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드워프의 정예
달그락.
남부 산맥의 비탈길을 따라, 100명이 넘는 기마 병력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나아가고 있었다.
전신 갑옷과 마갑, 창과 방패, 도끼까지 모두 햇빛을 받아 영롱한 푸른빛을 번뜩이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무구임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닌 백여 명 모두가 그런 무구를 장착하고 있는 데다가 소리도 없이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고 있으니, 절로 사방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풍겨야…… 할 텐데…….
“……귀엽네.”
뒤를 돌아본 아르곤이 툭 하고 던진 말에 타이니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드워프들이 딱 자기들보다 살짝 크고 머리에 작은 뿔이 달린 말을 타고 진군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가진 무력을 대충 알고 있음에도 인간의 눈으로 보면 장난감 병정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뭐, 직접 싸워 보면 작은 악마들이라 생각하겠지만.’
드워프의 정예들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막강한 힘과 체력, 그리고 강력한 아티팩트 무구들을 기반으로, 비슷한 수의 오크나 수인족들까지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전투력을 자랑한다.
엘프와 같은 요정의 후예로, 머릿수가 적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인 군대.
그리고.
“……그 귀여운 이들하고 한판 붙어 볼 테냐? 꼬마야?”
그들의 말 한마디에 눈에 불을 켜는 이 드워프 노인처럼, 한 성깔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드워프가 인간에게 꼬마라고 부른다면 보통 헛웃음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그 사람이 드워프들의 수장이자 두 가지 초월무구의 주인인 오러유저라면 그럴 수가 없었다.
심지어 2m짜리 강철 거한의 모습으로 살벌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면 말이다.
“아, 아뇨! 너무 머, 멋있어 보여서, 말입니다!! 하, 하. 하.”
“원한다면 말만 하거라. 언제든 드워프 전사의 ‘귀여운’ 도끼 맛을 보게 해 줄 테니.”
“아, 아니. 저 그게…….”
야, 좀 도와줘!
하이넨의 엄포에 입술을 파르르 떤 아르곤이 황급히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옆을 쳐다봤지만, 타이니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자주 욱하기는 해도 뒤끝은 없는 성격의 하이넨. 그가 나름대로 농담을 건넨 거라고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지금 타이니가 골몰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아르곤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저 녀석이 문제인데…….’
강림의 시간이 임박한 지금이었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전생과 달리 제국도 멀쩡하고 오크족, 연합, 엘프족까지 저마다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유일하게 걱정되는 것은 악마급을 상대할 초인 전력뿐.
‘나야 부족한 경지라 해도 전생보다 떨어지진 않으니.’
아직 오러를 쓰지 못하는 아르곤과, 익시더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검제의 무력 정도만이 걱정될 뿐이다.
검제의 성장에 자신이 더 이상 관여할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아르곤 정도는 가능하겠지. 아니, 가능해야만 해.’
뭐, 듣자 하니 제나스 경이 결국은 오러유저가 되었다는 희소식도 있었고.
전생에는 뭘 했는지 마수병단과의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나 겨우 튀어나왔던 용사라는 작자가 벌써 나타나기도 했지만.
찌릿.
“솔에 도착하면 교황 성하부터 뵙기로 한 것 잊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타이니 경.”
제나스 경은 몰라도, 저 재수 없는 놈에게 등을 맡길 자신은 없었다.
역시나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가 직접 겪은 동료들뿐이다.
그러니 반드시 아르곤이 오러를 쓸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100일 안에.
“그러니 드워프 정예들과 대련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뭐!?”
“뭐, 일단은 연합군 회의가 끝난 다음에 시간을 잡아 보지.”
지금부터 죽도록 갈구기 시작하면 분명히 무슨 수를 써서든 튀려 할 테니까, 절대 도망치지 못할 곳에서 말이다.
“아, 아니 잠깐. 무슨 대련? 왜 네가 멋대로……?!”
아르곤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채, 타이니는 다시 피식거리는 하이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말이, 그 엘로랑 품종인가?”
드워프들이 타고 있는 작고 뿔난 말들을 가리키며 묻자 하이넨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우리 드워프들의 친구이자 자랑이지.”
