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마수병단 (2)
처음 균열이 열리기 시작했을 때.
자신만만한 표정과는 달리, 검제는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웠으니까.
‘타이니도, 에스티나도 없다.’
가장 큰 전력이 될 두 초인, 거기에 더해 사신과 아르곤이라는 젊은 초인들조차 아직 전장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기는 일곱 개체는.
‘폭식의 일곱 장군들.’
각기 루페스, 티그리스, 카니스, 네불라, 탈파, 베르미스, 벤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후작급 악마들이었다.
이미 타이니에게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었던 존재들이었기에 보는 순간 바로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놈들이 나오자마자 힘을 합쳐서 성물의 힘을 밀어 낸 것도 예상외의 일.
하지만 상황이 최악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가정했던 가장 최악의 경우는, 저 폭식의 장군들 외에도 그 휘하의 부장급 악마들 열넷이 같이 튀어나오는 것이었으니까.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부관들은 지금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가만히 보니, 쏟아져 나온 마물 중에서도 초월급은 보이지 않았다.
‘뭐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상정했던 최악의 경우에 비하면 적의 전력은 악마급 마족 열넷과 초월급 백 수십이 빠졌고, 아군은 ‘고작’ 최강급 전력 넷이 빠진 거였으니까.
‘아니, 왕국 연합의 전력도 빠지긴 했지.’
하지만 그 핵심 중 하나인 현자의 마탑은, 솔레인의 독단으로 왕국 연합의 총의를 무시하고 오렌 평야에 와 있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나쁘지 않아.’
더구나 4~5일 안에 도착하기로 한 타이니와 아르곤과는 다르게, 에스티나는 이변을 감지한 순간 바로 날아오기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타이니도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도 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아무리 강력한 아군이라고는 하나, 수십만의 대군을 옆에 두고서 고작 4명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다니.
“이 병력만으로도 충분해.”
그렇게 검제가 자기반성을 하며 각오를 다지는 찰나.
대마도사 솔레인과 장로들이 현자의 마탑 정예들과 황실 마탑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대마법들이, 평야의 위쪽에서 별빛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성물의 효과를 극대화한 상태에서 그 안에 마법을 더한 ‘대축복 마법.’
극대화된 마나가 신성 결계의 신성력을 증폭시키며 ‘이 세상의 존재들’에게 용기와 힘을 더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힘이, 힘이 넘친다!”
“할 수 있어!”
“마물들을 작살내자!!!”
지휘관들이 따로 독려하지 않았음에도, 마물의 군세 앞에서 얼어붙었던 연합군의 움직임이 그 순간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비록 초인에게는 통하지 않는 축복일지라도, 대군을 이끄는 입장에서 실시간으로 변한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니.
‘확실히 대단해.’
전생에는 강림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던 대마도사 솔레인의 존재가 어쩌면 가장 강력한 변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저 마법의 효과는 단순히 연합군 버프로 그치지 않았다.
콰콰콰콰콰콰.
“꾸에에에에엑!”
“끄르르르르륵!”
가장 먼저 창공으로 날아오르려던 마수병단의 공중 병력이 날벼락을 맞았다.
폭식의 장군들이 만들어 낸 마기의 영역을 벗어난 마물들이 빛의 장막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기를 녹여 버리는 성스러운 힘에 더해진 벼락과 불의 폭풍이 그것들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서.
- 쏴라!
매서운 고함과 함께 온갖 속성의 마나가 담긴 만 단위의 화살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고.
“꾸에에에엑!”
“끄륵!”
그 화살의 폭우에서 벗어나 허공으로 흩어지는 마물들에게는 백여 마리에 달하는 거대한 새의 정령들이 집중 공격을 가했다.
“1, 2번 대는 동쪽, 3, 4번 대는 서쪽, 나머지는 북쪽! 남쪽은 정령들에게 맡겨!”
에스티니가 없는 사이, 그녀의 부관인 라므엘은 토끼의 정령 토리의 능력을 한껏 사용해 다중 시야, 다중 감각으로 엘븐나이트들의 화력을 확실하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전장의 소음 속 그녀의 곁에서만 펄럭이는 깃발들이 엘븐나이트들을 정확히 컨트롤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해 갈 때.
지상에 있던 연합군들도 돌진해 오는 마물들과 조우하고 있었다.
“쿠어어어어어!”
두두두두두.
‘주, 죽는다.’
집채만 한 멧돼지가 정면으로 돌격해 오는 순간, 온갖 신성과 마법의 버프 속에서도 아찔한 기분이 든 제국 병사 라엔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10년 가까이 변방의 작은 마물이나 몬스터 혹은 오크들과의 전투로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던 담력이지만, 생전 본 적 없는 거대한 괴물이 정면으로 달려드는 데에는 버티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쩌어어어어억!
“꾸에에엑!”
