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마수병단 (6)
- 놀랍군. 그 녹색이 아니라 네놈이 운명의 변수였나?
“흥.”
감탄하는 듯한 검은 사자, 벤투스의 말에 크롬벨은 코웃음으로 응답했다.
갑작스러운 소강상태에도 상대를 노려보는 사나운 눈빛.
그들의 날카로운 발톱과 검은 서로 한 치의 틈이라도 보이면 그대로 상대방을 꿰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소강상태는 도무지 결착이 나지 않는 싸움에서 상대의 허점을 찾기 위한 시간으로, 서로의 암묵적 동의하에 성립된 것이었다.
속도를 중시하는 둘의 전투 스타일이 지나치게 유사한 탓에 도무지 유효타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 꽈아아아아아앙!
폭식의 장군들과 연합군의 초인들이 본격적인 충돌을 시작할 때도, 그들은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크르르.”
- 한낱 인간이 나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다니.
“한낱 마물이 나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다는 게 놀라운 거겠지.”
크롬벨의 말은 가감 없는 진심이었다.
마족이 동급의 인간보다 월등히 강한 것은 근본적인 육체 성능의 차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족의 육체가 인간에 비해 월등히 강하다 한들 사도의 축복에 용의 축복까지 받은 자신은 웬만한 마족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고작(?) 악마급 마족 주제에 성검 포이나의 봉인을 7할까지 푼 자신과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로드(Lord), 아니 이 시대 기준으로 오러익시더급에 7서클. 게다가 대사제급 신성력에 이제는 5단계의 정령술까지 얻은 자신인데 말이다.
하지만 상대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크르르.”
- 미물 주제에 가당찮은 자부심이지만, 이유는 알겠다. 여신의 힘에, 역겨운 마나, 거기에 옅지만 정령의 향기까지……. 마치 그 옛날에 위대한 분을 막아섰다는 중간계의 악적을 떠올리게 하는 능력이라…….
벤투스의 사나운 울음소리와 함께 영파가 계속 이어졌다.
“킁.”
- 네놈 역시 여신의 사도인가?
“과분한 은혜를 받고 있지.”
- 역시 배덕한 여신의 종이로구나.
“더러운 마족 주제에 배덕이라…….”
보기보다 수다스럽게 이어진 그 영파는 크롬벨도 완전히 무시로 일관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그 느낌은 묘한 기시감과 함께 약간의 자부심을 챙겨 주었으니까.
하지만.
“킁.”
- 물론 너무나도 부족하긴 하지만 말이다. 특히나 그 정령은 내게 내보일 수도 없는 수준이 아닌가. 크흐흐.
이어진 말에는 자연히 안색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에 부활한 이후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사건.
‘펜리르.’
이미 정령의 죽음을 선택한 줄로만 알았던, 과거 자신의 정령.
그리고 끝내 자신이 아닌 다른 수인족과 함께하고 있는 옛 동지.
묻고 싶은 게 많았음에도 자신과 만나 주지도 않았던, 짐승 신의 첫 번째 발톱.
그가 있었다면 남부 산맥에서 구한 어설픈 정령과 계약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힘의 회복도 더욱 빨랐을 터였다.
그리고 거기에 생각이 닿는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런……!’
하지만 어느새 히죽 웃고 있는 검은 사자의 얼굴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뻐어어어어억!
콰아아아앙!
강렬하게 엄습하는 통증과 함께 튕겨 나간 몸이 그대로 땅을 폭파시키듯 파고들자 짜릿한 고통이 더해졌다.
그리고.
푸우우욱.
“커, 커흑.”
- 고작 이런 수에 걸리다니. 흐흐흐. 어이가 없구나.
비웃는 영파와 함께 어느새 다시 다가온 검은 사자의 발톱이 명치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쿨럭.”
그 발톱은 단순히 외상을 입히는 데에 그치지 않고 파괴적인 암흑 오러와 중첩된 저주를 가해, 크롬벨의 보조‧방어 마법과 신성력을 뚫고 순식간에 그 몸을 파괴해 갔다.
그리고.
“크와아아앙!”
- 재미있었다, 인간. 이대로 죽어라.
그렇게 그의 정신이 아득해지려던 그 순간.
- 운명의 변수도 별거 없구나. 아니면 네놈도 아닌 건가……?
그 마지막 영파가 멀어질 뻔한 의식을 확 붙잡게 했다.
‘운명의 변수, 내가 그놈보다 못하다? 그럴 리가!’
