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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278화 (278/500)

278화. 가자!

셋을 제외한 모두가 집무실을 나선 직후.

우우웅.

타이니의 몸에서 일어난 노을빛 오러가 일순간 옅게 퍼져 나가며 그와 하이넨, 요한나를 감싸는 거대한 구형의 보호막을 형성하자, 두 드워프의 얼굴에 동시에 경탄의 빛이 떠올랐다.

“정말 오러! 역시…….”

그저 감탄하기만 하는 요한나와는 다르게.

“오러를 이렇게 옅게, 그것도 방음용으로만 펼친 건가? 대단하군그래.”

하이넨은 타이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선보인 그 기예가 얼마나 정교한 것인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강림이 일어나면 테르티우스가 첫 번째 타깃이 될 겁니다.”

바로 이어진 말에는 콧방귀를 뀔 수밖에 없었다.

“흥. 마족들도 우리 드워프들의 강력함을 알 테니 당연하겠지. 뭐,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말이네.”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하이넨이었지만.

“처음에는 인류의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중심이 될 수 있는 곳이니 당연히 먼저 습격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폐쇄적인 도시라서 반응이 굉장히 느리기도 했고.”

“그럴 가능성도…… 음? 그런데 자네 말이 좀 이상한데? 처음에는?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고 다음 강림이 예고된 뒤에는 진실을 알게 되었죠. 땅을 마기로 오염시키는 지하 마물들의 땅굴을 역추적해 보니, 그 근원이 테르티우스의 광산으로 향하고 있었거든요.”

타이니의 말이 이어질수록 하이넨의 표정은 이상하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자네, 어디 아픈가? 그…… 재앙을 일으킨 마족과의 전투에서 머리를 다쳤다거나?”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의 입장에서야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니 타이니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대륙에 인간이 살 땅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 그 마물들의 둥지를 폭파하겠다며, 만류하는 우리들을 뿌리치고 홀로 다시 테르티우스로 향했지.”

“……뭐?”

“고대부터 이어진 자멸 시스템이 있다면서 말이야. 그리고 실제로 당신이 떠난 얼마 후에, 대륙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며 지하 마수들 대다수가 소멸했어. 가치 있는 죽음이었지만, 우리 중 누구도 웃지 못했지.”

“아니, 지금 무슨 헛소…… 자멸 시스템?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그게 진짜예요!?”

하이넨의 눈이 두 배로 커지는 순간, 듣고 있던 요한나 역시 부릅뜬 눈으로 그와 타이니를 빠르게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고비겠구나.

타이니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최대한 담담하게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난 곳은 강림 직후의 무법 도시 타란이었어. 그때 당신은 그곳에서…….”

듣고 있던 요한나의 눈동자가 점점 커질 때.

반대로 하이넨의 눈은 점점 가늘어지며 차가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은 하이넨만이 알고 있을 사실과 미래에 벌어질 일들, 그리고 10대 기사들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그럴 수가……!?”

요한나는 턱이 빠질 것 같은 얼굴로 타이니를 바라봤지만.

“흥, 그럴듯한 거짓이로군. 아무리 그래도 내 정안은 못 속이지. 인간의 애송이가 은근슬쩍 반말을 하는 것도 거슬리고.”

이 영감탱이가…….

하이넨은 아니꼽다는 듯 싸늘한 눈으로 콧방귀를 뀌고 있었다.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나 어림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하이넨 님! 앞뒤가 다 맞잖아요! 그리고 제 느낌에는 다 진실이라고요!”

하이넨이 조카처럼, 딸처럼 아낀다는 도제이자 비서인 요한나가 펄쩍 뛰는데.

“그거야 네가 미숙하니까 그런 거다. 속지 마라. 그리고 네놈, 사실 광휘의 뭔가도 아닌 거 아냐? 사칭이지?”

오히려 하이넨의 전신에는 ‘갈색의 불길’ 같은 오러가 일렁이더니, 타이니의 노을빛 오러를 뚫고 방구석에 있던 거대한 갑옷, 테그멘을 향해 뻗어 나갔다.

아니, 뻗어 나가려 했다. 누군가의 방해만 없었다면.

“이 망할 노친네가!”

뻑!

“억!? 요, 요한나!?”

별안간 두꺼운 책자가 뒤통수를 강타하자, 하이넨이 황당한 눈으로 요한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직감이나 정안 믿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예!?”

