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강림
고대의 마계 대전 직전.
당시엔 수년에 걸쳐 초월급 마물들이 종종 등장했고, 악마급 마물들까지 나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칠죄종의 병단에 속하지 않은 마계의 괴물들이 차원의 문이 뚫리면서 무작위로 튀어나온 것이라 전해졌다.
하지만 실제로 타이니가 겪었던 전생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물론 운명의 비틀림으로 인한 초월급 이상 마물의 출현 가능성도 염두에 두긴 했지만, 막연히 예상만 했을 뿐.
“제국 내부에서만 초월급 마물 다섯 마리 확인. 웨어비스트 셋, 평원에 다섯, 대수림은 둘…… 그마저도 추정치입니다. 연합은 확인 중이며, 테르티우스 소식은 아직 안 들어왔습니다.”
이런 미친 숫자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보고하는 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타이니의 입에선 거친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 신전 쪽에서는 이미 남부 산맥 쪽에 출현한 초월급 마물들을 상대하기 위해 성기사단과 전투 사제단을 출진시켰다고 합니다.”
“허…….”
원래 계획대로라면, 기본적인 병력들에게 위험도 높은 마물들의 출현 소식을 알리고 대비하게 해야 했다.
그리고 혹시나 초월급 이상의 마물들이 등장할 시, 병력을 관리할 책임에서 자유롭고 기동력도 빠른 타이니가 직접 돌아다니며 처리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숫자라면 얘기가 다르니, 에스티나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마물 토벌에 나설게요. 카일룸이 월랑보다는 훨씬 빠를 테니까. 대수림이나 마역, 오크족 영토 쪽은 나한테 맡겨 줘요. 엘븐하임에 있는 루나 양도 데리고 움직일 테니 초월급 마물만 빠르게 처리하고 합류하겠어요.”
“엘븐나이트들은?”
“일단 라므엘에게 맡겨 두면 돼요.”
“아르곤이 준 마족 탐지기 있지? 그거면 초월급 위치 확인할 수 있어.”
“알아. 그러니까 할 수 있다 한 거야.”
“……몸조심해.”
“너도. 오렌에서 만나, 타이니.”
가장 도움이 될 전력인 에스티나가 그렇게 방을 나서고.
“웨어비스트 쪽은 지금 내려오고 있을 문나이트가 알아서 할 테고……. 그럼 제국 쪽은 나와 제나스, 저릭 공이 맡아야겠군요.”
“좋소. 마왕군 상대하기 전에 제대로 몸 한번 풀겠군.”
검제와 저릭 역시 바로 계획을 비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태 강림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하이넨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나, 난 테르티우스로 돌아가 봐야겠어.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고, 없다면 오렌 평야로 바로 합류하지.”
“하이넨. 내가 말해 준 전생의 일, 잊지 않았지?”
타이니의 그 말에 움찔한 하이넨이 방을 나서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비는 다 해 놓고 오겠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사라진 뒤.
“그렇다면 연합 남부 쪽은 나와 현자의 마탑에서 맡아야겠군. 아르곤 경, 같이 가세나. 자네 스승님하고 마탑주님께 연락 좀 부탁하네.”
웨폰 마스터 그리드가 그리 말하자, 아르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타이니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르곤은 저와 함께 갑니다. 한 달 안에 연합 북부와 대륙 동북부에 나타난 초월급 이상의 마물만 죄다 사냥하고 오겠습니다.”
“음?”
“내, 내가 너랑?”
아르곤이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타이니가 말을 이었다.
“마탑용 메신저로 만족할 셈이냐? 내가 너 강림 전에 오러 쓰게 만들어 준다고 했지?”
“너, 서, 설마 나를…….”
“초월급 마물들하고 싸우다 보면, 뒤지기 싫어서라도 오러를 쓰게 될 거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닥치고 따라와. 시간 없어.”
“아, 아니! 사람이 상식적으로 생각을…….”
뻐어억.
“……끄?”
털썩.
지극히 상식적인 반문을 하던 아르곤은 대답 대신 돌아온 타이니의 주먹 한 방에 바로 꼬르륵 거품을 물었다.
자연히 모두의 어이없어하는 시선이 쏟아지자, 타이니가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아, 이건 월랑 뒤에 싣고 달리려면 기절해 있는 게 차라리 나아서 그런 겁니다. 움직임이 원체 격렬해서 웬만한 인간은 토하더라고요.”
“그, 마법사인데, 마법으로 균형 감각만 마비시키면 되지 않나?”
