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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281화 (281/500)

281화. 모여든 영웅들

중앙 신전 솔(Sol) 내부의 최귀빈실 안.

아르곤의 은폐 장막과 타이니의 오러 장막, 그리고 에스티나의 바람 장막까지 일시에 일행을 뒤덮은 상황에서, 타이니의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상이 제가 전생에 겪었던 일입니다만, 제 시점의 이야기일 뿐이니 각자의 사정은 알아서 추론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타이니에게 한 번씩은 들었던 이야기.

하지만 세상의 위기를 막기 위해 이곳에 모여 있는 상황에서 다시 들으니, 새삼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듯했다.

“몇 가지 변수가 있었지만, 여기 계신 분들의 협조 덕에 다행히 전생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물론 강림의 시간이 십수 년이나 당겨졌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최악은 아닙니다.”

그 말에 그리드의 얼굴에 바로 쓴웃음이 번졌다.

“우리 왕국 연합에 그런 재앙이 벌어졌는데도…….”

“그래도 전생보다는 상황이 낫습니다. 제국이 반파되고 처참한 전쟁과 반복되는 테러나 사고의 후유증으로 연합마저 골골대던 그때보다는요.”

“추정 100만의 사람이 죽었는데도?”

“예, 훨씬 적은 겁니다. 연합으로만 한정하더라도.”

타이니의 확고한 대답에 좌중의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몇 가지 재앙을 겪고도 인류의 저력은 건재하니, 연합군만 제대로 구성된다면 훨씬 나은 상황에서 마계의 공세를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그……. 군단장, 칠죄종이라는 것들이 정말 9단계, 반신급의 존재이던가? 오러나 그 이상의 공격이 아니면 아예 상처도 입지 않는? 그리고 사람을 노려보는 것만으로 죽일 수 있다는 그런 괴물?”

“예, 틀림없습니다. 물론 겪어 본 것은 글러터니뿐입니다만…….”

“그럼 그 위에 있다는 마왕이라는 것은……?”

조용히 이어지는 그리드의 반문.

- 정말 신이라도 되는가?

그 뒤에 생략된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자연히 깔린 무거운 침묵에 타이니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맞닥뜨려 봐야 알겠지요. 최상의 경우를 가정하자면 글러터니보다 조금, 아주 조금 더 강할 수도 있고요.”

비록 그 글러터니 하나와 싸우는 과정에서 여기 있는 모두가 죽었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저와 여러분 모두가 어떻게든 더 강해져야 합니다.”

“흠. 왜 그런 놈이 가장 먼저 나오지 않고…….”

걱정을 감추려는 듯 거칠게 내뱉은 저릭의 말에 대답한 것은, 의외로 잔뜩 위축되어 있던 아르곤이었다.

“차원의 벽이 완전히 뚫려도, 반신급 존재부터는 쉽게 지나올 수 없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음?”

모두의 시선이 아르곤에게 몰리자, 그가 다시 창백해진 안색으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제, 제 의견이 아니라, 저희 현자의 마탑에서 보유한 고대의 기록에 적힌 사실입니다. 예, 고대의 기록이요.”

신뢰도가 급격히 하락하는 자신감 없는 표정이었지만, 다행히 검제가 그 뒤를 받았다.

“제국의 황실 마탑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강림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 역시 그와 같을 것이라는 보고와 함께 말이죠.”

“반신급 존재가 일곱에 그들의 수장인 마왕까지……. 그렇다고 그 밑에 있는 마족이나 마물들이 약한 것도 아니고…….”

한숨과 함께 나온 그리드의 푸념을 타이니가 다시 받았다.

“8단계 극의에 도달한 괴물, 이른바 장군급이 마수병단 하나에만 일곱이 존재합니다. 그들이 둘씩 거느린 부장들 역시 8단계니, 악마급 괴물만 스물하나. 그 밑의 7단계급 괴물들의 수는 정확히 안 세어 봤습니다만, 백은 훨씬 넘을 겁니다. 나머지 마물들은 수십만에 달하니 세는 것도 의미가 없고요.”

하급 마물도 사람 하나는 쉽게 죽인다.

마물의 군대 수십만을 언급하는 타이니의 말에는 그야말로 좌중을 압도하는 무게감이 있었다.

거기다.

“반신급 하나에 악마급 마족만 스물하나. 초월급 마족만 백이 넘는……. 그런 군단이 6개가 더 있다고? 그 마왕 말고도? X발…….”