이, 뭐, 병…….

붉으락푸르락하는 요한나의 얼굴에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졸지에 머리를 얻어맞은 하이넨은 짧은 두 팔을 뻗어 뒤통수를 문지르며 억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니, 그래도 당최 말이 안 되는 소리에다…….”

“하이넨 님 비밀을 저분이 다 알고 있는 건 어찌 설명할 건데요!? 그 자멸 시스템은 나도 몰랐구먼!”

“그래도 내 직감엔 거짓인데…….”

“외부 상황하고도 다 맞아떨어지잖아! 그러니까 그 똥촉 믿지 말라고, 제발! 이 영감님아!! 내가 속이 다 썩는다고!”

하이넨과는 달리, 다행히 제대로 설득이 통한 요한나.

그런 그녀를 보고 타이니가 눈짓하는 순간.

그녀의 눈이 ‘아!’라고 하는 듯 살짝 커졌다가, 이내 거짓말처럼 촉촉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발 좀 논리와 이성으로 결정을 내리라고요, 하이넨 님. 진짜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요? 맨날 이래!”

“아, 아니. 나는…….”

“더구나 이런 급박한 시기에 혼자 어깃장 놓으면, 우리 종족만 왕따 된다고요!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정말…….”

우에에엥.

‘진짜 대단한데.’

요한나의 울음소리는 그야말로 결정타였다.

미리 연기를 요구했었던 타이니조차 순간 당황했을 정도로 순식간에 고여 흘러내리는 눈물.

평소에 쌓인 게 많긴 했나 보다 싶은 반응 속도였다.

심지어 여성 드워프 특유의 그 어린아이처럼 작고 귀여운 모습까지 더해지니, 하이넨은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이니는, 묘한 감상에 젖어 들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가끔 그 아이가 울 때면, 어쩌다 거짓 울음이라는 걸 알아도 마음이 타들어 가곤 했지.

- 절대 울리지 않고 활짝 웃기만 할 수 있게, 예쁘게 키우겠다고 약속했는데…….

전생에 서글픈 표정의 하이넨이 하던 말 중 일부가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었으니까.

“미, 미안하다, 우리 땅콩. 내가 다 잘못했어. 울지 마. 응?”

“우에에에에엥!”

“자꾸 그렇게 울면, 내가 저승에서 네 부모를 볼 면목이…….”

“우에엥, 끅? ……부모?”

잠깐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갸웃하는 요한나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던 하이넨이 이때다 싶었는지 바로 눈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내가. 그러니까 울지 말……. 뚝! 외부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내가…….”

“끅. 하이넨 님, 끅. 훌쩍, 우리 부모님 모른다면서요?”

“아, 아니. 몰라도 미안하다는 뜻이지.”

황급히 책상 위 작은 상자에서 얇은 종이를 꺼내 요한나의 코에 가져다 대는 하이넨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게 그 티슈(Tissue)라는 건가?’

드워프의 기술로만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얇고 부드러운 종이.

그것에 타이니가 시선을 빼앗긴 순간.

“킁! 아닌데……? 아는 것 같은데?”

“아니, 아니야 그건……. 아! 외부 사람 있을 땐 안 울던 애가 오늘은 대체 왜 그러니? 뚝! 너도 성인이 된 지 한참인데 아직도, 쯧쯧…….”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황급히 얼버무리는 하이넨과 뚱한 표정의 요한나 사이로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는데.

그 순간 바로 타이니가 끼어들었다.

“여기 요한나 씨도 테르티우스 함락 때 죽었다고, 당신이 말했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신이 간신히 길을 여는 동안 ‘불벼락’을 가지고 오다가 중상을 입었고, 초월무구의 반동을 장시간 견딘 후유증까지 겹쳐서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고.”

“개소리!!!!”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음성과 함께 다시금 하이넨의 전신에 갈색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땅’과 ‘불’. 하이넨을 상징하는 이중 속성의 오러가 그의 감정에 그대로 반응하여 솟구쳐 오를 때.

타이니의 노을빛 오러 역시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둘 사이의 공간에 파지직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 쓸모없는 정안 대신, 차라리 감정에 맡겨서 판단해 보라고! 정말 내 말이 거짓 같아?”

“……뭐?”

