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마수병단 (7)
쿵. 쾅. 쿵.
“크와아앙!”
- 벌레들이 분수를 모르고!
거대한 원숭이 거인과 그 애완견 같은 철갑 삼두견이 칠흑 같은 암흑 오러를 온몸에 피워 올리면서 달려오는 광경.
그야말로 신화시대, 신마 대전의 전설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런 괴물들이 제일 먼저 죽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었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겁에 질려 머릿속이 하얘져서 그대로 주저앉았을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괴물들을 향해 돌진하는 다섯 초인의 눈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준비!”
특히 그 가장 앞쪽.
타닥.
육중한 무게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괴물들을 향해 쇄도하는 검제의 눈은, 눈앞의 괴물을 넘어 미래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해.’
왜인지 마수병단의 최정예들이 나타나지 않은 지금, 이 초전에서 완벽한 승기를 잡고 그 최정예들과 마수왕의 강림을 대비해야 했다.
전생에 마수왕은 마수병단이 나타난 지 1년도 더 지난 후에나 강림했었다지만,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이미 지금도 타이니의 전생과는 많이 어긋나 있는 상황이니까.
그러니.
“단숨에 끝장낸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해야 한다.
그 의지를 담은 고함을 내지르던 그때.
갑자기 자신과 저릭의 영역 동조로 만들어 낸 기세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하에서 전해져 오는, 위력이 비슷한 무언가에 의해 상쇄되며 사라지는 듯한 느낌.
“밑!!”
그에 검제가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지르고 방향을 꺾는 순간, 그들이 딛고 있던 땅바닥 전체가 무너지며 거대한 원통형 입이 솟구쳐 올라왔다.
콰콰콰콰콰.
일행을 한입에 삼킬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커다란 입 안에는 칼 같은 이빨이 촘촘하게 돋아 있을 뿐만 아니라 암흑 오러까지 넘실거리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군.’
다행히 미리 그의 경고를 받은 초인들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난 뒤였다.
결국.
히이이이잉!
거대한 자이언트 웜이 삼킨 것은 검제, 제나스, 갓 핸드가 타고 있던 말 세 마리뿐.
“괴물 새끼!”
“이놈부터……!”
흩어진 초인들이 자이언트 웜을 향해 본능적으로 무기를 겨누려던 순간.
- 무시해! 삼두견부터 노린다!
펜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다시 초인들의 행동을 이끌었다.
딱히 합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돌진할 때부터 모두가 저 수호령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생각했던 터.
“칫!”
초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이언트 웜, 베르미스를 우회하여 전면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다시 밑!”
파바바박.
검제의 고함에 따라 다시 한번 흩어지자마자, 지면이 쩌어억 갈라지며 거대한 뿔이 달린 철갑 두더지, 탈파가 튀어나왔다.
“끼에에에에!”
- 감지 능력자가 있다! 내 공격을…….
이마에 달린 거대한 뿔을 맹렬히 회전시키는 두더지 마족의 영파가 울려 퍼졌지만, 초인들은 그마저도 무시하고 전진할 뿐이었다.
- 약해진 놈부터!!
펜릴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모두가 목표를 인식하고 있었다.
사냥의 정석은 약해진 사냥감부터 노리는 것.
여전히 상처 입은 몸으로 코앞까지 돌진해 오고 있는 삼두견, 카니스를 향해 초인들의 살기가 쏟아졌다.
그러자 졸지에 다섯 명의 초인과 한 정령의 사정 범위 안에 든 놈의 질주에 급격히 제동이 걸렸다.
그그그그그극.
“컹”
“컹!”
“컹!”
- 얕보지 말라니까! 멍청이들!
일순간 토해 낸 영파와 더불어 세 머리에서 동시에 쏟아 내는 각기 붉고 하얗고 푸른 세 가지 불꽃.
하지만.
- 멈추지 마!
콰아아아아앙!
펜릴이 고함과 함께 입에서 붉고 거대한 광선을 쏘아 내는 순간, 세 가지 저주를 담은 불꽃은 그 광선에 휩쓸려 그대로 소멸되었다.
“컹!?”
- 무슨!?
‘저게 스피릿유저 수준에서 가능한 건가?’
검제는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가장 먼저 거대 삼두견을 향해 뛰어올랐다.
‘이놈을 확실하게 끝장내려면…….’
철갑 삼두견 카니스의 약점이야 이미 달달 외울 정도로 들었고, 놈이 저릭과 실버팽을 상대로 싸우는 것까지 봤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는 동료들 넷이 더 있다.
그렇다면 최상의 선택은 하나였다.
“합!”
에스가르드식 발렌티아 비기.
위력 봉쇄(Power Lockdown).
우르르르르릉.
새빨간 검신을 자랑하는 가문의 보물이자 초월무구, ‘절대로 꺾이지 않는 검’ 붉은 날개가 검제의 붉은 오러를 3배 증폭시키며 카니스의 암흑 오러를 상쇄하고.
또한 그의 중력 속성을 3배로 증폭시키며 거대 마수의 세 머리를 동시에 내리눌렀다.
“컹!”
