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블루윙
3국을 휩쓴 재앙, ‘붉은 육망성의 저주’는 당연하게도 그 당사국들에게 가장 큰 혼란을 불러왔다.
그중에서도 선전 포고 직후 국왕의 명에 따라 진군을 시작했던 락스턴의 병력이 가장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스턴빌의 시민 대다수가 재앙에 휩쓸려 죽어 나갔다.
왕국의 중심이 재앙에 휩쓸렸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시작으로, 무수한 소문이 뒤를 이었다.
그리마 왕국 오트만 2세가 선전 포고를 취소하고 제국에 백배사죄를 청했다.
모든 것은 본의가 아니라 마족의 흑마법에 당했다고 증언하였고, 광휘의 기사가 마족을 처단함으로써 이를 증명했다.
이번의 대재앙 역시 마족의 짓이다.
페이든 국왕과 락스턴 국왕이 원인 모를 실신 상태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그러하니 락스턴의 뒤를 따르겠다 약속했던 그리마와 페이든의 군대가 진격을 멈추고 귀환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미 제국의 땅으로 들어온 락스턴의 군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어쩌라고!!?”
“X발……. X 됐다.”
돌아가는 순간 제국의 군대가 뒤를 칠 것이고, 그것은 곧 락스턴 왕국의 멸망으로 이어질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병력만으로 제국을 상대할 자신도 없는 데다가, 후방의 본국 역시 왕의 실신으로 인해 혼란 상태.
자연히 락스턴 군은 제국의 국경 도시, 라힐을 눈앞에 두고 어정쩡하게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쾅!
챌린저급 기사의 거친 손길에, 막사 안에 마련된 긴 테이블이 한순간에 두 쪽이 났다.
“누구든, 대책을 말해 보란 말이다!”
락스턴 군 선봉장인 필립 작스너 백작의 호통.
하지만 그 살벌한 기세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진퇴양난에 빠진 그들의 상황을 어느 누가 쉽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대로 가만히 버티고 있어 봤자, 언제 제국군의 총력이 쏟아질지 몰랐다.
지금 상황에 대책이 있다면 오직 하나.
- 제국에 항복하고 선처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지휘관들 사이에서만 형성된 그 공감대를, 누구도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왕국 최강의 기사이기는 하지만 폭급하고 비열한 성정으로 유명한 작스너 백작은, 보나 마나 그 말을 가장 먼저 꺼낸 지휘관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울 테니까.
오직 자신이 공을 세우기 위해, 서부 변경백이던 클린스만과 대륙 7대 신성 폭염의 기사가 포함된 왕국 기사단마저 본대로 밀어낸 백작이 아닌가.
그는 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에서도 상리를 벗어난 인사를 억지로 단행할 만큼 영향력이 크고 독선적인 자였다.
심지어.
“왜 말이 없어!! 다들 대가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쾅!
폭력적이고 잔인하기까지 한 자.
이제는 아예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테이블이 자신들의 미래를 보여 주는 것 같아서, 대다수의 지휘관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노려보던 필립 작스너는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더니 막사를 박차고 나섰다.
칫.
“제국은 여전히 움직임이 없나?”
“예. 라힐 쪽에서 동부 병력이 집중되었다는 정보는 있지만, 성문 밖으로 나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뒤따르던 부관이 보고하자마자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백작.
그에 부관이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아무래도 제국이 전쟁을 피하려 한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렇단 말이지.”
멀리 라힐의 성벽을 바라보는 백작의 눈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모조리 뒤져 보아도, 아스란 제국이 자국의 국토를 침범당한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참았던 적은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는 그것을 보고 초전에서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기에 억지로 선봉장의 자리를 꿰찬 것이었다.
한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제국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정말 이상해.”
“예, 이상합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성 밖으로 정찰대를 운용하지도 않는 것만 봐도, 저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워 보입니다.”
부관의 말은 희망적이었고, 또한 유혹적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후퇴의 구실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고, 이내 다른 욕망까지 비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왠지 요즘 맹해 보이던 왕, 자신의 매형을 설득해 선봉장을 바꾸는 데도 꽤 많은 돈이 들었으니, 본전 생각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스란의 군대가 약해졌을 확률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새 황제가 그 검제에게 휘둘린다는 정보도 있구요.”
“그럼…….”
“하지만 그래도 우리 왕국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닐 겁니다.”
은근슬쩍 솟구쳐 오르던 욕망이 그 말 한마디에 팍 사그라들었다.
“하……. 그렇겠지.”
