 번개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연달아.
[封印(봉인)]
거대한 차원문 앞에 마기의 침습을 막는 마나의 막을 하나 더 만들어 냈다.
그러자.
우우우우웅.
마기가 늘어나는 속도가 확연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럼에도 차원문 안의 마기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으윽. 젠장 이대로는…….”
오래 못 버틴다.
그 말을 뱉어 낼 여력조차 없었다.
마법 ‘봉인’에 필요한 마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그에게 두통을 선사하고 있었으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글러터니인지 뭔지 그냥 소환되게 놔두고, 놈이랑 싸울 힘을 아끼는 게 낫지 않을까.
아르곤의 뇌리에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해질 때.
턱.
“마기도 이용할 수 있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다.”
어느새 걸어 다니면서도 마기를 흡수할 수 있게 된 타이니가 그의 뒤로 다가왔다.
“그게, 말이, 쉽지…….”
아르곤이 이를 악물며 마나를 쏟아 내고 있던 그때.
“뭐든 몸으로 겪으면 쉬워지지.”
타이니가 말도 안 되는 한마디와 함께 아르곤의 등에 손을 갖다 대자, 그의 몸속으로 마기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커억!?”
이 미친놈이?
“날, 죽일 셈……?”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토해 낸 말.
하지만 괴물 새끼는 그 말조차 깔끔하게 씹어 버렸다.
“집중해! 어떻게 마기를 마나로 치환하는지, 몸 안에서 느껴 보라고!”
미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죽기 싫으면 해야 했다.
“이, 이런, 쌍…….”
지난 몇 달간 무수히 시달렸던 개 같은 경험을 마계 대전 한복판에서도 또 겪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더욱 억울한 것은, 지난 몇 달간 그러했듯이.
‘……되네?’
콰콰콰콰콰.
타이니가 억지로 몸 안에 밀어 넣은 패턴을 따라 마나를 움직이다 보니, 정말로 마기가 마나로 치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거봐, 하면 되잖아.”
다만, 그 태연한 목소리에는 새삼 억울한 마음과 분노가 치밀었다.
오러를 터득해야 한다면서 자신을 초월급 마물 3마리의 한가운데에 던져 넣었을 때도 이랬다.
그러다 결국 진짜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오러를 발현하자, 지금이랑 똑같은 말을 했었다.
“이, 이런 씨…….”
자신은 마기를 흡수해서 몸을 회복하는 와중에 말도 하고 걸어 다니기까지 하는 괴물과는 달랐다.
‘다 너 같은 줄 아냐!?’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도 없었다.
여전히 체내에 타격이 쌓이고 있었으니, 자신은 아마 이 작업이 끝날 때쯤에는 내상으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터였다.
신이 있다면 제발 저놈한테 천벌을 내려 줬으면 좋겠다.
‘아니다. 그럼 이 전쟁이 힘들어지니까.’
그냥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이 악마 같은 놈의 마수에서 구해 줬으면 좋겠다.
‘제발 좀!’
그러자 그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을까.
여전히 치열한 후방 전장의 하늘 위에서, 익숙한 로브를 입은 노인네들 몇이 쏜살같이 날아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