- 이런……!
쿵.
브레스가 허망하게 분쇄된 직후에 받은 예상치 못한 공격.
카니스의 머리들이 그대로 땅바닥에 추락하며 동시에 비명을 토해 낼 때.
반 박자 늦게 달려든 저릭, 실버 팽, 갓 핸드의 무기에서 저마다 강렬한 오러가 솟구치며 각기 다른 세 머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러나.
- 어딜!!
어느새 다가온 원숭이 거인의 기둥 같은 다리가 막대한 암흑 오러를 실은 채로 그들이 있던 공간 자체를 터트렸다.
꽈아아아아아앙!
“컥!”
한순간에 튕겨 나가는 세 사람.
하지만 루페스는 그들이 카니스를 끝장내기 위해 휘둘렀던 공격을 왼 다리 하나로 막아 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크롸롸!”
- 이 잡것들이!
분노한 영파가 전장을 진동하고, 피투성이가 된 놈의 왼쪽 발목이 분수 같은 피를 뿜어냈다.
물론 그것으로 카니스의 목숨을 구해 냈으니, 그 대가로는 사소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검제가 속으로 욕설을 토해 내며 이제는 무의미해진, 카니스를 억누르던 위력 봉쇄를 거두려던 순간.
반 박자 늦게, 은발의 젊은 기사가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한 카니스의 머리들 앞으로 쇄도하는 것이 보였다.
‘제나스!?’
찰나의 틈을 노렸다기보다는 아직 실력이 부족하기에 타이밍이 늦었을 뿐이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적들에게는 치명적인 한 수로 작용했다.
“제나스!!”
다행히 제나스 역시 지금 자신이 둘 수 있는 최선의 수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듯했다.
“하!”
제나스의 몸에서 그가 평소 보여 주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은빛의 오러가 솟구쳐 올랐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광경.
타이니조차 감탄했던 그의 재능이, 심각한 오버리바운드를 각오해 가며 한순간 한계를 몇 배 넘어서는 힘을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황실에서 하사받은 초월무구, ‘북극의 바람’을 통해 몇 배로 증폭되어 카니스를 향해 토해졌다.
제나스식 발렌티아 검술, 결전 오의.
서릿바람 광시곡(Frosty Wind Rhapsody).
바람과 냉기의 속성을 담은 은빛의 오러가 카니스의 세 머리를 얼어붙게 만들고.
이내 그 목들에 가느다란, 하지만 치명적인 은빛의 선을 그어 냈다.
쩌저저저정.
“컹!!!!”
- 내가 이렇게, 허무……!?
쿵.
우르르릉.
위력 봉쇄를 풀고 일어나려던 카니스의 몸뚱이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며 분수 같은 검은 피를 쏟아 냈다.
동시에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거대 마수, 아니 고위 마족의 기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광경에 전장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적막이 흐르는 것도 잠시.
“크와아아앙!”
- 카니스!!!
마법진을 유지하는 데모닉 웨폰, 이그니스를 지키던 호랑이 인간 티그리스가 포효와 함께 튀어나오고.
“찌직!”
- 제대로 합공한다.
“크르.”
지저를 지배하는 두 거대 마족이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지운 채 다시 지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와아앙!”
- 감히! 저 벌레 새끼가!!
마치 암흑 오러가 압축된 태양이라도 된 듯, 직전보다 몇 배는 더 무거운 암흑 오러를 뿜어내기 시작한 원숭이 거인이 그대로 그 거대한 몸을 띄우더니.
우우우웅.
멀쩡한 한쪽 다리를 힘이 다해 쓰러진 제나스 위로 내리찍었다.
꽈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르릉.
한순간에 지반을 붕괴시키는 거인의 일격.
그러나.
“죄, 죄송, 여력을 남겼어야…….”
“아니, 잘했다!”
그 목표가 된 제나스는 이미 타격 지점을 이탈한 뒤였다.
속도는 빨랐지만 덩치 탓에 그 예비 동작이 너무 컸다.
그 덕에 검제는 그 움직임을 감지해 재빨리 뛰어들 수 있었고, 제자이자 부관의 뒷덜미를 잡은 채 그 자리를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넌 네 몫을 이미 다했어!”
쿨럭.
공격을 당한 것도 아닌데, 그저 자신이 쏟아 낸 일격의 후유증만으로 피를 토하는 제나스.
그런 그를 누가 원망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 차례다.
“갓 핸드 경! 회복을!”
이미 자기 몫을 다한 제자를 다가오는 성기사에게 집어 던지며, 검제는 그대로 돌진해 오는 호랑이 인간 형태의 마족을 맞이했다.
자신보다 덩치가 두 배 이상 큰 데다, 그보다 거대한 도끼 창에 이글거리는 암흑 오러를 두른 채 휘둘러 오는 적.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꽈아아아아앙!
“큭!”
주르륵 밀려나기는 했지만, 충분히 위력을 상쇄했다.
“크르르.”
- 막아!?
분노한 호랑이 마족의 포효가 더해질 때.
“크와아앙!”
- 여유 부리지 마라, 티그리스!