“그래도 거짓으로 생각하고 아무 대처도 안 한다면, 당신은 이번에도 조카 같은, 딸 같은 아이를 잃고 끝내 고향까지 잃게 될 거야.”

하이넨의 감정을 흔들어 놓은 뒤 담담하게 내뱉어 놓은 ‘진실.’

“흐…….”

그에 늙은 드워프의 갈색 눈이 크게 흔들렸지만, 솟구쳐 오른 갈색 불꽃 오러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걸로도 안 되면 그 뒤는 생각 안 해 봤는데…….’

똥 촉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하이넨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방법은 이게 전부였기에, 타이니의 인상 역시 굳어지는데.

그 침묵의 순간.

팽~!

“킁!”

코를 푸는 요한나의 모습을 본 하이넨의 긴 한숨과 함께, 솟구쳐 오르던 갈색 오러가 확 사그라들었다.

“……끙. 저 아이가 죽는다고 했나?”

“그래.”

“내 직감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아주 희박한 확률이라 해도 그건 감수할 수 없지. 좋아 일단은 더 들어 보겠네.”

하…… 진짜 똥고집은.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그 미래를 거쳐 이 시대에 와 있나? 솔직히 이건 정안이니 직감이니 하는 걸 다 떠나, 믿는 게 더 이상한 이야기일세.”

“그게…… 나도 황당한 일이었어.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시작된 타이니의 이야기는 한층 누그러진 분위기 속에서 좀 더 길게 이어졌다.

* * *

“정예들을 이끌고 내가 직접 국경으로 향하겠다. 그리고 이번에 있을 신전 회담에서 드워프의 대표로 참석하겠다.”

갑작스레 바뀐 하이넨의 태도에 테르티우스의 모든 드워프가 크게 놀랐다.

자신의 직감이 틀렸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전에는 한 번 내린 결정을 좀처럼 바꾸지 않던 그들의 첫 번째 망치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결과도 확인하지 않고 발언을 철회한 것이다.

거기다.

“간만에 속이 시원하네요. 자, 그럼 저희 테르티우스는 전쟁 물자 생산에 본격적으로 자원을 투입하겠습니다!”

실질적인 내정 담당자이자 하이넨의 비서 겸 도제인 요한나까지 신이 나서 거드는 순간, 드워프 장로회의 마흔아홉 망치는 거의 만장일치로 그 의견을 통과시켰다.

누가 뭐라 해도 백수십 년간 앞장서서 테르티우스를 지켜 온 수호자, 하이넨의 말은 드워프들에게 있어 절대적이었으니까.

그가 그 X 같은 촉으로 실정을 거듭할 때조차 첫 번째 망치의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는 사실은, 드워프들의 그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니.

“그럼 칼이나 인간형 갑옷도 많이 만들어야겠네.”

“창도. 우리 창은 인간들한테 짧다고 하더라고.”

“지들이 큰 거지. 씁…….”

장로회의 발표를 들은 드워프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빠르게 각자의 공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뚱땅뚱땅.

깡. 깡. 깡.

끼이이이잉.

배경음처럼 낮게 깔려 있던 망치질 소리와 금속을 연마하는 소리가 도시 전체에 점차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와우…….”

“대단한데.”

“정말 신기하긴 하군.”

- 테르티우스의 밤. 그 장인들의 노래를 너희들이 들어 봤어야 했는데.

“이게 장인의 노래…….”

본디 시끄러워야 할 소리가 테르티우스 내부의 소음 정제 장치를 거쳐 마치 음악처럼 도시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은 그야말로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살짝 찜찜한 느낌이 들긴 했다.

‘뭔가 잊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잠깐 고민해 보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금방 생각이 났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은.

‘강림에 대비하는 일보다 급박한 것은 없어.’

우웅.

등 뒤에 맨 녹턴이 마치 나직한 울음을 토하듯 진동하는 소리도 그 뜻에 동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3일 뒤.

“그럼 모두 출발한다!!”

쿵. 쿵. 쿵.

2m에 가까운 초월무구 기갑 마병, 테그멘을 탄 하이넨이 거대해진 체구로 드워프들의 정예들과 함께 테르티우스의 북쪽 입구를 나설 때.

그 옆에는 거대한 늑대를 탄 검은 머리 인간과, 드워프제 마갑을 입은 말을 탄 두 기사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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