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불편한 동행
“내가 대체 왜 여기에…….”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 앞에서 아르곤은 연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뚱한 얼굴로 다소 거리를 둔 채 대놓고 각을 세우고 있는 두 기사가 있었다.
당장 그 사이에서 파지직 불꽃이 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로 말이다.
각기 스무 살이나 될까 말까 한 얼굴, 금발과 검은 머리.
무표정한 얼굴과 짜증을 그대로 드러낸 표정. 가느다란 장검과 거대한 워해머.
전신을 빈틈없이 은빛 갑옷으로 감싼 성기사와, 어깨 갑옷 아래에 받쳐 입은 것이라고는 다 해진 셔츠와 바지, 금속 부츠가 전부인 야성적인 모습의 기사.
극단적으로 다른 분위기의 두 기사는 모두 젊다 못해 어리다 불러도 될 정도로 동안이었다.
‘실제로는 더 어리다니. 이게 말이 돼?’
하지만 그럼에도 둘 다 초인이라는 사실이 진짜 아이러니했다. 천재라 자부했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마도 검술을 완성시키면 나도…….’
애초에 아르곤은 그런 생각에 수련에 대한 결심을 다지고 마탑으로 돌아가려 했었는데.
- 어딜 도망가? 넌 나랑 같이 간다.
초장부터 저 전생의 동료라는 광휘의 기사한테 저지당했다.
- 나는 왜……!!?
- 못 튀게 하려고. 너 또 벙커 같은 거 만들려고 할 거 아냐.
……그니까 그 벙커, 안가를 만들어야 수련도 안전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심지어.
- 같이 다니면서 배워라! 거기서도 도망치면, 내가 너 잡아 죽이러 간다!
스승이 수정구 너머에서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살벌한 협박 문구를 내뱉기까지 했으니.
차마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그 전생의 동료에게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런 분위기는 너무 불편하다고!!’
아그라의 재앙을 함께 수습했던 다른 초인이라도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에스티나와 저릭, 그리드는 다시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인류 연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마당에 각 종족의 수장이나 연합의 상징적인 초인이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저 성기사가 타이니를 따라온 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한바탕할 줄 알았는데.’
저 성기사는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더니, 아그라를 떠날 때도 엉뚱한 말을 꺼냈었다.
‘교황을 만날 때까지 호위? 저 괴물을? 저놈도 미친놈이야.’
그 발언도 예상 밖이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인 타이니도 정말 의외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허락했으면 싸우지나 말라고!!’
아르곤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 가며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절대 쫄아서가 아니지. 그럼.’
스승이 배우라고 했으니, 그저 세심히 관찰하는 것뿐이었다.
진짜로.
“다소 무리한 속도이긴 한데, 잘 따라오시네.”
긴 침묵 끝에 먼저 입을 뗀 것은 타이니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성기사 크롬도 말을 받았다.
“무리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동행한 지 3일째.
상황이 상황인 만큼 3일 내내 질주만 하다 남부 산맥을 앞두고 간신히 쉬는 날.
정말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다시금 스파크가 튀었다.
“무리가 아니다?”
속도를 아르곤에게 맞추기는 했지만, 그리마에서 선물해 준 기마에 아르곤이 마력 질주와 강화 마법까지 걸어서 내달리는 속도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이 성기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쉽게 따라왔다.
하기야 오러유저에 대사제급 신성력, 거기다 마법까지 7서클을 사용하니, 그 다양한 능력만 보면 사실상 아르곤의 상위 버전으로 봐도 될 정도였다.
다만.
“애초에 아르곤 경의 속도에 맞추는 건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광휘의 기사라는 이름값은 하더군요.”
“뭐 틀린 말은 아닌데…….”
묘하게 고풍스러운 어조도 좀 어색한데 왜인지 말할 때마다 비꼬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으니, 타이니는 역시나 자신과는 기질부터 판이한 이 성기사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신경전 하면서, 나만 만만하지? 이거 서러워서……. 쳇.”
구석의 아르곤이 또 아주 작게 구시렁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다 들린다, 인마.’
원래 이상한 놈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지금은 아르곤보다 눈앞에 있는 이자의 정체가 더 중요했으니까.
타이니는 다시금 검제와 통신을 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강림이 100일 남았다는 황당한 소리를 들었던 그때의 대화를.
- 크롬? 어디서 들어 봤는……? 아! 맞다! 네 녀석이 말하지 않았느냐, 전생에 크롬벨이라는 용사가 있었다고!
- 아니, 그거야 강림 당시에 스무 살인 용사……. 어라?
- 그래, 이름도 비슷하잖아. 가명이겠지. 나이는 네가 잘못 안 걸 수도 있고.
- 아니, 나이야 그렇다 치고, 애초에 스무 살짜리가 그런 초인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신성력에 오러에 마법까지…….