어이없게 당한 치명상이었지만, 과거에는 이보다 더한 경우도 겪어 봤다.
고대에 완수하지 못한 과업을 다시 시작해 보기도 전에 쓰러질 수는 없었다.
“웃기지…… 마라!”
그 의지가 일어나는 순간 다시금 신성력이 솟구치려는데.
그 순간.
‘응?’
우우웅.
이 시대에는 잊혀진 용의 축복이 갑자기 발동했다.
생물로서 신화에까지 닿은 전설의 존재, 용이 남겨 준 ‘진화의 힘’.
그러나 이상했다.
‘내 잠재력은 이미 모두 개화했을 텐데?’
하지만 당사자의 의문과는 상관없이 치명적인 위기 속에서, 용의 축복은 자연히 발동되었다. 고대에 크롬벨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현재의 육체’가 가진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바로 2천 년의 세월 동안 가사 상태를 유지하던 그가 부활할 수 있었던 이유, 이미 그의 몸에 깊숙이 뿌리내린 흑마법의 흔적이 말이다.
우우우우웅.
쿠쿠쿠쿠쿠.
몸 안을 파고들던 암흑 오러와 저주가 그대로 그의 힘이 되어 체내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게……?”
그리고.
우드드득.
- 뭐!?
벤투스의 당혹스러운 영파와 함께 가슴에 박힌 놈의 발톱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크와아앙!”
- 어림없다!
당황한 벤투스의 마기가 다시 집중되며 발톱을 더욱 깊숙이 박아 넣으려 했지만, 밀어 내는 힘이 더욱 강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벤투스는 그쪽의 힘을 빼고 다른 쪽 앞발에 강렬한 암흑 오러를 두른 채 그대로 크롬벨의 머리를 후려쳤다.
꽈아아아아앙!
파고들었던 땅을 터트리며 튕겨 나가는 크롬벨의 몸.
“큭!”
하지만.
허공에서 자세를 잡은 크롬벨의 몸은 주르륵 밀려나면서도 어느새 새하얀 성광 속에서 깊은 상처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후으으…….”
그뿐 아니라.
콰콰콰콰콰.
주변의 마기를 오히려 온몸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신성력과 마기가 공존하는 듯한 믿을 수 없는 광경.
“크르…….”
- 이게 무슨……?
영파를 쏘아 낸 벤투스가 황당하다는 듯 멈칫하다가도, 이내 다시 번개같이 따라붙어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한 용사는 두 번은 실수하지 않았다.
다만.
콰콰콰콰콰콰.
쾅!!
- 어떻게 이런……!
성검을 휘둘러 벤투스의 공격을 모조리 쳐 내고 있는 크롬벨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역력했다
‘어떻게……?’
심장에 있는 마법의 서클 위로 덧씌워진 검은 고리.
본래 성검의 봉인이 더 풀리면서 자연스레 형성되었어야 할 8번째 고리가, 봉인 해제 없이도 생성된 것이다.
다만, 마나가 아닌 진득한 마기를 품고서.
여신의 사도로서, 마기를 신성력의 대척점이자 이 세상의 기운인 마나를 오염시키는 힘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그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변화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번쩍.
쾅!
“크르르.”
- 흐, 더 빨라졌다고?
이전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전투 보조 마법들은 그것이 온전한 자신의 힘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거기다 주변의 마기를 은근히 빨아들이기까지 하고 있으니.
찜찜하긴 해도, 당장 급한 상황에서 새로 생긴 힘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비록.
콰아아아앙!
- 흑마법!? 네놈, 여신의 사도가 아니로구나!
이런 어이없는 매도를 당하더라도 말이다.
스스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변화였다.
생각해 보면 조금 전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실수도 과거의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내가…… 변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성격도 조금 급해진 것 같고, 손속도 조금 잔인해진 것 같기도…….
혼란스러웠지만, 그 와중에도 아까처럼 적에게 틈을 보이지는 않았다.
쾅!
그그그그극.
쩌어어엉!
퍽!
“크왕!”
“칫!”
연이은 충돌 끝에 튕겨 나가는 적.
다행이라면 적 역시도 자신만큼이나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이랄까.
“크르르.”
- 마도를 따르는 자가 어찌 여신의 힘을 쓰지? 네 녀석, 정체가 뭐냐?!
두 번째로 맞는 소강상태.
벤투스의 신경질적인 영파가 울려 퍼졌다.
이제 더는 여유가 없는 듯한 느낌.
