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말세가 다가왔다
“아르곤 그 아이가 결국 또 사고를 쳤구먼. 끌끌.”
하얀 머리칼과 수염을 너저분하게 기른 노인이 탁자 맞은편에 앉아 헛웃음을 흘리자, 아프만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습니다. 제가 제대로 교육했어야 하는데.”
아프만의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정돈된 수염은 눈앞의 노인과 대조되어 더욱 깔끔하게 느껴졌고, 태도 또한 깍듯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십 년은 입은 듯 남루한 로브를 걸친 눈앞의 노인이 바로 현 대륙 유일의 8서클 대마도사이자 현자의 마탑주, 솔레인이었던 것이다.
팔순이 넘어가는 나이인 만큼 생의 끝을 예감하고 아프만과 장로회에게 실권을 넘긴 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어려운 선배이자 존경하는 마법사였다.
“아니, 아니야. 뭐, 이렇게 톡톡 튀는 후진도 있어 줘야 우리 같은 늙은이들의 삶이 심심해지지 않는 거지. 클클.”
“그래도 마탑의 명예 실추와 락스턴의 실질적인 손해가…….”
“과한 게 아니면 다 들어주게. 애초에 이 전쟁에는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나?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차라리 녀석이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예?”
“아르곤 그 아이, 너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만큼 사리 분별도 빠르지. 아마도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를 보았을 거야.”
“……너무 신중해서 문제죠.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저한테도 알리지 않고 잠수를 타 버렸으니.”
아마 녀석은 모든 것이 확실해진 뒤에야 연락해 올 것이다. 절대 겁이 나서 도망친 게 아니라, 이러이러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할 증거를 확보하고 나서야 말이다.
그게 타당하면 다행일 텐데, 최악의 경우는…….
‘제발 증거 조작이나 하지 마라, 제자야.’
그가 그렇게 속으로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아무튼 제국을 어찌 멈춰 세울지나 다시 고민해 보게. 이 일이 정말 연합과 제국의 전쟁으로 번지면 최악의 사태야. 락스턴이나 그리마, 페이든에도 사절을 파견해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게. 가능하면 장로들이 직접 갔으면 좋겠군.”
“이미 그리 조치했습니다.”
“그래? 역시 자네는 믿음직해. 허허.”
탑주의 칭찬에도 아프만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반쯤 탈속해 버린 탑주와 달리 그는 여전히 현실의 정치에 얽혀 있었으니, 현 시국에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번쩍!
멀리 남쪽 밤하늘 위로 선명한 붉은 빛이 솟아오르는 광경이, 현자의 마탑 상층부에 있는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얼핏 봐도 심상치 않은 불길함이 여실히 느껴지는데.
“이런!!!!!!”
쾅.
나이가 나이인 만큼 매사 조심히 행동하던 솔레인이 의자를 거칠게 뒤로 젖히며 벌떡 일어났다.
흰 눈썹까지 파르르 떨리는 탑주의 시선은 멀리 있는 붉은색 빛의 기둥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번갈아 향하고 있었다.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예?”
이해할 수 없는 그 탄식 어린 한마디에 아프만이 어리둥절해하는데, 솔레인이 근래 보기 드물게 무거운 표정으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스란의 황실 마탑을 연결해 주게, 아프만. 그쪽에서도 이미 알아차렸을 게야. 그것이 있으니.”
“예? 예, 알겠습니다.”
연합과 제국의 전쟁을 이야기할 때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탑주가 아니던가.
아프만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바로 그 뜻을 받들기로 했다.
물론.
‘붉은빛 때문인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확인해 봐야겠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붉은 빛기둥에 대한 소식은 너무나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 * *
“……전설로만 내려오던 차원 관측기가 작동했습니다.”
티네스 폰 엔더슨이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싹 지운 채 딱딱한 얼굴로 보고하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황제의 표정이 더욱 심각하게 굳어졌다.
