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마수병단 (4)
번쩍.
전장의 최심부에 쏟아진 엄청난 벼락의 향연은 치열한 전장의 와중에도 주변 병력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화려한 빛과 굉음은 새까만 마기가 뒤덮은 공간 내에서 더욱 강렬한 임팩트를 주었으니까.
“끄……!”
콰지지지지직.
폭식의 장군들과 저릭, 그리고 실버 팽 사이에 있던 수백의 마물들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짓이겨지고.
전장을 뒤덮는 번갯불 가운데서도 가장 큰, 기둥 같은 벼락불이 일곱의 최상급 마족이 유지하고 있던 마법진을 그대로 후려쳤다.
꽈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르릉.
그 순간 거침없이 마기를 뿜어내던 마법진의 반구형 보호막이 일그러지며, 빛의 장막을 조금씩 밀어내던 마기의 분출이 확 줄어들었다.
- 지금이다! 밀어붙여!
- 성기사단이 참전……!
- 이때다!!
뒤이어 뒤쪽에서 울려 퍼지는 전장의 목소리들이, 지금의 공격이 꽤 큰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니.
“한 번 더!”
“좋다!”
그 사이 더욱 거리를 단축한 두 초인이 다시금 기세를 끌어 올리는데.
“크와아아앙!”
- 거기까지.
강렬한 영파가 그들이 있던 공간을 강타한 직후, 붉고 푸르고 새하얀 세 가지 색깔의 불꽃이 그대로 쏟아졌다.
“흡!”
콰콰콰콰콰콰콰콰.
재빨리 흩어진 저릭과 실버팽.
그리고 그중 실버 팽의 앞으로, 머리 하나가 그의 몸만 한 거대 철갑 삼두견이 칼날 같은 이빨을 드러낸 채 쇄도하고 있었다.
짜릿하게 엄습하는 위기감 속에서, 타이니의 목소리가 실버 팽의 머릿속을 스쳤다.
- 카니스(Canis). 그 똥개 새끼는 세 개의 머리에서 내뿜는 각기 다른 저주의 불꽃과 그 거대한 덩치를 이용한 육탄전이 특기야.
- 놈의 영역은 광범위하게 전개해서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하고 원거리 공격을 방어하는 쪽으로 진화했어. 처음에는 왜 그런 건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았지.
- 그놈 눈, 멀쩡해 보이는데 사실 장님이야. 냄새와 기척으로만 주변을 파악하는 거지. 그러니…….
물론 타이니가 알려 준 방법은 지금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파지지지지직.
실버 팽의 눈이 빛나는 순간, 그의 몸 전체가 샛노란 번갯불에 뒤덮이며 구속력을 풀어냈다.
그리고.
이중 가속, 천둥 늑대의 폭주.
위기감 속에서 한계를 넘은 그의 몸이 카니스의 이빨 앞에서 흐트러지듯 사라지더니, 순간적으로 그 전면에 7개의 잔상을 만들어 냈다.
오직 이동에만 모든 힘을 쏟아부은 덕에 보일 수 있는 환상적인 신기.
‘젠장, 내가 한계를 넘었었다면 공격도…….’
물론 당사자는 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실버 팽의 움직임에 잠깐 멈칫한 카니스의 세 머리가 이내 그의 잔상 전부를 뒤덮는 삼색의 불꽃을 다시 뿜어냈다.
그러나.
콰콰콰콰콰콰콰콰.
이미 실버 팽의 몸은 쏟아지는 불꽃의 영향권에서 빠져나간 뒤였다.
‘주의만 끌었으면 됐어.’
실버 팽은 그사이 적의 등 뒤로 떠오른 ‘동료’를 응시하며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흐아압!”
그에 응답하듯, 우렁찬 기합을 터트린 저릭이 허공에서 거대한 양손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번쩍.
저릭식 도끼 살법, 보름달 가르기.
은빛 오러가 넘실거리는 도끼가 검은 공간 내에서 은빛 보름달을 그려 내는 순간.
쩌어어억.
“깨애애앵!”
위풍당당하게 등장했던 거대한 철갑 삼두견이 비루한 비명을 터트렸고, 그 세 머리의 뒤통수가 동시에 쩍 갈라지며 검은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치명타를 입힌 저릭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으니.
‘젠장, 얕았어.’
- 카니스를 죽이려면 세 머리를 동시에 박살 내거나 심장을 노려야 해. 머리 하나만 박살 낸 적도 있었는데,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재생해서 나타나더라. 그땐 진짜 욕이…….
- 어설프게 치명상을 입히면 바로 도망치는데, 사람 다리로는 쫓을 수 없어.
- 사신이 은신해서 추격해도 냄새를 맡아 회피했고, 속도로 쫓을 수 있는 사림은 놈을 끝장낼 결정타가 없었지. 에스티나 역시 원거리에서 놈의 영역을 뚫기가 힘들었어.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한 번에 놈을 죽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놈의 육체와 갑옷 같은 껍질의 강도와 반발력이 강했다.