아쉬웠지만,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제국의 영토에 침입하고도 희생 없이 후퇴했다. 이 정도면 불명예는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아쉽군. 정말 아쉬운 일이야…….”
성벽을 바라보는 필립 작스너의 갈색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몸을 사리는, 약해진 제국을 앞에 두고 돌아서야 한다니.’
연합에 벌어진 재앙만 아니었다면 역사에 남을 위업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번 떠오른 생각은 자꾸만 다시 욕망을 부채질했다.
“하지만…… 간을 볼 수는 있지 않을까?”
그 위험천만한 말에 부관 라스필이 화들짝 놀라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예?! 각하, 하지만…….”
“라힐 성에 제국 동부군이 정말 다 몰려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성 하나 정도는 점령하고 후퇴해도 되잖아.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처럼 위태로운 시국에 왕국민들에게 희망이 되지 않겠나? 왕국 내에 내 입지도 한없이 올라갈 테고.”
그 꿈같은 말에 라스필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이 미친 새끼가!!’
이대로 얌전히 후퇴해도 제국군이 공격하지 않아 주는 걸 감사해야 할 판에, 성을 치자고?
자살 못 해서 환장한 놈의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그 진심을 토해 낼 수는 없었다.
“……일단 용병들을 던져 놓고 간을 보자고. 놈들의 대응을 보고 후퇴와 진격을 결정하는 게 낫겠어.”
다시 점화된 욕망의 불꽃이, 필립 작스너의 눈동자에서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용병들을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돈을 더 많이 준다고 해서 우리 쪽에 합류한 놈들이니까. 그만큼 받아먹었으면 돈값을 해야지.”
“…….”
“제국의 반격이 생각보다 강하면 놈들을 방패 삼아 후퇴하고, 약하면 그대로 라힐을 점령한다. 어때?”
제국의 추격이 시작되면 우리 병사들도 다 죽습니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용병들이 다 죽으면 돈 아끼고 좋은 거지. 예산도 절약하고. 어때?”
여기서 저 생또라이에게 직언을 고했다가는.
‘……내가 죽는다.’
암울한 미래가 눈에 보이더라도, 당장 죽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기에.
“……현명하신 판단 같습니다.”
“역시 그렇지? 그래, 쓸데없이 머릿수만 채워놓은 지휘관들 따위보다야 내가 백배 낫지.”
네가 우리 지휘관이라는 게 재앙이다.
마음과는 다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라스필은 어떻게 해야 무사히 후퇴할 수 있을지를 필사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이 상황에? 적장이 미친 건가?”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검제의 말에 제나스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가 길었지요. 연합의 지휘관 중에 뇌에 바람 들어간 놈이 한둘쯤 나올 때가 되었습니다, 각하.”
이제 서른을 갓 넘긴 제나스가 마치 수십 년간 전장을 겪은 것처럼 비웃음을 토해 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우습게 보지 못했다.
얼마 전 라힐에 합류한 이 젊은 블루윙 기사단장이 시리도록 푸르고 하얀 오러를 뿜어내는 것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가 보았으니까.
그러니.
“필립 작스너는 욕심이 많고 폭급한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락스턴의 왕이 제정신이었다면 절대 지휘권을 주지 않았을 자이지요. 황당한 판단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라힐의 성주, 루블랑 백작이 오히려 제나스의 말을 거들기까지 했다.
“그래도 정도란 게 있는 법인데……. 뭐, 어쩔 수 없나…….”
가볍게 혀를 차며 일어선 검제가 방문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시립해 있던 백작과 기사들이 황급히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직접 가시겠습니까?”
“그래.”
“받들겠습니다.”
“되었네.”
“……예?”
황급히 뒤를 따르려던 루블랑 백작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이어진 말은 더욱 황당하기만 했다.
“블루윙이면 충분하니, 그대들은 성을 지키게.”
“각하!? 적은 락스턴의 병력 절반이 투입된 군대입니다! 5만이 넘는 대군……!”
“나도 아네.”
“……예?”
아무리 블루윙 기사단이라 하더라도 고작 3백으로 5만을 치겠다니?
‘아무리 초인이라도, 미친 건가? 우리 쪽도 마족의 흑마법에 당한 건가?’
차마 본심을 내뱉을 수 없는 그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는데도, 마주 보는 검제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적장이 바보라고 해서 5만 병력 모두가 바보일 리는 없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 머리만 치면 다 흩어질 거야.”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괜한 희생이 생겨서는 안 되니, 총력전은 자제하는 것이 좋아.”
고작 병사들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겠다?