다시금 서슴없이 거체를 날리며 일행 전체를 휩쓸어 오는 원숭이 거인.
그 전신에 이글거리는 암흑 오러는 놈이 정말로 전력을 끌어 올리고 있음을 의미했다.
자연히.
콰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르릉.
인근 지반을 통째로 가라앉혀 크레이터를 만들 정도로 위력도 강력했지만.
푸화학!
- 이게!
- 바보 같은 놈!
그 일격은 초인들의 밑에서 솟구치려던 탈파와 베르미스의 공격과 엇박자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악마 후작급 마족들이 작정하고 퍼붓는 공세는 충분히 강렬한 충격파를 전장 전체에 선사했다.
물론.
- 어림없다!
콰콰콰콰콰.
그것들은 검은 늑대 펜릴이 그대로 상쇄했다.
- 저 꼬마 빨리 회복시켜라! 속죄자!!
속죄자라는 단어에 갓 핸드가 순간 움찔했지만, 그는 해야 할 일은 잊지 않았다.
우우우웅.
그의 손길에 빠르게 편안한 안색으로 돌아오는 제나스.
물론 회복되었다 한들 직전과 같은 일격을 다시 선보이지는 못하겠지만, 충분한 보조 전력은 될 터였다.
그리고 그사이.
“크와아앙!”
- 이 벌레들이!
- 비켜라, 티그리스!
몰아치는 마족들의 공세를, 검제와 저릭, 실버 팽과 펜릴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 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확실히 밀리는 모양새였지만, 그 와중에도 검제는 속으로 승산을 점쳐 보고 있었다.
‘이놈들, 괜히 흩어져 있었던 게 아닌 거 같은데?’
타이니의 전생에는 글러터니가 강림하기 앞서 대륙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위해 각지에 흩어졌었다는 마수병단의 일곱 장군.
만약 그들이 함께 있었다면 글러터니를 치러 가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다른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이놈들, 합이 안 맞아.’
특히 거대 마수들의 몸이 상대적으로 훨씬 작은 자신들을 동시에 노리면서 서로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 또!?
- 멍청한!
- 비키라고!
영역의 동조가 가능한 것과는 별개로, 이 녀석들 모두가 함께 싸워 본 경험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특히나 거대 마수들끼리는.
반면에 이쪽은.
- 때릴 곳 많은 원숭이부터 노리자. 틈은 내가 만든다.
대체 무슨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지 짐작도 안 가는 고대의 정령이 지시를 내리고 있고, 어설프게나마 자신과 손발을 맞춰 본 이들이 넷이나 있다.
‘갓 핸드도 방해는 안 되겠지.’
확실히 가능성이 있다.
검제의 눈이 빛나는 순간.
- 끼에에에에엑!
서북쪽 하늘에서 요란한 비명이 들리며 마족 하나의 거대한 마기와 그 존재감이 급격히 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크와아앙!”
- 네불라!!
- 이럴 수가!
- 벌써 둘이나!?
다른 폭식의 장군들이 경악하는 사이.
- 치명적인 독침을 가진 적이, 하나가 아닌 둘. 조심…….
검은 안개 새, 네불라의 유언 같은 영파가 한발 늦게 장군들의 뒤쪽에 울려 퍼지며 전장을 한순간 소강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 끼에에에엑!
날카로운, 하지만 반가운 울음소리와 함께 초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독수리가 날아들었고.
“늦었어요! 다들 무사해요?”
이내 상공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할 때.
“영감님. 타이니는?”
어느새 자신의 그림자에서 불쑥 솟아오른 보랏빛 머리의 여인을 본 검제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크르르.”
- 하찮은 벌레들이…….
“찌직.”
- 하찮지 않다, 루페스. 언제까지 방심할 테냐.
“크왕!”
- 모두 제대로 간다. 루페스, 네놈이 가장 뒤다.
“크웩.”
- 맞아. 네놈이 먼저 날뛰면 저 작은 것들을 잡기 힘들어진다.
“크르르.”
- 차리라 힘이 줄어들더라도 덩치를 줄여라, 루페스. 어차피 지금은 이그니스를 사용할 것도 아니지 않나.
티그리스의 말에 표정을 잔뜩 일그러트린 것도 잠시, 루페스의 덩치가 갑자기 작아지기 시작했다.
30m에 달하던 덩치가 거짓말처럼 스르륵 줄어들어 거의 7, 8m 수준의 작은(?) 거인으로 변했고, 그 기세 역시 덩치만큼 줄어들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네 장군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그런데 그 순간.
“크와아아아앙!”
- ……이 완성됐다. 모두 모여라.
어느샌가 거대한 철봉, 이그니스 위에 올라선 검은 사자가 그들의 각오를 무색하게 만드는 영파를 토해 냈다.
그에 마족들의 표정이 확 달라지고.
‘설마 용사가 당한……?!’
초인들의 시선이 한순간 검은 사자가 있던 전장으로 쏠릴 때.
- 지금부터가 진정한 강림의 시작이다, 인간들아.
계속해서 커져 가던 강림의 문이 성장을 멈추고 시꺼먼 마기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