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인류 연합
“영감님, 잠깐만.”
“너 이 새끼, 진짜 이젠 대놓고 호칭이…….”
“아, 급한데 뭘 호칭 가지고 그럽니까.”
“아우, 이걸 진짜…….”
동료들과의 모임이 끝난 뒤, 타이니는 검제만 따로 붙잡았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쭉 이어진 이야기 끝에, 검제의 안색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용사는 맞는 것 같은데, 이상한 점도 많다……?”
“예, 확실히.”
“씁. 근데 말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다, 너?”
“에헤이. 착각, 착각입니다.”
너스레를 떨면서도 타이니는 스스로 실소하고 있었다.
‘아씨, 반말이 안 나오네.’
누군가는 버릇없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타이니에게 검제나 하이넨은 똑같은 동료였다.
- 전투 중에 길게 말하다 뒈지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하이넨에게 한 그 말은 가감 없는 진심이었다.
실제로 전생에도 약간 말을 높인 적은 있어도 공대를 한 적은 없었는데, 이번 생에 와서는 이상하게 검제에게만큼은 반말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아마 회귀로 시작된 이번 생 자체가 그에게 빚을 진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발렌티아가의 비전을 두 개나 배웠으니 더더욱.
“빨리 갚아야지.”
“그건 또 뭔 소리냐?”
“아니,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그놈 뒤를 캘 생각 좀 해 봐요. 그거 스무 살 아니라니까? 게다가 전생에서도 분명 신전에서 스무 살이라고 발표했었다니까요. 그때도 지금도 스무 살이라니, 이상하잖아요.”
“확실히…… 이상하긴 하구나.”
“중앙 신전에 있는 상급 사제도 그 정체를 모른답니다. 오러에 7서클 마법까지 쓰는 성기사인데, 이게 말이 됩니까?”
“흠.”
“그러면서도 자꾸 교황을 함께 만나자고 하는 것을 보면 그 측근 같기도 하고, 수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런 놈이랑 어떻게 같이 싸웁니까?”
그 말에 검제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흠,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지금 신전과 대립할 타이밍은 아닌데 말이야.”
“그러니까 영감님한테만 말하는 거 아닙니까.”
“또 영…….”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타이니를 멍하니 바라보던 검제가 손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다 포기한 표정으로 한숨을 뱉어 냈다.
“끄응. 후, 그래 네 멋대로 불러라. 썩을 놈.”
아싸!
……가 아니지. 흠. 흠.
“신전 측에서 다른 생각이 있다고 해도 굳이 지금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걱정이 들어서 말이죠.”
“그래.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일이 꼬이면 곤란하니……. 잘 말했다. 따로 조사는 해 보마.”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나저나 너, 한동안 제이는 피해 다녀라. 이 일도 그 녀석한테 시킬 거니까.”
“……?”
“제이가 이제 너랑 하는 일이라면 치를 떨더라. 웨어비스트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혼자 튀었다고. 이번에도 네 부탁이라고 하면, 네 식사에 독을 탈지도 몰라.”
“어, 그건 어차피 잘 수습될 거 같아서 그런 건데…….”
“그래. 그 수습이란 게 잘되기 전까지 개고생을 했다지? 뭐, 이해는 한다고 말은 하는데.”
“아, 하하…….”
“아무튼 신경 쓸 일이 많긴 하구나. 오지에서 마물도 신경 써야 하는데, 용사로 추정되는 자마저 수상하다…….”
“음? 마물은 왜……?”
“강림이 가까워질수록 마물들도 늘어난다. 네가 한 말 아니냐?”
“아…….”
“실제로 마물 출현 빈도수가 급증하고 있기도 하고, 그 운명의 비틀림 때문에 초월급 이상의 마물들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네놈이, 직접, 말했다.”
“맞다, 그랬지…….”
자신을 노려보는 검제의 살벌한 눈빛에 뜨끔해진 타이니는 시선을 바로 허공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네 빡대가리는 정말…….”