그리 말할 만했다.
전설 속 유니콘의 후예로 크기가 너무 작아 다른 종족이 타긴 어렵지만, 지구력과 속도와 힘에 있어서 인간이 타는 어떤 명마보다 뛰어나다는 테르티우스산 기마.
하지만 저 말 역시 강림 직후에는 거의 사라지고, 그 탓에 드워프 전사단의 무력도 급감하고 만다.
“테르티우스 밖에도 목장을 하나 만들어 놓는 게 좋을 거야.”
“뭐?”
“자칫하면 몰살당해서 대가 끊긴다.”
“그럴……! 아, 그건가? 흥. 참고하지.”
고함을 지르려던 하이넨이 슬쩍 옆의 눈치를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사 앞에서는 입을 조심해 달라는 부탁을 상기한 것 같았다.
피식.
“이젠 확실히 내 말을 믿고 있나 보네.”
“뭐, ‘일단은’ 믿기로 했다.”
찜찜한 표정으로나마 다짐하듯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하이넨의 모습이 자연스레 과거, 아니 미래의 추억을 소환했다.
- 영감, 머리가 너무 커서 오히려 자연스럽다.
- 갑자기 뭔 소리냐, 곰탱아?
- 봐 봐. 비율이 딱 맞잖아. 어깨 좀 넓은 인간 전사 같아. 나보단 좀 작지만 말이야. 하지만 실체는 대갈 전사.
- 대갈……? 이, 이 쌍눔의 시키가!!
그 터무니없는 직감 때문에 저지른 뻘짓으로 동료들을 개고생시켰을 때, 풀 죽은 하이넨을 기운 차리게 만들어 주던 타이니만의 방식.
동작에 작은 위화감도 없이 날아들던, 오러가 실린 금속 주먹의 추억.
“왜 그렇게 보냐? 찜찜하게.”
“아냐. 일 봐.”
그렇게 툭 던진 말에 하이넨의 얼굴에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하, 진짜……. 이 싸가지없는 놈아. 너 그 반말, 아무한테나 하냐? 너랑 나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알기는 하지?”
“어, 동료니까.”
“뭐?”
“전투 중에 길게 말하다 뒈지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그건 그렇긴 한데. 제엔장!”
납득하기 싫은데 납득해 버린 듯한 표정.
이내 그가 타고 있는 마병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돌아서는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다시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사실 저 기갑 마병, 테그멘(Tegmen)은 원래 그런 초월무구였다.
탑승자의 육체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강력한 금속의 거인.
타이니의 시선이 테그멘의 주무장인 망치와 도끼, 석궁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하이넨의 왼쪽 팔에 달린 원통형의 구멍 뚫린 금속 막대를 향했다.
‘저것도 그렇고.’
테그멘과는 또 다른 초월무구, 불벼락.
다수를 상대할 때는 저만한 무기도 없었다.
드워프의 장인들이 고대에 만들어 낸 최고의 초월무구와, 현대에 만들어 낸 최고의 초월무구.
그 두 가지는 덩치도 작고 오러유저에 불과(?)한 하이넨의 전투력을 10대 기사 중에서도 상위권에 자리매김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으니.
‘탐난단 말이지.’
테르티우스에서 남는 초월무구가 없는지 털어 볼 걸 그랬나 싶은 마음이 절로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아서라. 초월무구 많다고 꼭 좋은 건 아니니까.’
이내 타이니는 그 때문에 발전이 멈춰 버렸던 웨폰 마스터 그리드를 떠올리며, 그 욕망을 털어 냈다.
등과 어깨, 발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감은 애써 무시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하이넨이 살짝 멀어지자마자 쫑알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야, 뭔데? 왜, 네가 내 대련을…….”
“시끄러, 아르곤. 생각 좀 하자.”
“생각? 네가?”
“네가……? 너 이 새…….”
욱하는 순간 폭발할 듯 달아오르면서 다시 무거워지는 주변의 공기.
오러유저의 극에 오른 이의 감정과 속성에 주변의 마나가 그대로 반응하는 순간, 화들짝 놀란 아르곤이 빠르게 말을 몰며 뒷걸음질 쳤다.