‘귀족 중의 귀족이라더니…….’
검제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울 뿐이었지만, 루블랑 백작 역시 입장이 있는지라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병사들보다 각하의 안위가 제국에는 훨씬 중요합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예?”
“초인의 존재는 일반 병사로는 대체 불가능하니까. 특히 앞으로는 더욱 그럴 거다.”
“……예?”
“그러니 연합의 정예들 역시 희생을 최소화해야 해.”
“예, 당연히 정예들 희생이야……. 에? 연합이요??”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백작이 어리둥절해하며 휘하의 기사들을 돌아보는데, 다행히도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 듯 그들 역시 비슷한 표정들이었다.
- 이 미친 새…… 아니, 공작 각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하지만 당사자는 그런 그들의 의문을 해소해 줄 생각이 없는 듯, 한숨을 쉬며 거침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고.
결국 그 뒤를 따르는 이는 그의 부관이자 제자 격인 제나스뿐이었다.
“하여간 타이니 녀석, 일 처리가 깔끔하지 못해서 탈이야. 하필 이런 재앙을 못 막아서…….”
타이니가 들었다면 경기를 일으킬 만한 소리였지만, 연합에서 벌어진 대재앙은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 아쉬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적당히 시험해 볼 만한 무대가 아닙니까. 진짜 재앙이 벌어지기 전에요.”
그 말에 검제는 하늘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최악 중에서 그나마 나은 점을 찾는 건가……. 답답하군.”
“뭐, 확실히 시험할 기간이 몇 년 더 남았다고 생각하면 당장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나았겠지요. 그 마족도 참 지독한 짓을 했습니다.”
“몇 년이 아니니 문제지. 이제야 길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벌써…….”
“……예?”
“아니, 아니다. 자세한 건 아세리안에 돌아가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하루면 되겠지?”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터무니없는 주문에 더욱 터무니없는 답변이었지만,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두두두두.
라힐의 동쪽 성문이 열리고, 갑옷에 독수리 문양을 새긴 300여 명의 기사단이 예고도 없이 돌진을 시작했다.
“뭐야 저건?”
“미친놈들인가?”
“저만한 숫자라면, 아무리 기사라도 해볼 만하지!”
죽상으로 선두에 내몰렸던 락스턴 용병들의 얼굴에 희망의 꽃이 피어날 때.
- 전개!
- 하!
멀리서 퍼지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300여 명의 기사단이 거대한 한 쌍의 날개 형태로 대형을 펼치자, 그 위로 대형과 같은 모양의 푸른 마나가 형상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용병들의 얼굴 역시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저건 대륙의 유수한 기사단 중에서도 소수만 사용한다는…….
“집단 마나 스킬!?”
“초일류 기사단이다!”
“푸, 푸른 날개? 설마!?”
노련한 용병들 사이에서 비명 같은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순간.
푸른 날개를 가진 무형의 거대한 독수리가 엄청난 속도로 지면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아아악!”
“억!”
“끄아악!”
“어!?”
“뭐, 뭐야!?”
푸른 날개가 지나간 자리.
정면으로 부딪힌 이들은 한순간 분쇄가 되어 피 보라로 흩뿌려졌지만, 그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친다?”
“뭐야?”
“본대로 가는데?”
순식간에 용병들을 지나쳐 멀어져 가는 푸른 날개의 기사들.
그에 락스턴 본대에선 뒤늦게 난리가 났지만, 이미 블루윙의 기사들은 5만 대군의 정면을 파고들고 있었다.
“막아!”
“젠장!”
“블루윙이다!”
“검제다!”
대군들 사이에서 고함이 난무하던 그때.
양 날개의 아래에서 각기 붉고 하얀 오러가 피어오르며, 푸른 날개의 일부를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여 갔다.
알아보는 사람은 몇 없었지만, 그것은 바로 발렌티아 공작가의 유구한 역사 중에서도 몇 번 등장한 적 없는, 두 명 이상의 오러유저가 존재할 때나 시전 가능한 집단 전투술의 꽃이었다.
푸른 날개의 발톱.
이내 푸른 날개는 그전에 비해 몇 배 더 빠르고 강한 힘으로 순식간에 대군의 중심부를 헤집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나절 뒤.
5만의 락스턴 대군은 단 300여 명의 기사에게 중앙을 꿰뚫려, 필립 작스너를 비롯한 핵심 수뇌부가 전멸당하며 후퇴했다.
제국과 연합의 전쟁에서 가장 단기간에 끝난 전투였고, 또한 가장 사상자가 적었던 전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