“아니, 깜빡할 수도 있지!”
“하, 아무튼 조치해 놓을 테니 일단은 지켜보자. 당장은 연합군 구성에 대한 확답을 받고 인류의 정예들을 오렌 평야 쪽으로 모으는 게 먼저다. 그 안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그…….”
“또 뭐? 설마 벌써 문제를 만든 거냐?”
“아니, 그건 아니고. 그 성기사 놈 때문인지, 교황이 자꾸 만나자고 하는데…….”
“미뤄라. 지금 네놈의 정신 상태로는 괜한 분란을 일으킬까 두려우니.”
“아니, 내가 그리 생각 없는 망나니로 보이시나?”
“더한 놈이지.”
“하…….”
한숨을 쉰 타이니였지만, 일단 검제의 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사흘 뒤.
대륙의 모든 종족과 나라의 대표 혹은 대변인이 모인 인류 연합군 회의에서…….
설마 했던 문제가 생겼다.
* * *
중앙 신전 솔의 대예배실.
신전이 타락하기 전, 여신교가 온 대륙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던 무렵에는 각국의 왕들이 모두 모여 새해 예배를 드렸다는 거대한 대전.
단상 뒤쪽으로는 교황과 사제들이 자리하고, 부채꼴로 펼쳐진 계단 형식의 좌석에는 각기 다른 나라와 종족의 사절들이 구역별로 모여 있는 모습은 그 시절과 같았다.
하지만 정작 단상 위에서는 사제가 아닌 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제는 대략 80일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엘프와 오크, 제국과 왕국 연합의 정예들은 이미 오렌 평야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테르티우스도 이제 막 동의했지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지휘 체계 일원화에 대해 논의를…….”
조용한 대전에 울리던 검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렌 평야를 강림의 예정지로 지목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공작 각하?”
신전 측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희 황실 마탑에서 강림의 예정지를 지목했습니다. 예정일을 알아낸 아티팩트, 차원 관측기의 효과이기도 하지요. 답변이 되었습니까, 사제님?”
만약 황실 마탑주 티네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사실 오렌 평야를 지목한 것은, 타이니의 경험담을 듣고 황제의 허가를 받아 말을 맞춘 결과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대외적으로 설득력을 담보하기 위해선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전에서 전해 내려오는 예언에 비추어 보면 문제가 좀 생길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제님?”
검제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눈썹을 찌푸리는데, 교황의 눈짓을 받은 상급 사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상급 사제 오르테가입니다. 최근에 내려온 ‘신탁’은, 강림의 순간에 인류의 정예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참석자들 모두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사제가 신탁을 거짓으로 입에 올리는 것은 중죄.
그러니 사제라면, 아니 사제일수록 신탁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심지어 그것이 아무나 될 수 없다는 상급 사제라면, 특히나 ‘젊은’ 상급 사제라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허튼소리를 할 수 없는 것이다.
“뭐야, 신탁? 그럼 여신께서 경고하신 거 아냐?”
“이 시국에 갑자기?”
“이 시국이니까 그럴 수도…….”
자연히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바로 그 소란을 뚫고 힘 있는 목소리가 다시금 대전에 울려 퍼졌다.
“신탁이라니요?”
반문하는 검제의 시선은, 지금 발언한 오르테가가 아니라 얌전히 앉아 있는 교황 센티널 3세를 향하고 있었다.
거리가 좀 있다고는 하나, 오러유저인 그가 사제들의 눈짓 하나 잡아내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 그대로입니다. 성하께서 직접 신탁을 받으셨지요. 그러니 가능하면 오렌 평야에 연합군 정예 전부가 집결하는 것은 취소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움직이고 있는 각국의 군대를 철수시켜라?”
황당함이 묻어나는 검제의 반문에도 오르테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아예 철수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산은 시킬 수 있겠지요. 적어도 한곳에 인류의 정예 대다수가 모여 있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저희 신전의 입장입니다.”
“전력을 한데 모아도 부족할 판에 분산시켜라? 정말 그게 신탁이 맞습니까?”