강렬한 절단음이 들리며 새하얀 빛이 슬쩍 비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괴성과 함께 그 멧돼지가 두 쪽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얼어붙어라!!”
쿠우우우웅.
은발 기사의 고함과 함께 전면에서 달려들던 마물들이 다리가 얼어붙으며 비틀거리고.
“크롸롸롸!”
촤아악.
“꾸어어엉!”
스각.
연이어 휘둘러진 희고 푸른 오러의 향연이 그 마물들을 말 그대로 분쇄해 버렸다.
은색 갑옷에 황금빛 독수리의 문양.
게다가 희고 푸른 오러를 뿜어내는 초인은 현재 제국의 병사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검제의 뒤를 잇는 두 번째 오러유저로서 제국 기사의 긍지를 드높인 청년 기사.
“북풍의 기사!!”
“눈 뜨고 창을 들어라, 병사! 네가 피하면 동료가 죽는다!”
촤자자작.
꾸에에에엑.
그가 뿜어내는 오러는 마물들을 얼린 채로 깨끗하게 잘라 내며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연신 오러의 검을 휘두르면서 소리치는 지휘관의 모습에, 라엔은 이를 꽉 물며 창대를 움켜쥐었다.
“예, 각하!”
평상시보다 몇 배로 솟아오르는 힘을 그제야 느낀 듯, 그는 우렁차게 대답하며 창을 내질렀다.
푸슉.
그가 내지른 창대는 비록 마물들의 피부를 긁으며 멈춰 설 뿐이었지만, 더는 두렵지 않았다.
그의 앞에는 가히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는 지휘관이 있었으며, 그 옆에는.
푹. 푹. 푹.
“정신 차려!”
“마물을 죽여라!”
그와 비슷한 눈빛의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빛나는 마나의 축복 속에서 같이 창을 내지르고 있었으니까.
‘이길 수 있어.’
라엔의 눈동자에 다시 희망의 빛이 차오르는 만큼 제국군 전체의 사기도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장의 다른 한쪽에서는.
“내 뒤를 따르라!!! 명예를 쟁취하라!!”
은빛 바람의 오러가 전장에 커다란 보름달을 그려 내는 순간.
오크군의 전방으로 달려들던 마물들이 겨울철 낙엽처럼 가볍게 으스러져 버렸다.
그런 그의 뒤로.
“우와아아아아!”
“대전사를 따르라!”
“마물을 죽여라!”
일견 마물처럼도 보일 만큼 화려하고 울긋불긋한 문신 마법, 마력 회로를 한껏 끌어 올린 오크 전사들이 적을 막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예 돌파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샛노란 번갯불을 온몸에 휘감은 은빛 늑대인간이 마물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전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오크들에게 지지 마라! 누가 대륙 최강의 종족인지 보여 줘라!”
콰지지지지직.
샛노란 전격이 내달린 자리에 남는 것은 마물들의 시체뿐이었다.
“우와아악!”
“대장군을 따르라!”
“오크 놈들한테 지지 마라!!”
엘프군이 공중 병력을 막고 제국군이 마치 방패처럼 마물의 전선을 일차적으로 저지하면, 오크족과 수인족, 드워프의 군대가 창이 되어 그 구석구석을 찌르는 듯한 모양새로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전장의 남쪽에서는 하이넨이 수천의 무리를 이끌고 기괴한 형태의 진형을 짜고 있었다.
“거기 너, 더 뒤로.”
“곧 온다!”
“빨리 안 움직여!?”
테그멘에 탑승한 드워프, 아니 강철 거인의 지시에 따라 땅 속성을 각성한 익스퍼트급 이상의 드워프 정예들과 차출되어 온 땅 속성의 소서리스 엘븐나이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휘하는 것은.
“놈들이 옵니다, 하이넨 공!”
현자의 마탑 장로 중 또 하나의 마도사인 지진의 마도사, 록펠러였다.
늙은 농부처럼 그을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그의 호명에 따라, 평상시라면 서로 날을 세워도 이상하지 않을 엘프와 드워프의 정예들이 일시에 마나를 끌어 올리며 정해진 방식에 따라 움직였다.
“자, 간다.”
하이넨은 몇 달 전 검은 기사에게 귀에 피가 나도록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 마수병단의 지하 마수들은 먼저 오렌 평야의 남부를 뚫고 테르티우스 쪽으로 향할 거야. 어찌 보면 그놈들이 제일 중요해. 땅을 오염시키는 놈들이니 무조건 막아야 해.
솔직히 보통 사람이 들으면 다소 막막한 지시였다.
땅굴을 뚫으며 전진하는 괴물들의 ‘군대’를 대체 어떻게 막을 것인지는 누가 봐도 난제가 틀림없었으니까.
하지만 하이넨은 그 답을 묻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바로 대답해 줄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라고.