- 그러는 너는!?
- 나야……. 씁. 젠장.
- 신전의 용사라면 말이 된다. 가명도 되게 어설프게 지었어.
- 아닌데……. 분명히 나 말고도 전부 스무 살로 알고 있었는데…….
- 그럼 보고가 잘못됐겠지. 만난 적도 없다며?
- 끙…….
- 이상하면 가능한 한 곁에 두고 지켜보거라. 뭐 성기사라면, 그것도 초인급이라면 마족과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 우리가 지금 가릴 처지냐?
‘정말 용사일까?’
검제의 그 마지막 말을 듣고 마음이 기울던 참에 이자가 먼저 자신에게 따라붙겠다고 말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마기 대신 신성력을 풍기는 마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이자에겐 거부감이 들었으니까.
‘진짜 용사라면 그것도 말이 안 되는데. 이 새끼 진짜 뭐지?’
하지만 티 내지 않고 잘 참아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어깨 갑옷, 어디서 얻었는지 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간혹 정말 뜬금없이 터져 나오는 이상한 말과 적의 어린 눈빛이 자꾸만 신경을 건드렸다.
“……알아서 뭐 하시게?”
“내가 아는 물건과 비슷해서 말이죠.”
“흠. 제국 황실에서 얻은 초월무구랑 비슷한 걸 아신다? 성기사가?”
“제국 황실이라……. 흠…….”
또 저런다.
멋대로 이상한 질문을 던져 놓고, 답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혼자 생각에 빠진다.
심지어 그 표정조차 좋지 않으니.
‘갓 핸드 그 양반도 그렇고, 성기사 중에 또라이가 많긴 한데…….’
타이니로서는 저 성기사인지 용사인지 모를 자도 약간 맛이 갔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용사가 성기사의 상위직이라면, 상 또라이일 수도 있지 뭐.’
고대의 마계 대전을 종식시켰다는 용사에 대한 신화나 설화는 무수하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묘사된 모습은 여신의 사도라는 것 말고는 공통된 점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 용사의 발원지라는 중앙 신전마저 왜인지 전해지는 기록을 극비로 처리하고 있으니, 당장 가진 정보로는 확인 가능한 것이 없었다.
다만 정말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실례지만, 그대의 언변을 보아서는 각 종족의 초인들을 설득하여 동료로 삼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 혹시 그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간혹 이렇게 재수 없게 팩트로 때리면서 속을 들여다보듯이 빤히 쳐다보는 꼴은 절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매번 취조하는 듯한 대화의 소재도 그렇고.
‘……절대 스무 살 짜리의 눈빛이 아니야.’
웬만해서는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 얼굴에 한없이 차분한 눈빛까지.
말세의 재앙 속에서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겪어 본 그로선, 저런 눈빛의 소유자가 스무 살이라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수많은 사건과 세월 속에서 마모되었거나, 혹은 그 풍파에 날카롭게 벼려진 자나 가질 법한 눈빛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자들과 대화할 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화법은 하나였다.
“잘.”
아예 꼬투리를 잡을 여지를 주지 않는 것.
“……잘? 무슨 뜻이죠?”
“그게 전부인데?”
“허…….”
살짝 구겨지는 표정을 보니, 그나마 조금 고소했다.
‘수상한 놈……. 절대 스무 살은 아니야.’
신전에는 신탁이란 게 있으니, 마계 대전을 대비해서 또 다른 용사를 길러 낸 거라 생각하면 앞뒤가 맞긴 한다.
하지만 모두가 타락했다 말했던 신전에서 이런 트리플 클래스의 초인을 길러 내기 위한 투자를 수십 년 전부터 해 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아무도 투자하지 않았는데 혼자 컸다고 하는 것은 더 이해하기 어렵고 말이다.
‘전생의 나도 스무 살엔 오러 못 썼으니까…….’
어쨌거나 이런 무력을 가지고 있다면 신전에서의 위상도 상당할 텐데.
“이번엔 내가 묻지. 강림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데, 신전에 복귀하지 않고 굳이 나를 따라온 이유는?”
“……마계 대전의 조짐이야 성하께서 미리 인지하고 계셨으니, 저 같은 무부야 인세 영웅의 곁에서 그 일을 돕는 것이 더 필요한 일 아니겠어요?”
이상할 정도로 말에 허점도 없었다.
마주 보는 두 눈에도 흔들림 하나 없는 것이 솔직히 매우 짜증이 났다.
역시 이런 머리싸움은 정말 체질이 아니다.
스트레스가 치밀어 오르는데.
“……혹시 싸울 거면 나 피해 있어도 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르곤이 왜인지 슬쩍슬쩍 물러가는 모습이 가슴속에 울화를 더 자극했다.