“아……!”
황당한 눈빛의 그리드가 굉장히 이성적인 지적을 하는 순간,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고.
“저런…….”
그 이상 비난의 말들이 쏟아지기 전에, 그는 기절한 아르곤의 뒷덜미를 잡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때부터, 인류 연합군에 관한 소문을 듣고서도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던 대륙의 사람들은 대재앙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강제로 체감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초월급을 포함한 마물들이 출몰하면서, 희생자가 속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물들을 사냥하고 사라지는 대륙 7대 기사, 아니 대륙 ‘12대 기사’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두 달 뒤.
슬슬 겨울을 맞이하는 제국 남부의 오렌 평야에는, 주변에 내린 서리를 체온만으로 녹여 버릴 만한 대군이 모여들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아스란 제국군. 35개 기사단에 동원된 기사의 수만 1만이 넘었으며, 수련 기사 수준의 베테랑 정예 병력도 10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건 웨어비스트 군. 7군단의 정예병 중 십인장 이상의 병력만 3만이 넘었으며, 그중 익스퍼트급 이상의 수인족은 3천에 달했다.
그리고 엘프 군에는 엘븐나이트 1만 명이 모여 있었는데, 모두가 원소 술사 겸 마나유저인 데다가 정령술사까지 겸하는 엘프의 최정예 500명도 전원이 동원되었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테르티우스의 드워프 전사 7천여 명이 번뜩이는 아티팩트들과 엘로랑 종의 전투마들을 가다듬으며 전열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진형은 마치 평야의 중심부를 두고 거대한 원을 그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포위망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제국군의 옆에는, 거의 5천 명에 달하는 빛나는 은빛 갑주를 입은 성기사들과 3천에 달하는 흰 법복을 입은 사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휘의 기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갓 핸드의 말에 검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할 일을 모두 끝내고 도착할 거요. 강림까지 열흘은 남았으니 넉넉하게 4~5일 전에는 도착할 텐데, 아직도 따질 일이 남았소?”
“내 뜻은 중요하지 않소. 교단에서 그에게 확인할 일이 남았을 뿐이오.”
“그래서 이곳으로 신전의 전력을 끌고 오신 거요? 그걸 확인하려고?”
“재앙을 대비하기 위함이요.”
검제의 말에는 확실히 날이 서 있었지만, 투구 속 표정을 알 수 없는 갓 핸드의 목소리에는 고저조차 없어 감정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인류의 전력을 나눠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신전이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왜 이너빌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갓 핸드 경?”
제국군과 신전의 병력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성기사단을 훑어보는 검제의 눈길은 차갑기만 했다.
‘대체 무슨 속셈이냐.’
경계하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느껴질 텐데도.
“우리는 그저 여신의 뜻을 따를 뿐이오, 공작.”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뿐이었다.
“여신의 뜻이 맞습니까? 저기 서 있는 저자의 뜻이 아니라요?”
그리 묻는 검제가 대화를 나누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두 달 전 그날부터 신전이 내세운 ‘용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남부 산맥의 초월급 마물 셋을 처리한 자.
광휘의 기사 타이니, 북풍의 기사 제나스, 사신 루나, 마도 기사 아르곤에 이어 신전의 두 번째 초인으로서 12대 기사에 이름을 올린 자.
이제는 ‘크롬벨’이라는 이름을 당당히 쓰고 있는 성기사가 신전 병력의 가장 앞쪽에서 병력을 다독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여신의 사도로 점지된 용사. 그의 뜻과 교황 성하의 뜻이 일치했다면 그것이 곧 여신의 뜻이오, 공작.”
그럼에도 신전은 외부와 대화할 땐 이런 답답한 인사만 내세워서 상대하고 있었으니.
중요한 때를 앞두고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검제는 이제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여신의 뜻이라면 지위도 목숨도 다 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갓 핸드 경?”
“물론.”
정말 1초도 기다리지 않고 튀어나온 답변에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이자는 명예욕도 없는가?’
며칠간 대충 훑어본 것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무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 성령 기사보다, 저 용사라는 자가 성기사들의 호의를 사고 있다는 것을.
‘아마도 용사라는 타이틀 덕이 크겠지. 성령 기사라는 딱딱한 상관보다야 말도 통할 테고.’
아마도 갓 핸드 경이 저 신전 병력의 왕따 비슷한 것이 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떠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지위든 목숨이든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공작. 그대가 영명을 누릴 수 있는 것도 모두…….”