저릭의 투정이 아니더라도, 그것들을 숫자로 하나하나 언급하고 나니 정말 재앙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자연히 아르곤의 고개가 팍 수그러들고,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뭐, 버거우면 안 싸울 겁니까? 왜들 쫄아 있어? 이건 내가 아는 10대 기사의 모습이 아닌데?”

타이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침묵을 뚫고 울려 퍼졌다.

그것이 자극이 되었을까.

“흥, 당연히 아니지. 도끼질을 몇 번 해야 다 때려죽일 수 있을지 세고 있었다. 대충 수십만 번 정도면 되겠지.”

바로 저릭이 콧바람 소리를 내며 허풍 가득한 허세를 부렸고, 검제 역시 단단한 얼굴로 말을 보탰다.

“뭐, 우리만 싸우는 것도 아니지요. 이제부터 온 인류가 힘을 합칠 테니까.”

“우리 엘프 역시 연합에 최대한 협조할 것임을 약속드리지요. 적어도 마수병단의 공중 병력은 저희가 다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뭐, 진짜 일이 벌어진다는 가정하에서 말이지만, 지하의 마물들은 우리 테르티우스에서 감당할 수 있다.”

“우리 왕국 연합과 웨어비스트, 제국이 힘을 합치면 하급 마물들 따윈 몇십만이 쏟아지든 막아 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하오.”

뒤이어 에스티나와 하이넨, 그리드까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뱉으며 장내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혹시나 쫄리면 다른 사람은 다 뒤로 빠져 있으라고. 칠죄종이든 마왕이든 어차피 내가 다 때려죽일 테니까.”

사나운 웃음과 함께 내뱉은 타이니의 도발적인 언사가 그 말을 듣는 모든 이의 입가에 비슷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오러는 종의 한계에 끝없이 도전해서 결국 그 경계를 넘어선 사람에게만 허락된 권능이니.

“흥, 네 무거운 망치가 움직이기 전에 내 검이 먼저 마왕의 목을 칠 거다.”

“저도 각하의 검에 감히 한 손 보태겠습니다.”

“그래, 내 도끼가 놈의 머릴 쪼갠 다음에 말이지.”

“활이 제일 빠른 거 다들 모르시나요?”

“뭐, 진짜 그 일이 벌어진다면 말이지만, 내 망치나 도끼도 자네들 못지않지.”

“당신들 무기, 난 전부 잘 다룰 수 있다는 거 다들 알고 있을 텐데?”

한순간에 끓어오르는 오러유저들의 투기에 방 안이 후끈 달아올랐다.

물론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다 미친 거 같아.”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는 아르곤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이후부터 대화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고.

마침내.

“인류 연합의 구성이나 세부 사항들은 소속 없는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겠지만, 뭐 문제없겠죠?”

“당연하지. 여기 있는 모두가 연합군 결성에 확실히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 무시 못 할 만한 큰 변수는 생기지 않을 거다. 그럼 다른 문제는…….”

“우리끼리 합을 맞추는 연습을 해 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고위 마족들을 최대한 피해 없이 잡을 수 있도록.”

“그거야 다들 시간이 나야 말인데…….”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해 보자는 거죠. 제일 좋은 건 모두가 오러익시더 경지에 올라서 영역의 동조를 쓰는 건데…….”

타이니의 그 말에, 저릭과 에스티나를 제외한 모두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중에서도 타이니의 시선은 검제를 향해 있었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하겠지만, 그들 중 전생에 오러익시더였던 자는 검제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얼추 방향은 보인다. 최대한 노력해 보지.”

“오?”

벌써?

생각지 못한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는 네놈은?”

“나야 시간문제니까 걱정 마세요, 영감님.”

“영……? 후, 저 주둥이를 그냥.”

검제가 짜증스레 그를 노려보았지만, 타이니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실제로 오러바디를 완성한 이후 오러도 정령술도 거의 7단계에 극에 도달했다는 것을 스스로 체감하고 있었으니, 계기만 있다면 바로 오러익시더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에 검제가 혀를 차며 화제를 돌렸다.

“씁. 그럼 회의 동안이라도 최대한 합을 맞춰 보는 걸로 하고, 혹시 타이니에게서 아직 미래의 전투 기술에 대한 설명을 다 못 들으신 분들은 이 녀석과 좀 더 대화를 나눠 보시죠. 그리고 각 세력의 수장분들은 오렌 평야의 병력 배치에 대해서 의논해 봅시다.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오렌 평야.