하지만 크롬벨에겐 이 상황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며 여신과의 연결이 끊겼다는 것이 유독 아쉽게 느껴지는 순간.
그러나.
“……마족은 멸절해야 할 적. 나는 굳건한 여신의 종일 뿐이다.”
“컹!”
- 헛소리!
적의 욕설이 흔들리던 정신을 다시 칼날처럼 벼려 주었다.
스스로가 변했다 한들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크롬벨은 과거에 이루지 못한 과업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변한 것 같다고?
‘그렇다 한들 어떤가.’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뭐든 받아들이겠다.
우웅.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마기의 고리가 좀 더 짙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이 상태로 성검의 봉인을 완전히 푼다면.’
전생에 결국 넘지 못했던 한계를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까지 떠올리자 자연스레 미소가 나왔다.
그런데.
“푸르르.”
- 가만, 이거……? 하, 이거 재밌군. 크크크크.
갑자기 적의 태도가 바뀌었다.
살기가 옅어지고,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느낌은…….
‘흥미?’
언어가 아닌 영파로 자신의 뜻을 전하는 고위 마족과 천족들은그렇게 전달되는 의지 속에서 감정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벤투스의 변화는 지금의 상황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킁!”
- 하나만 시험해 보지.
우우우웅.
그 의지가 울려 퍼지는 순간, 놈의 앞뒤와 왼쪽에서 작은 마법진 세 개가 일시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법도 쓴다고?!’
새삼 보통 악마가 아니다 싶어 당황하던 그때.
쩌저저정!
스아아아아아.
벤투스의 근처에 생성된 마법진이 일순간 깨어져 나가며, 주변의 모든 공간을 새까만 안개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안개가 아니었다.
마기를 가진 자의 존재를 그와 같은 종류의 기운 속에 숨기고 적에게는 온갖 저주를 선사하는, 최소 7서클의 흑마법.
하지만.
‘흥. 어딜!’
번쩍.
‘빛이여!’
크롬벨의 의지가 움직이자, 그의 몸에서 쏟아진 성광이 주변을 물들이던 검은 안개를 밀어 내며 일정 거리를 온통 스스로의 빛으로 물들였다.
그 순간.
- 이건 어떤가.
음울한 웃음소리 같은 영파와 함께 검은 안개 속에서 쏟아진, 두 줄기의 검은 광선이 그대로 빛의 공간을 꿰뚫었다.
“흡!”
그 순간 반사적으로 휘둘러진 성검.
그 성검을 직격한 검은 광선이 그대로 사라지는데.
우웅.
그 광경은 광선이 검에 튕겨 나가거나 소멸되었다기보단 그대로 흡수된 듯한 느낌이었다.
‘응?’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보조 마법 때문에 힘을 잃어 가던 서클에 오히려 힘을 불어넣어 주는 듯한 느낌.
‘이게 무슨……?’
크롬벨의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
검은 안개 속에서 우렁찬 포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와아앙!”
- 크하하하. 이거, 이거 정말 재미있구나! 지켜볼 만하겠어!
살기가 씻은 듯 사라지고 오히려 흥미로움만 가득해진 벤투스의 영파가 크롬벨의 불쾌감을 자극했다.
자연히.
“그 웃음이 언제까지 가나 보자, 마족.”
자신은 있었다.
새롭게 계약한 정령, 오투스(Otus)는 고위 마족과의 전투에 직접 선보일 수는 없었지만.
그 첫 번째 체화 능력, ‘먹이를 쫓는 눈’이 더해진 덕에 크롬벨은 7서클 마법의 방해 속에서도 벤투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끝장을 보자.’
살기를 가다듬은 크롬벨의 전신에 성광의 오러가 솟구쳐 올랐다.
오랜 전투 경험 덕에 자동으로 발동되는 신성의 축복과 상승한 마법 경지로 인해 모든 전투 보조 마법이 최고조로 치솟으니.
파악.
일순간 땅을 박차고 사라지는 용사의 신형은 전투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 흐흐. 지금은 때가 아니니, 네놈은 나중을 기약하지.
극속의 벤투스, 폭식의 장군들의 수좌는 이미 검은 안개 속에서 몸을 뺀 후였다.
“흥!”
도망치게 놔둘 것 같으냐!
이미 가속한 크롬벨의 몸이 그대로 벤투스의 흔적을 쫓아 내달리는데.
- 이런……!
놈의 놀란 듯한 영파와 함께, 그사이 변한 전장의 상태가 한순간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