‘강림이 코앞인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새삼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꾹꾹 눌러두었던, 아니 눌러두었다고 착각했던 불쾌감이 결국 그대로 터져 나왔다.
안 되겠다.
“하. 그냥 무슨 꿍꿍이인지 속 시원히 밝히시지? 너 뭐냐? 대체 왜 따라온다고 한 거냐? 자꾸 이상한 질문만 하면서.”
검제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아마 ‘야 이 새끼야! 잘 다독이라고 했지!?’ 하면서 발작을 일으켰겠지만, 담아 뒀던 말을 하고 나니 속은 후련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파지지직.
자신의 기세와 노골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는 상대의 기세를 보니, 불쾌감을 가진 건 피차일반인 듯하다는 것.
“흥. 보아하니 너도 싸우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냥 시원하게 한 판 붙고, 진 사람이 다 털어놓기 어떠냐?”
왜인지 보기만 해도 불쾌한 자.
상대도 생각이 비슷하다면 당연히 응할 것이란 확신을 담아 도발하며, 몸을 일으켜 녹턴의 손잡이를 잡아 가는데.
상대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하. 나이도 어린 사람이 초면부터 반말만 지껄이면 누가 좋아할까. 광휘의 기사, 그 인품에 대한 소문은 확실히 잘못된 듯하군요.”
“어…….”
……그건 그렇, 그럴 거 같긴 한데.
“……그럼 당신도 반말하던가.”
“저는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 맞섰냐는 듯, 자신의 투기를 흘려 버리며 살짝 눈살을 찌푸린 상대의 말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기사가 투쟁심이 있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동행에게까지 그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 마족에 대한 건은 이미 오해가 풀렸을 거라 믿습니다만?”
이어지는 말도 하나같이 사리에 맞았다.
어버버.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그 감정을 그대로 담아 째려보는데 아까와는 다르게 그 기세는 허공에 흩어질 뿐, 용사인지 그냥 성기사인지 모를 자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 놓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씁. 내가 배운 게 없어서 좀 막 나가긴 하는데, 아무한테나 막말하지는 않아. 좀 찜찜하게 걸리는 게 있는 사람에게나 이러지.”
대놓고 내가 널 의심한다는 말을 던져 보는데.
그럼에도 상대의 표정은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이성적 판단보다 본능을 믿는다는 말을 너무 당당하게 하시네요.”
지금 이거 싸우자는 건가, 말자는 건가?
또 살짝 짜증이 났지만 다시 싸우자고 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니.
“만약 다른 속셈이 있다면 일찍 털어놔. 이 상황에 마족에 협력하겠다는 것만 아니면 다 묻어 둘 테니까.”
“……성기사한테는 참 재미없는 농담입니다.”
“농담 아니야.”
각각 검고 푸른 눈이 다시 한번 치열하게 부딪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시선을 거뒀다.
그러자.
“……안 싸우는 거냐?”
어느새 십여 미터는 멀어졌던 아르곤이 다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래. 안 싸운다.”
“뭐야 이게? 폼만 잡고.”
쯧. 그러게 말이다.
차라리 한바탕했으면 속이나 편했을 텐데.
‘젠장, 영감 당부만 아니었어도.’
타이니는 혀를 차며 그대로 뒤로 쓰러지듯 흙바닥에 드러누웠다.
쿵.
복잡한 생각은 질색이다.
그러니 앞만 보자.
“이제 곧 남부 산맥이야. 테르티우스로 들어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월랑이 경계를 설 테니 일단은 자 둬. 내일 해가 저물기 전에 지하 도시 입구에 도착해야 돼.”
동시에.
우우우웅.
“아우우우우우!”
다시 현신하는 월랑이 주변의 환한 달빛을 보며 하울링을 시작하자, 타이니는 보란 듯이 눈을 감았다.
“쉴 때는 확실하게 쉬어 둬야 하니까.”
그리고 그런 그를 보고서야 성기사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뒷짐을 지고 있던 오른손을 풀었다.
아까부터 자꾸만 허리춤의 성검으로 향하려던 손에는 아직도 선명하게 핏줄이 돋아 있었다.
‘분명히 뭔가 있는데…….’
허술한 듯하면서도 완전한 틈은 보여 주지 않는다.
크롬벨은 다시 타이니를 차갑게 훑어보다가 이내 그 자리에 그대로 좌정한 채로 명상에 들었다.
품위 없이 흙바닥을 뒹구는 것은 광휘의 기사라는 과분한 이명을 가진 저 애송이나 할 짓이니.
‘뭐, 일단은 지켜본다. 그리고 만약 그자와 같은 경우라면…….’
가차 없이 벤다.
가슴속에 칼을 갈고 있는 크롬벨의 반개한 눈은 여전히 흙바닥에 누운 기사를 바라본 채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서늘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고.
‘하. 미친놈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그런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아르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머리에 빙빙 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