제국 남부의 평야 지대로, 전생에 마수 병단의 침입로가 되었던 거대한 차원문이 열렸던 장소였다.

그 장소를 미리 선점하고 화력을 퍼붓는 것이 계획의 골자.

그것은 일이 잘 풀린다면 마수병단만큼은 최소한의 손실만으로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관측의 근거이기도 했다.

놈들이 나타나는 족족 인류의 총력이 그대로 박살 내 버린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미 합의가 된 나라나 종족의 정예들은 벌써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잘돼야 할 텐데…….”

의논을 시작한 각 세력의 장들을 보면서 타이니가 나직이 중얼거릴 때.

“혹시라도 잘 안 되면?”

여태 조용하던 겁쟁이가 갑자기 초를 쳤다.

자연히 타이니의 살벌한 시선이 그에게로 쏘아졌다.

“네놈 입 때문이니까, 그대로 꿰매 버릴 거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니 닥치라고.”

“아, 아니, 내 말은 혹시나, 아닐 수도 있잖아. 바뀌었을 수도…….”

“응?”

“강림의 시기가 바뀌었다며? 근데 장소는 그대로일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겁쟁이의 괜한 노파심에서 나온 발언일 수도 있지만, 그 말에 타이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냥 흘려듣기엔 일리가 있었으니까.

“어……?”

씨X, 진짜 그러면 곤란한데? 그렇다고 전력을 분산해 놓을 수도 없고…….

타이니가 순간 혼란에 빠져들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은발의 기사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괜찮습니다, 타이니 경. 각하께서도 다 생각하셨던 문제니까요.”

“아, 제나스 경?”

“어차피 연합군이 모일 장소는 필요하잖아요. 혹시나 강림의 장소가 바뀐다 하더라도, 오렌 평야는 대륙의 중심이니 어디로든 전력을 파견하기 좋은 위치입니다. 적어도 어처구니없이 뒤통수를 맞지는 않을 겁니다.”

“아…….”

그 말에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마치 일이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을 거라는 예언처럼 들렸으니까.

* * *

“결국 그는 저를 만나러 오지 않는군요…….”

인류의 총의가 모이고 있는 이곳 신전의 주인, 교황 센티널 3세가 그리 말하며 한숨을 짓자, 크롬벨이 굳은 얼굴로 말을 받았다.

“본인이 걸리는 게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광휘의 기사. 그자는 운명의 변수가 확실합니다, 성하.”

“예?”

교황의 놀란 심정과는 상관없이, 교황을 독대하는 크롬벨의 말은 담담하게 이어졌다.

“한동안 함께해 본 결과, 확신했습니다. 그자가 시간을 거슬러 와서 운명을 바꾼 겁니다. 그럼으로써 예언을 틀어지게 만든 거죠. 괴물 같은 힘도 그 결과로 얻은 거겠죠.”

“하지만 광휘의 기사는 대륙에 벌어진 재앙을 막아 내고 악마추종자들을 끝장낸 영웅입니다. 이번에 마족을 막아 낸 데에도 그의 공이 컸다고, 크롬벨 님이 직접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하지만 고대에도 그런 자가 있었습니다. 솜누스, 그 이름을 들어 보셨을 텐데요? 적어도 우리 신전에서는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어야 하니까요.”

“인류의 배반자…….”

“예, 그자의 행동이 지금 광휘의 기사와 같았습니다.”

잠시간 자신과 대치하던 그 말도 안 되는 힘의 소유자.

웬만한 몬스터나 마족을 육체만으로도 압도할 것 같던 그 검은 머리 기사를 떠올리자, 크롬벨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찌 여신의 축복도, 신룡의 축복도 받지 못한 인간의 육체가 그런 힘을 가질 수가 있을까. 분명히 더러운 수를 썼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고대, 모든 신비가 살아 있던 그 시절에도 최고의 재능을 뽐냈던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여신의 축복과 신룡의 축복까지 받은 몸으로 그자에게 육체적으로 밀린 것을 어찌 설명할까.

하지만 교황은 크롬벨의 말에 놀라서 그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

“여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시간을 거스르고, 세상의 재앙을 물리치는 척하며 인류의 총의를 모은 영웅이 되었던 자. 그리고…….”

“그런 인류의 절반을 제물로 바쳐 ‘거듭난 자.’”

신음처럼 나온 교황의 말에 크롬벨이 싸늘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습니다. 그 이름처럼 이뤄지지 않을 꿈을 꾸다가 칠죄종의 나태가 되어 버린 자. 광휘의 기사도 그자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하.”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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