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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275화 (275/500)

275화. 테르티우스

“또 협조 요청?”

“예. 이번에는 엘프 쪽입니다.”

“그 느림보들이 웬일로? 그치들도 진짜 마계 대전이 시작된다고 믿는 건가?”

새하얀 머리카락과 까끌까끌한 흰 수염을 자유롭게 방치한 늙은 드워프, 하이넨이 보고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 심지어 기간도 석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답니다. 각 종족과 나라의 대표들이 2주 뒤에 중앙 신전에서 모이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봤답니다. 우리만 빼고요.”

부관이자 도제인 요한나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어 가는데.

그 머리 위로 식겁할 만한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내 직감에는 아닌 거 같은데…….”

“아 쫌!!!”

쾅.

자신도 모르게 상관의 책상을 쾅 하고 후려쳤지만, 죄책감 따윈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죠? 제발 다른 일! 특히 외교적인 일에는 그 직감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사고는 혼자 공방에 있을 때나 치시라고요! 좀!!!!”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하이넨이 자신도 모르게 의자 등받이에 바짝 달라붙었다.

“아, 아니. 난…….”

그러다 자신의 추태를 자각하고는 헛기침을 하며 다시 애써 의젓한 자세를 취했다.

“커험. 진짜, 누가 들으면 내가 매일 사고 치는 줄 알겠네. 그리고 우리가 언제 외교를 신경 썼다고…….”

“남해 어부 연합에서 물량을 속인 것 같은 직감이 든다고 개소리를 해서 거래 끊길 뻔한 거 잊었습니까!? 고작 3주 전입니다! 3주!! 대륙으로 가는 해산물 유통 계약이 전부 파투 날 뻔했다고요!!”

“개, 개소리라니. 그래도 내가 상관인데…….”

“하이넨 님의 정안과 직감은 드워프 중에서 최하위니까 믿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야 압니까!? 진짜 신통하신 분들도 신중하게 점검하고 움직이시는데, 왜 어설픈 분이 그렇게 맹신을 하냐고요!”

“말을 너무 막 한다, 너. 내가 그래도 첫 번째 망치인데…….”

“이것도 순화한 겁니다!! 예!? 제 이마에 주름 안 보이세요!!? 늙어 보인다고 시집도 못 가고.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건 네가 노안…….”

“뭐요!?”

“아, 아니, 미안, 미안하다고.”

대번에 쭈그리가 되어 버린 하이넨은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잘못을 빌었다.

씩씩대던 요한나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히 다시 서류를 들이밀었다.

“아무튼 다른 종족이나 나라의 왕들이 다 하이넨 님처럼 철없지는 않으니까, 진지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고대의 마계 대전에서 부서진 테르티우스를 재건하는 데 걸린 시간만 해도…….”

“알아. 500년이었지. 매몰 복구가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그런데 그따위 헛소리를 해요?

요한나는 목구멍까지 솟구치는 고함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약 이게 공갈로 벌어진 사태라면 아스란 제국에서 전부 보상하겠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 건방진 인간의 황제가요.”

“……그래?”

“예. 그러니 전사단을 내보내고, 전쟁 물자 지원도 서둘러야 합니다. 그래도 솔직히 연합 훈련 따위는 할 시간도 없지만요. 어쨌든 자, 빨리 도장 찍으세요.”

이럴 거면 네가 그냥 첫 번째 망치 하지 그래.

불만이 솟구쳐 올랐지만, 하이넨은 감히 그것을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분명히 어릴 때는 귀여운 아이였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진심으로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는 떼구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생각해 보면 렌돌 그 친구가 아들을 데리고 떠났을 때, 그러니까 소꿉친구를 잃은 요한나가 사흘 밤낮을 울어 버린 후부터였던 것 같다.

‘그래. 그때부터 성격이 좀…….’

쾅.

“지금 또 딴생각하시죠? 이 시국에? 이 상황에? 하…….”

“아, 아냐! 절대!”

화들짝 놀란 하이넨이 다급히 손사래를 쳐 보지만, 요한나의 째려보는 눈길을 정면으로 마주 보지는 못했다.

“그…… 어떡하냐? 직감은 아니라고 하는데! 적극적으로 움직여지지가 않는다고. 그게 우리 본능이잖아!”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정안’과,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에 직접 닿게 만드는 ‘직감’.