“흐아아아아압!”
하이넨이 전신의 마나를 끌어 올리며 온몸에 갈색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러자 그것을 신호로, 록펠러와 드워프, 엘프의 정예들이 함께 만든 거대한 마법진이 땅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르르릉.
지면을 딛고 선 모든 이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땅 위에서도 애써 균형을 지키며 집중을 유지했고.
이내.
- 키에에에에엑!
쾅. 쾅.
우르르릉.
지하에서 괴물들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맞췄다! 뚫어!”
쾅!
우르르르르르르르릉.
그 순간 그들의 발밑이 무너지며 수십 미터 아래 지하로 떨어져 내렸다.
이내 그들의 눈앞에 수십 줄기의 땅굴을 만들어 내며 남쪽으로 향하던 거대한 웜과 뿔과 비늘이 난 두더지, 쥐와 뱀 등의 마수들이 나뒹구는 광경이 펼쳐졌다.
하나같이 대륙의 지하에 사는 동물들이 끔찍하게 변형되고 커진 듯한 모습의 괴물들이었지만.
이미 쏟아지는 빛 속에서 정체가 드러난 상황.
“전부 때려죽여!!!”
가장 앞장서서 괴물들을 향해 내달리는 하이넨의 강철 몸뚱이는, 어느새 등 뒤의 부무장인 해머와 도끼를 양손에 꺼내 들고 있었다.
- 그렇게 했는데도 막지 못하는 것들은 나중에 찾아내서 박살 내야지. 어쩔 수 없어. 일단 1차 공격만 막아 내도 성공이라 생각해.
흥. 어림없지.
이곳에서 끝낸다.
- 테르티우스는 결국 지하 마물들의 둥지가…….
그렇게 되게 둘까 보냐!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하이넨이 왼팔을 들자, 그 손에 들린 붉은빛 원통이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초월무구 불벼락.
그가 가진 또 하나의 무기가, 일주일에 한 번 쓸 수 있는 비장의 수법을 토해 냈다.
8서클 복합 마법, 화염 폭풍(Fire Storm).
붉은 화염의 폭풍이 수십 개의 땅굴 전체를 뒤덮으며 쏘아졌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 끼에에에에에에!
- 끼이이이이!!
땅굴 안에 쏟아진 불꽃들이 지하 깊숙한 곳까지 울리는 마물들의 비명들을 대량 생산해 냈고.
“가자!”
하이넨을 비롯한 드워프 최정예들과 엘프의 땅 속성 소서리스, 그리고 지진의 마도사까지.
현시점 인류 최고의 지저 병력이 그 땅굴 속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철저한 준비 속에서 인류의 대군이 마물들의 군대를 압도하는 듯한 모습.
하지만 연합군 내부에서도, 한 부류는 그런 분위기에 전혀 휩쓸리지 않고 있었다.
“결국 그 광휘의 기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용사님 말씀과는 다르게요.”
갓 핸드의 말에 크롬벨은 전장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모르죠. 무슨 다른 속셈이 있을지도.”
“…….”
갓 핸드는 그 말에 더는 부언하지 않았지만, 이미 전쟁 시작 직전에 살짝 흔들리기 시작한 그의 눈동자는 조금은 무겁게 용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꺼낸 말.
“저희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에 크롬벨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에요.”
이미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전장에서, 신전의 정예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오렌 평야 작전에서 소외되었던 탓도 있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인류의 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크롬벨의 시선은 등장 이후 마기의 공간을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는 폭식의 장군들을 향해 있었다.
“……저 괴물들이 왜 움직이지 않는지, 상황을 지켜봐야 합니다. 게다가 광휘의 기사가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이 결국 갓 핸드의 눈동자를 더욱 크게 흔들었고, 결국 본래 그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까지 꺼내게 만들었다.
“대체 무슨 기회를 말입니까?”
광휘의 기사는 교황 성하께 무례를 범하기는 했지만, 성하께서 직접 용서하셨으니 허물을 덮어 둘 수 있다.
그렇게만 보면 그자는 인류를 끌어모아 대재앙에 대비하게 만든 영웅이다.
그런데 용사가 그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이상했다.
마족의 침공이 현실화되었는데도 신전의 병력을 움직이지 않다니?
치열한 전투의 와중, 아무리 아군이 우세하다 한들 지금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것은 마물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미 충분히 설명한 걸로 아는데요?”
용사의 차가운 눈길은 변하지 않았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질투일까?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여신의 검이라면 개인의 감정 따위는 접어 두고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게 맞았다.
‘기록에 따르면 용사는 이런 인물이 아니었다.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본래 이런 자인가. 그도 아니면 역시 흑마법이…….’
전투 직전에 들은 검제의 말을 떠올린 갓 핸드의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해지던 순간.
“이런……!”
전장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