여전히 검제의 시선은 교황에게 고정되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신탁을 받을 수 있는 자는 교황 아니면 성녀뿐일 터.
그리고 신탁을 허언으로 공표했던 타락 교황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역사에 대한 상식이 있는 자라면 다 알고 있었으니까.
검제의 시선은, 거짓이 아니라면 당신이 직접 말하라는 압박이나 다름없었다.
“감히…….”
“저런 무도한…….”
다수의 고위 사제들이 불쾌감을 표하고 오르테가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교황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습니다, 발렌티아 공작. 여신께서 부족하신 이 몸에 신탁을 내리셨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교황의 발언.
그 반향은 컸다.
“진짜……!?”
“하. 역시, 여신께서도 지켜보고 계시겠지.”
“암, 그래야지.”
그 말에 놀란 분위기가 급격히 확산되자,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검제가 대전의 한구석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뜻을 전했다.
- 어떻게 된 거냐?
그 시선을 받은 타이니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내.
[거짓말이야, 영감! 저 미친 대머리 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요. 신성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조금씩!]
메시지 마법을 흉내낸 전성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타이니는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신탁을 받았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교황의 신성력이 살짝 줄어드는 것을.
미친 교황 놈이, 스스로의 미래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인류 연합군에 태클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 메시지에 검제의 안색은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좌중들의 혼란은 더 커질 뿐이었다.
“정말이네?”
“허, 그럼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분산시키는 게 맞지 않을까?”
“여신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는데.”
웅성웅성.
그런 목소리들이 점차 커져 가자, 타이니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감히 저 대머리 새끼가…….’
상황이 상황이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참으려 했지만,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들부들.
콰드득.
그가 잡고 있던 의자의 팔걸이가 그대로 깨어져 나가며 주변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 진정해!
- 지금 사고 치면 안 된다.
그와 동시에 눈이 마주친 동료들이 눈빛으로 그를 만류했다.
전성을 쓰지 못하는 동료도 있었지만, 그들의 뜻도 표정만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오러익시더급의 경지와 카일룸의 바람 속성의 힘으로 전성을 쓸 수 있는 에스티나는, 아예 직접적으로 육성을 전하고 있었다.
[타이니, 지금은 안 돼. 참아. 신탁 얘기가 나왔으면 무슨 말을 해도 안 먹힐 거야. 나중에 우리가 조율할 수 있어.]
그런데.
“뭉치면 안 된다? 연합군이? 그럼 어떻게 마족을 상대해야 합니까?”
“오렌 평야 한군데 뭉치기보다는 근방의 여러 곳에 정예를 분산시켜 놓고, 정말로 강림의 장소가 확정되는 순간에 진군을 시작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강림의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타격을 가하는 것이 좋다고, 이미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요.”
“말씀드렸듯, 저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여신의 뜻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자꾸만 타이니의 화를 부추기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마다하고, 차선을 택하자?”
“한군데에 모여 있다가 최악의 희생을 만드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공작.”
“최악의 희생이요? 그게 말이…….”
검제와 교황의 눈빛이 치열하게 부딪치고.
“여신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면…… 따라야 하지 않나?”
옆자리에서 국가 사절이라는 자의 헛소리가 들리는 찰나.
‘별 도움도 안 됐던 신전 따위가 지금…….’
결국 타이니는 폭발하고 말았다.
쾅!
“대머리, 진짜 미친 거냐!? 본인을 희생하면서까지 인류를 말아먹을 생각이냐고!! 제정신인 거 맞아!? 마족에 홀린 거 아니고!?”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고함.
“미친놈아…….”
“결국…….”
“하…….”
그것을 듣고 있는 오러유저들 모두가 얼굴을 감싸 쥐고.
대전의 모든 시선이 타이니에게로 몰려드는 가운데.
챙!
“감히!”
“감히 성하께!”
“저런 무도한 자를 보았나!”
대전을 호위하고 있던 성기사들 대다수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검을 빼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