드워프를 드워프답게 하는 예술적 재능의 근본이자 성품의 본질과도 같은 그 능력을 언급하는 말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하이넨이 한다는 게 문제였다.

요한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손바람으로 식혀 가며 가능한 한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후. 100년째! 착각을 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요. 하이넨 님은 그냥 싸움을 잘해서 첫 번째 망치가 된 거라니까요!! 예술적 재능은 눈곱만큼도 없잖아! 전사 출신이잖아! 왜 그런데 자꾸 천재 장인처럼 일상에서도 직감을 따라가는 건데!?”

결국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니, 그래도…….”

“제 눈을 보고 얘기하시죠.”

“……끄응.”

“얼마 전에도 집이 무너질 것 같다고, 대피하자고 하셨죠? 그리고 어떻게 됐죠?”

“겨, 결국 무너졌잖아!”

“예! 벌레가 보인다고 망치를 집어 던지셨죠!? ‘테그멘’을 타고 무려 오러까지 실어서! 그런데 어떤 집이 안 무너지고 배겨!?”

“지, 진짜. 벌레를 본 거 같은…… 아, 아니. 미안하다.”

연이은 팩트 폭행은 고집쟁이 드워프의 대명사인 하이넨에게도 결국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요한나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는데.

“……그래도 직접 나서진 않으실 거죠?”

“노, 노력은 해 볼게.”

눈을 마주치지 않는 하이넨의 태도에 그 답이 있었다.

“앓느니 죽지. 아 속 터져…….”

사실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태 열심히 씹어 대기는 했지만, 저런 결함을 가진 하이넨의 직감도 전투 시에는 그 누구보다 뛰어났으니.

‘그러니까 초인이 되었겠지만.’

전사단 출신으로서 직감에 의존하여 평생 테르티우스를 지켜 온 하이넨에게, 그 직감을 무시하고 행동하라는 말 자체가 삶을 부정하는 모순이었던 것이다.

즉 진짜 마계 대전이 터지기 전에는, 저 드워프의 첫 번째 망치이자 오러유저, 그리고 초월무구 기갑 마병 테그멘과 불벼락의 주인인 하이넨은 이 테르티우스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설령 헛소문이라 해도 아스란 제국을 뜯어먹을 수 있고 진짜라면 대재앙을 예방하는 일인데, 종족의 대표가 움직일 생각이 없다.

“제발 누가 하이넨 님 좀 설득해 줬으면…….”

그렇게 요한나의 한탄이 이어지던 그때.

테르티우스를 방문‘할’ 외지인들의 소식이 전해졌다.

현재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인간의 방문 소식이.

* * *

험준한 남부 산맥의 입구 격에 해당하는 성산 니두스를 서쪽으로 살짝 지나치면, 보통의 인간은 오르다 죽을 만한 높이의 거대한 산들이 동서로 쭉 이어진 본격적인 산맥이 시작된다.

단순히 높기만 한 게 아니라 수풀까지 우거져 있는데, 심지어 높은 지대일수록 오히려 산림이 무성해지는 고대의 신비가 어린 산맥.

대미궁의 입구인 끝없는 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숲속에서 사는 맹수와 몬스터들과 지형의 험준함을 생각하면, 남부 산맥을 넘어서 바다를 보는 일은 웬만한 인간들에게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도착한 남해가 대륙 서부의 마경보다 더욱 살벌한 마역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예 도전할 가치도 없는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남해에도 엄연히 소수의 인간이 살고 있다.

심지어 그곳엔 마역과 같은 남해의 바닷속에서 마물을 사냥하며 영양가 높은 해산물을 생산하고 보물을 찾아 헤매는, ‘남해 어부 연합’ 같은 단체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어부 연합이 생산해 낸 물품들이 대륙으로 들어올 땐, 남부 산맥이 아닌 그 아래에 있는 거대한 지하 도시를 통한다.

바로 드워프들의 도시, 테르티우스를.

“이곳이…….”

“테르티우스…….”

“여기가 테르티우스의 북쪽 입구다.”

“……드워프들은 여전히 변함이 없군.”

성기사가 또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감회 어린 시선을 던지자, 그를 흘기던 타이니가 애써 시선을 거두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남부 산맥의 어느 산의 중턱. 산의 일각을 통째로 깎아 만든 듯한 직각의 절벽은, 가운데에 갈라진 자국 같은 것이 나 있어서 마치 문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도 문이었다.