‘젠장.’
자신의 일격에도 세 머리 중 어느 하나도 의식을 잃지 않은 듯했는데, 심지어 많은 양의 피를 쏟아 낸 데 비해 기세는 그 정도로 줄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 상황에서.
“끼에에에!”
뱀의 머리로 변한 놈의 꼬리가 착지하려던 자신을 덮쳐 오고 있었다.
“칫!”
콰아아앙!
그에 저릭이 재빨리 검붉은 오러를 두른 뱀 대가리를 쳐 내며 허공으로 튕겨 나가는데.
“크와아아앙!”
- 정말 네놈이 운명의 변수로구나.
분노한 마수, 아니 마족의 눈동자 세 쌍이 다시 빛을 발하며 그를 노려보는 순간.
세 가지 불꽃이 동시에 그의 몸을 뒤덮었다.
- 최악의 경우라도 놈의 세 가지 불꽃을 한 번에 뒤집어쓰는 것만은 피해야 해.
- 열기와 타격은 둘째 치고, 약화, 마비, 부패의 세 저주가 동시에 걸리면 대사제급 신성력이 아닌 이상 회복이 안 돼. 더욱이 전쟁터에서 그렇게 되면…… 알지?
‘이런 씨……!’
타이니의 경고가 생생하게 머릿속을 울렸지만,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연거푸 전력을 쏟아 낸 탈력감 속에서 뱀 머리를 쳐 내기까지 한 상황.
게다가 착지하기 직전에 쏟아져 오는 기막힌 타이밍까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오러를 전개해 방어력을 높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샛노란 번갯불을 휘감은 은빛이 그의 육체를 잡아채며, 순식간에 그 자리를 이탈했다.
콰콰콰콰콰콰콰.
“컹!”
“컹!”
“컹!”
- 감히!!!
“고맙다, 문나이트.”
“동료끼리, 무슨 소리.”
한순간에 그 공격에서 벗어난 저릭과 실버 팽이 눈을 맞추며 다시금 자세를 잡는데.
“커허헝!”
- 죽어라!
그 직후, 거대한 마수가 그들이 있는 공간을 그대로 찢어발길 듯 양발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막강한 육체에 검붉은 오러까지 대량으로 덧씌워진 공격.
카가가가가강!
쾅!!
연이은 공격과 끊임없이 쏟아지는 불꽃에, 저릭과 실버 팽은 간신히 방어하며 간혹 드러나는 틈을 노리는 것도 버거웠다.
자연스레 두 사람 다 머릿속에 막막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놈이 여섯이나 더 있다고?’
7대 기사, 아니 현 12대 기사 중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간신히 호각을 이루는 무력.
게다가 저릭은 이미 오러익시더였고, 실버 팽은 경지를 떠나 육체 능력과 스피드 쪽에서는 최고 수준의 강자였다.
심지어 저들만 못하다지만 악마급 마족도 있다고 했다.
‘부관들…….’
말이 부관이지, 전생에 오러익시더인 저릭과 에스티나, 검제가 일대일로 간신히 감당했었다는 놈들만 열넷이 더.
그 와중에도.
- 그놈들을 일대일로 상대해서 확실히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어. 뭐, 나야 장군들도 벤투스 빼고는…….
그 정보를 전해 준 이의 자신감을 떠올리자 슬쩍 미소가 나오는데.
“크와와아앙!”
- 감히 날 상대로 딴생각을 할 틈도 있으시다?
콰콰콰콰콰콰.
쾅!
흘깃 눈을 돌리자 강림의 문 중심지에 마족이 여섯이나 더 남아 있는 게 보였으니, 그들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 장군들이 대륙을 박살 내겠다면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으니 그나마 각개 격파가 가능했지. 뭉쳐서 움직였다면, 글러터니를 죽이지도 못했을 거야.
- 왜인지는 몰라도 악마급 마족들끼리 서로 경쟁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유일한 틈이었어.
-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인류가 벼랑 끝에 몰리기도 했고.
타이니의 말이 깊이 공감되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거대한 삼두견, 카니스가 튀어나옴으로써 놈들이 유지하던 마법진이 훨씬 작아졌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밀려나던 빛의 장막이 다시금 자리를 지키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왜인지 놈들이 더 이상 손을 보탤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저것 때문인가.’
놈들의 뒤쪽에 강림의 문이 조금씩 커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크허어어엉!”
- 카니스, 도와줄까? 놈들을 처리하고 마법진을 다시 강화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크르르르!”
- 닥쳐라! 내가 처리한다!
아예 대놓고 적들 앞에서 서로 반목하는 듯한 모양새까지 보여 주는데.
저릭은 그 모습조차 그리 기껍지 않았다.
‘우리를, 나를 쉽게 보는 거야.’
쾅!
주르르르륵.
다시금 카니스의 앞발을 쳐 내는 순간 밀려 나가는 몸.
이미 누적된 충격보다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더 컸다.
‘감히, 오크의 대전사인 나를 상대하면서…….’