연합에서 솟구쳐 오른 붉은 빛기둥 6개는 그 사태의 당사국인 연합의 3국뿐 아니라 그와 인접한 모든 나라에서 관측되었다. 즉, 제국의 동부 국경에서도 그 광경이 목격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혼란에 빠진 당사국들보다 전쟁을 목전에 둔 제국이 그 피해를 더 빨리 추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이 재난이 본국의 일이 아니라고 안심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추정 희생자 100만……. 분명 그 마족의 짓이야. 그걸 어찌 수습하느냐도 문제인데…….’
빙염의 마도사가 이리도 차가운 표정을 짓는 것을, 그는 오랜만에 보았다.
차원 관측기?
제국의 안위가 걸린 일이라면서 갑작스레 독대를 청하길래 받아 주었더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요, 티네스 경?”
“황실 마탑에서 비밀리에 내려오는 아티팩트가 있었사옵니다. 초월무구 수준이긴 하지만 오직 하나의 기능밖에 없는 아티팩트라서 그저 전설의 파편이라고만 치부했는데…….”
“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 차원 관측기가 소리를 내는 경우는 오직 하나. 바로 2천 년 전처럼 무도한 마족들이 이 세상을 침략할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되옵니다, 폐하.”
“뭐요!? 얼마나? 얼마나 더 빨라졌다는 말이오? 아무리 그래도 몇 년은 더 남은 줄 알았는데!?”
그 말에 굳어 있던 티네스의 얼굴에 일순간 의혹이 떠올랐다.
“더 빨라지다……니요, 폐하?”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소! 기간! 기간 말이오! 언제냐고!!”
평소 현명하고 신중한 태도의 황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생소할 정도로 격앙된 모습.
그에 티네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이 기억하는 서적의 내용을 읊었다.
“전해 오는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100일 뒤 마계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신호라고…….”
“100일!?”
그 말에 황제의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인류의 정예들을 모두 모아 군대를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
그랬기에.
“연락이 닿는 모든 곳에 알리시오. 머지않아 마계 대전이 시작되니 인류 연합군의 결성을 촉구한다고! 만일 거짓이라면 우리 제국에서 모든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황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명을 들은 티네스는 내심 당황했다.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걱정이었는데.’
자신의 보고를 고대의 전설로 치부하고 무시하면 어쩌나 우려하던 게 무색하게도, 제국의 지배자는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진 재난에도 연합의 군대가 아직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여론을 몰아가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됩니다, 폐하.”
“대재앙이 일어났으니, 그들에겐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을 거요. 설령 변수가 생긴다고 해도 국경에 가 있는 발렌티아 공작이 해결할 테고.”
“예?”
티네스의 반문에 황제는 바로 대답했다.
“‘검의 황제’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했으니 그리 믿으면 됩니다. 곧 소식이 들어올 테니 공표는 바로 그 뒤에 하도록 하시오.”
이미 벌어진 전쟁이란 것이 그리 쉽게 끝나기도 하는 거였던가?
‘아무리 발렌티아 공작이라 하더라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여기서 더 반문할 수는 없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실 마탑주 티네스 폰 앤더슨이 그렇게 복명한 순간.
자연히 대륙 곳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연합에서 재앙이 시작된 그 시각.
그 붉은빛이 보일 리 없는 대륙 중북부의 늑대의 궁 안에서, 거대한 검은 늑대의 정령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이런!!? 벌써!? 예언보다 십수 년은 빠른데?
“무슨 일이십니까, 어르신?”
그 곁에서 명상하듯 잠들어 있던 코끼리 수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붉은 눈의 정령이 무거운 눈으로 자신의 계약자를 돌아보았다.
- 우란, 네 생의 끝까지는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려울 것 같구나.
원래의 예언대로라면 당대의 우란 누드가 수명이 다할 때쯤에나 사건이 일어나야 했는데, 무언가 틀어진 것이다.
“예?”
- 상황이 이렇다면, 나는 부활했을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
영혼의 반려로 불리는 정령과 정령사. 그중 한쪽이 일방적으로 결별을 통보하는 말이었지만.
“뜻대로 하십시오, 어르신.”
남겨진 자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괜찮겠느냐, 우란? 충격이 상당할 것이다. 가뜩이나 얼마 남지 않은 네 수명이 크게 줄어들 수도 있어.