높이 50m, 너비 100m에 이르는 거대한 문.

드워프들의 ‘마공학’ 기술로 만들어진 천혜의 방벽이자, 테르티우스 내부로 연결되는 길.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안 열리는 거 아냐? 정해진 상단의 날 아니면 웬만해서는 안 열린다고 들은 거 같은데? 그 해산물 상단들 오는 날 말이야.”

아르곤의 말대로, 저 굳건하게 닫힌 문은 테르티우스의 성향을 대표하듯 웬만해서는 열리지 않았다.

물론.

“인류 연합에 가담하기로 한 모든 나라에서 내가 테르티우스로 간다는 소식을 전했을 거야.”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일행의 입성을 거부하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저들만의 세상에 사는 드워프들이라지만, 그들도 바깥세상에 대한 눈과 귀가 있을 테니까.

“아우…… 재수, 확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뭐 인마?”

“아, 아냐. 헛소리야, 헛소리. 여기까지 오는 데 워낙 힘들어서.”

지금 일행의 수준으로 남부 산맥 초입의 맹수나 마물들을 상대한다고 힘에 겨울 일이 뭐가 있을까.

아르곤의 변명은 말 그대로 헛소리였다.

익숙해지면서 슬슬 노골적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 날 잡아서 푸닥거리 한번 해야지.’

한시가 급한 마당이니 일단 그 결심만을 새겨 두고서, 타이니는 바로 절벽, 아니 테르티우스의 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야. 뭐 어쩌려고? 기다려야 하는 거 아냐?”

“그럴 시간 없어.”

타이니는 피식 웃으며 거대한 문을 올려다보았다.

폐쇄적인 드워프들의 특성을 반영하듯 꽉 닫힌 거대한 문에는 이음새만 보일 뿐, 그 내부로 소리나 소식을 전달할 구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쿵.

아무런 움직임 없이도 갑자기 타이니가 서 있던 돌바닥이 소음과 함께 움푹 꺼지고.

“합!”

그가 눈앞의 ‘문’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노을빛 오러가 거대한 문 전체를 물들이며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순식간에 절벽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하자.

곁에 있던 일행의 안색도 같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설득하러 왔다면서 시비를 걸 셈인가.

“야 미친놈아!!”

“지금 뭐 하는 짓……!!”

그렇게 성기사와 아르곤이 고함을 지르던 순간.

쿵.

우르르르르르르릉.

거대한 문이 지진이 난 듯 흔들리더니.

우우우우우우우웅.

이내 안쪽에서 무언가 텅 빈 금속이 울리는 듯한 메아리가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것도 문이니까, 노크하면 되잖아.”

“노크……?”

“미친!! 그게 노크냐!? 시비지!”

자신감 있게 씩 웃으며 돌아본 타이니를 향해 일행은 일그러진 안색으로 응답해 주었고.

“뭐, 밖에 손님 왔다고 알려 주면 그게 노크지.”

태연하게 응대하는 타이니의 말에 일행이 아연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농담 같던 말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그그그그그긍.

거대한 절벽이 열리며 그 어두운 속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봐라.”

그렇게 더 자신 있게 웃는 타이니의 시야에 들어오는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하나둘 환한 불빛이 비치더니.

- 적이다!!

중무장한 드워프 군대의 병력이 저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어쩔 거야, 미친놈아!”

“하. 어이가 없군.”

당황한 아르곤이 고함을 지르고, 성기사가 장검을 빼어 드는데.

“후으으읍!!”

타이니는 달려오는 드워프들의 병력을 보면서 한껏 숨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리고.

“광휘의 기사가 일행과 함께 드워프 일족의 첫 번째 망치를 뵙고자 왔습니다!!!!”

산자락이 터져 나갈 듯한 쩌렁쩌렁한 고함이 그대로 입구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아아악!”

“기습이……!”

거대한 지하 도시의 입구에서 기세등등하게 달려 나오던 드워프들 병사 다수가 거대 동굴을 진동하는 음파에 귀를 틀어막으며 그 자리에 쓰러져 나뒹굴었다.

“어……?”

자연히.

“저자다! 죽여!”

그 공격(?)에도 멀쩡한 상급 전사들이 핏대를 세우며 적(?)을 가리키고.

그 살기에 찬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타이니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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