- 목숨을 아껴라, 모두들. 우리 목숨은 군단장들과 마왕을 죽이기 위해…….
‘아니, 아니야, 친구.’
투쟁심에 다시 강렬한 자극을 받은 순간, 저릭은 다시금 떠오르는 타이니의 말을 억지로 무시했다.
“한번 몸을 사리면.”
쾅!
“계속해서 사리게 되는 거야.”
쩌어어억!
저릭의 눈이 붉게 타오르는 순간, 그의 은빛 오러가 한순간 확 짙어지며 카니스의 발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크와아앙!
- 이놈이!
인위적인 오버리바운드.
폭증한 오러의 효과였다.
오크의 대전사는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아니 이 전투의 승기를 잡기 위해 목숨을 걸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번쩍.
우르르르릉.
“크와왕!”
그것은 허공에 샛노란 번개를 쏘아 올리는 수인족의 대장군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씨익.
- 내가 죽더라도, 눈앞의 이놈은 데리고 간다.
오크와 늑대인간의 얼굴에 비슷한 미소가 걸리는 순간.
직전보다 훨씬 빨라진 둘의 움직임이 한순간 카니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쩌저적.
콰아아아앙!
“깽!”
- 이, 이것들이!
그 짧은 순간에 거대 철갑 삼두견의 전신에 무수한 상처가 새겨지고.
끝없이 가속한 저릭과 실버 팽의 움직임이 다시 한번 겹쳐진 순간.
“이걸로.”
“끝이다.”
놀랍도록 똑같은 표정을 지은 오크와 수인족이, 그들이 함께 마법진을 타격했을 때의 움직임과 똑같은 경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릭&실버 팽 연계기.
뇌광진천하(雷光振天下)!
새하얀 보름달이 지면에서 떠오르는 순간.
이내 그 달이 산산이 조각나며, 그 파편이 샛노란 벼락으로 변해 카니스의 전신을 뒤덮었다.
번쩍.
우르르르르릉.
이전보다 훨씬 밝게 번뜩이는 샛노란 빛이 전장의 중심을 뒤덮은 직후.
꽈아아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그 중심에서 두 사람이 튕겨 나왔다.
“컥!”
비틀.
“이, 이런!”
쿨럭.
간신히 자세를 유지한 채 피를 토해 내는 저릭과 실버 팽.
한순간 눈에 띄게 기세가 줄어든 그들의 눈앞에는, 카니스에 비해 덩치는 작아도 훨씬 농밀하고 강렬한 위압감을 풍겨 내는 날개 달린 검은 사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쿵. 쿵.
“크, 크르……,”
- 벤투스……. 고, 고맙다.
반쯤 타다 만 듯한 몰골의 카니스가 비틀거리며 힘없는 소리를 내었지만.
전신 가죽이 마치 금속처럼 광택이 흐르는 검은 사자는, 자신의 동료를 궁지로 몰아넣은 두 사람을 오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크르르.”
- 너, 녹색. 정말 운명의 변수인가? 아무리 신의 무기를 들었다 해도 중간계의 생물이……. 제법이야.
짧은 울음 속에서 여실히 느껴지는 여유로움 넘치는 영파.
- 쉬어라, 카니스. 이 둘은 내가 처리하고 다시 마법진을 활성화한다.
자신감 넘치는 영파가 살기를 가득 담아 쏘아지는데도, 그 대상이 된 두 사람은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입을 열 힘도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제, 젠장…….’
저릭은 피부에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면서 이를 악물었다.
오버리바운드의 후유증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마나.
거기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통에 움직이기도 힘드니, 이미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르는 것은 무리라고 봐야 했다.
거기다 눈앞의 괴물이, 자신들의 아직은 조화가 어설픈 합격술의 빈틈을 파고들어 찢어발기는 것까지 똑똑히 본 마당이다.
- 벤투스는 진짜 조심해야 해. 그놈은 다른 장군들하고도 달라. 사신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얼마나 더 고생을 해야 했을지 짐작도 안 간다.
타이니가 당부했던 사실을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었으니.
“크르르르.”
- 유언이 있다면 들어 주겠다, 운명의 변수여. 카니스를 궁지로 몰아넣은 이에게 이 정도 아량은 베풀어야지.
저 재수 없는 태도도 당장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 내 생명을 불태워서라도…….’
저릭이 생명력 자체를 갈아 넣을 생각으로 마나를 움직이려던 그때.
- 두 분은 좀 쉬시지요.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그와 실버 팽의 전신에 따스한 빛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
육체의 후유증이 빠르게 치료되는 느낌, 그 놀라운 효과에 저릭과 실버 팽의 눈동자가 커지는데.
어느새.
“적어도 두 분은 타락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군요. 이제는 제가 맡겠습니다.”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은빛 갑옷의 성기사가 검은 사자 앞에 서 있었다.
“보니까 속도에 자신이 있나 봐, 마족. 그런데 우연이네? 나도 그렇거든.”
성광으로 형형히 빛나는 검을 적에게 겨누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