그리 말하는 펜릴의 눈에는 갈등의 빛이 역력했다.
보통의 정령사라면 당연히 붙잡았겠지만.
“순리를 따를 뿐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이 세상을 위함이라는데, 제가 어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거대한 코끼리 수인은 그 덩치만큼이나 마음이 넓었다.
그것이 오히려 펜릴의 갈등을 키웠다.
- 나는…….
최초의 정령이자 웨어비스트의 수호령. 그리고 한때는 세상을 구한 용사의 계약자였던 정령이 오랜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 * *
- 100일!!?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리드의 옆방, 타이니가 있는 곳에서 엄청난 고함이 들려왔다.
100일이라니, 무슨 얘기지?
그리드의 주의가 잠시 밖으로 쏠리는 순간, 그의 눈앞의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우, 지금 그 말이 사실인가?]
“예, 폐하. 마족의 정체를 확인하고 참살에 성공했습니다. 죽은 마족의 마지막 수작으로 이 재앙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거대한 장례식장이 된 아그라의 통신소 안에서, 웨폰 마스터 그리드 반 셀던은 고국의 군주와 대화하고 있었다.
세계수의 수호자가 갑자기 하늘에서 날아와 납치하듯 동행을 요구했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 그리드는 다시금 제 형이자 셀던 왕국의 국왕 그랑울 3세에게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을 고스란히 전했다.
[……솔직히 이상하기는 했지. 그런데 그게 마족의 수작이라니. 허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계의 침략이 시작될 것이라고. 인류가 뭉치지 않으면 그대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단호하게 이어지는 말.
하지만 수정구 속에서 들리는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 그랬었지.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네, 아우.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제국이 이 질서를 주도하게 되었다가는 우리가…….]
고국에 있을 때도 수도 없이 들었던 말.
하지만 이제는 그 역시 예전처럼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타이니에게 처음 전생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또 달랐다.
사람은 감성의 동물이라 하던가.
아그라의 재앙을 눈으로 보고 겪은 마당에, 이전처럼 ‘어쩔 수 없지’ 하면서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쾅!
“아니,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단 말씀이십니까, 폐하!? 아니 형님! 진실을 좀 보십시오, 제발!”
[그리드……. 네가 지금……. 허……]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형님. 하지만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기서 인류 연합에 어깃장을 놓는다면 온 세상이 망합니다! 형님이 지키셔야 할 셀던 왕국도 멸망한다는 말입니다!!!”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에 수정구 속 찡그려졌던 그랑울 3세의 표정 역시 심각하게 바뀌었다.
“대륙의 가장 오래된 나라, 인간이 시작된 나라, 우리 셀던을 지켜야 한다고……. 형님이 어린 제게 항상 하시던 말씀입니다.”
[그리드…….]
“정말로 왕국이 망합니다. 인류가 멸망한다는 말입니다, 형님!!”
그 외침에 한동안 수정구 너머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잠시 후.
[……제국과 협상해 보겠다.]
“형님!!”
[다만 온전히 제국에 주도권을 넘겨줄 수는 없으니, 주도적 동맹으로서 어느 정도 권리는 보장받아야겠지.]
“형님은 이 상황에서도 자꾸……!”
[인류를, 왕국을 지킬 수 있는 선 안에서 말이다.]
재차 고함을 지르려던 그리드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형님.”
[아니다, 그리드. 하지만 만약 네 말이 거짓일 경우에는 꽤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형님.”
진작 이럴 걸 그랬나.
그리드가 자신의 자랑스러운 콧수염을 튕기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자.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 얼굴. 뭐, 연합 내 우리 왕국 사절 대표는 너로 하자꾸나. 원하는 바겠지?]
“물론입니다, 형님. 아니, 폐하.”
[하, 둘만 있을 때는 형님이라고 하거라. 오랜만에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구나. 너도 나도 늙었는데, 옛 생각도 나고 말이다.]
“……좋은 소식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형님.”
[그래, 그러려무나. 하, 이거 대신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셀던의 국왕이 한숨과 함께 통신을 끊었지만, 그런 그의 걱정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그라는 물론 대륙 전역에 엄청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