“아, 아냐. 마, 말실수야. 그, 그래. 가끔은 머리도 써야지.”
후다닥 멀어지는 녀석.
‘하……. 저게 진짜…….’
씁.
순간 욱해서 큰소리를 냈는데,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타이니는 애써 기세를 억눌렀다.
‘……역시 지옥 훈련을 시켜야겠어.’
아주 빡세게.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그 생각을 하자마자 약간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디서 들어 본 말 같은데.”
착각일 것이다.
후.
억지로 시선을 돌리는 아르곤을 보며 콧김을 뿜어낸 타이니가 점차 가까워지는 돌산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초인 무력에 대한 문제를 제외하면, 당장 눈앞에 닥친 가장 중요한 거사.
최초의 인류 연합 회의.
전생에는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뭉쳤던 인류가, 이번에는 재앙이 벌어지기 전에 모였다.
모든 나라, 모든 종족의 중립 지대라 할 만한 곳으로.
“중앙신전 솔…….”
회귀한 직후에는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신전의 세력.
그러나 이제는 조금의 찜찜함만 남아 있을 뿐, 그들에 대한 두려움은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계속 외면하고 있었다 보니, 신전에도 바뀐 역사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직시하게 되어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신전 혈사, 쇄신 운동. 그래, 원래는 십 년은 더 뒤에 악마추종자의 난을 겪고 나서야 일어났을 일이야.’
그 당시 피 보라가 몰아쳤던 신전은 결국 강림이라는 재앙에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었다.
그저 각지의 신전 사제들에게 자율적으로 연합군을 도우라는 명을 내렸을 뿐.
그리고 중앙 신전 본단의 정예들은 마수병단 다음의 강림이 예고된 후에나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작 ‘스무 살짜리’ 용사와 성녀를 앞장세우며 말이다.
‘맞아, 그래서 전선 전체에 화제가 됐었어. 확실해. 그때 스무 살이었는데.’
이제야 기억이 확실해졌다.
전생의 그 용사처럼, 지금 저 성기사도 자신이 스무 살이라 말했다. 물론 눈에 담긴 세월은 그 몇 배 이상일 것이라 짐작되었지만 말이다.
아득한 세월을 겪어 왔음에도 건재한 성기사라면…….
그래, 비슷한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갓 핸드…….’
그라면 저 찜찜하고 수상한 용사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쳤다.
자신을 회복시키고, 대신 글러터니에게 죽은 동료.
그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투구를 벗은 얼굴을 보지 못했던 동료.
마족을 상대할 실력과 의무감, 그리고 그 희생정신까지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묻는다고 대답해 줄 사람이 아니지.’
용사가 여신교의 사람인 이상은 말이다.
더구나 그것을 묻기 전에 신뢰를 쌓는답시고 시간을 거슬러 온 사실을 밝힌다면, 여신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오히려 자신에게 칼을 휘두를 가능성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갓 핸드에게 용사의 정체를 묻는 것은 일단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놓는다.
그보다 앞서 해야 할 것은.
‘연합군의 결성과 강림 예정지를 향한 병력 집결.’
아마 검제가 알아서 판을 짜 놨겠지만, 혹시나 다른 변수는 없을지 고민해 봐야 했다.
자신의 부족한 지식으로 생각해 봐도 수많은 나라와 종족이 단기간에 일사불란하게 힘을 모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테니까.
‘전생에도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부랴부랴 합쳤지. 어쩔 수 없이.’
그러니 아무리 재앙이 임박했다 한들 잡음이 나오리란 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선 머리 좋은 동료들에게 다 맡기고 수련만 하고 싶었지만.
‘똑똑한 사람도 간혹 실수를 한다.’
그러니 어쩌면 오히려 자신 같은 사람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보는 눈이 다른……. 그래,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간혹 똑똑한 이들보다 좋은 계획을 낼 때도 있는 법이니까.
‘무슨 일이 생길까……?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뭘까?’
그렇게 혼자서 고민을 거듭하는 타이니의 모습 뒤로.
한 성기사의 차가운 시선이 계속해서 따라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