정신 나간 소리만 이어지니 한숨만 나왔다.
‘이자가 사람이 맞긴 한 건가?’
새삼 제이의 자포자기한 보고가 뇌리를 스쳤다.
- 빈틈이 전혀 없는 인간입니다. 그 성령 기사가 볼일을 보는 것도, 자는 것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 또…… 용사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거나 땅에서 팍 솟아난 것처럼 과거가 없습니다.
- 하, 이번 임무처럼 제 능력에 회의가 느껴진 적이 없습니다. 각하, 정말 죄송합니다.
두 달이라는 기간이 짧기도 했겠지만, 천하의 제이가 그동안 단 하나의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더 의심이 갔다.
잠도 안 자고 볼일도 보지 않는, 최소 2백 년은 묵은 성령 기사.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오러와 대사제급 신성력, 7서클 마법을 같이 쓴다는 괴물…… 용사
‘이게 말이 되나?’
물론.
- 갓 핸드 경은 나를 회복시키고 대신 글러터니에게 죽었습니다.
- 말은 좀 통하지 않지만, 마족을 상대할 때라면 믿을 수 있는 동료죠.
타이니에게 들은 말도 있고, 원체 넘치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기에 악마추종자로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말이 안 통하는 놈들이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
도저히 통제가 안 되는, 속을 모를 아군이라는 것이 답답할 뿐.
당장의 상황만 봐도 그렇다.
인류의 정예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했으면서, 정작 신전의 병력은 가장 사람이 많은 오렌 평야에 왔다.
말과 행동이 다른 자들이 아닌가.
솔직히 신성력만 아니었으면, 악마추종자로 의심했을 것이다.
‘의심하자니 반증이 너무 확실하고, 안 하자니 너무 수상하다.’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찜찜함을 없애고 싶은데, 그러자니 극단적인 방법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차원 관측기의 예측으로는 앞으로 10일 이내…….’
강림, 마계 대전이라는 대재앙을 앞두고 자중지란을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
심지어 대륙을 돌며 초월급 마물들을 처리하고 있는 에스티나와 타이니 등은 아직 이곳에 도착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복합적인 답답함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니, 나오는 것은 넋두리뿐이었다.
“흠, 크롬벨이라는 이름은 고대 마계 대전을 수습한 용사의 이름과 같더군요. 천계에 올랐다는 용사가 부활이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딱 나타난 성기사라니, 참 신기합니다.”
아마도 고대 용사의 이름을 이어받은 거겠지만.
그런데 그 넋두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갓 핸드의 바이저가 살짝, 아주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오러유저인 검제도 집중하고 있는 상태에서나 간신히 느낄 만한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여태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던 자였기에 더욱 크게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그 순간 넋두리를 집어치운 검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지?’
그래, 용사.
고대의 용사와 이름이 똑같다.
부……활?
‘……에이, 설마.’
잠시 추론해 보고 내린 결론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가정으로 이어지자 다시 한숨이 나왔다.
자연스레 그 용사라는 놈에게 눈길이 가는데.
성기사들을 다독이는 와중에도 웨어비스트군을 향해 주기적으로 시선을 던지는 용사의 모습이 보였다.
저것은 최근 며칠 사이 그가 반복하고 있는 행동.
정확히는 웨어비스트의 왕실 제사장이라는 거인이 합류한 순간부터였다.
그가 끈질기게 왕실 제사장에게 면담을 청했지만 계속 거절당했다는 것은 이미 연합군 내부에 소문이 자자했다.
‘뭐 때문일까?’
지금 갓 핸드가 보인 반응과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내가 이런 헛생각이나 하고 있다.’
답답함이 가시지 않은 검제는 연거푸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대재앙의 날짜가 점차 다가오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인 것이리라.
“빨리 와라, 타이니.”
그 무식한 놈이 보고 싶어지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녀석이 용사에 대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흑마법 패턴으로 신성력을 사용하는 자.”
일부러 들으라고 흘려 낸 말.
그에 갓 핸드의 바이저가, 이번에는 눈에 띄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반응이 이어졌다.
“그건…….”
심적 갈등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목소리. 갓 핸드의 당황스러운 변화에 검제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조금 전의 말도 안 되는 가정이 검제의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설마……? 진짜……?’
하지만 그 순간.
- 가, 각하!!! 균열입니다!
본대에서 제나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고.
그의 감각에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벌써? 너무 빨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는 순간.
쩌저저저적.
평원의 중심, 그 허공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