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어딜!!
‘X발. 이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미끼 같은데.’
시시각각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느낌.
자신을 단숨에 잡아 죽일 수 있는 악마가 도사리고 있는 공간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니, 정말 X 같은 상황이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아르곤은 어색하게 옆의 눈치를 보았다.
“크르.”
자신이 건 은신 마법으로 인해 반투명해진 작은 강아지가 찌릿, 하고 쏘아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겉모습만 보면 그게 뭐가 무섭겠냐마는, 그 본질을 안다면 안 무서워하는 게 더 이상한 괴물, 아니 정령이었다.
“킁.”
“……간다고, 가.”
젠장.
왕궁 결계의 묵직한 마나가 정도 이상으로 더 무겁게 느껴지던 그때.
‘뭐지?’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다다다다닥.
안쪽에서 빠른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왕궁 안에서?’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일순간 피부에 소름이 쫙 끼치며 자신도 모르게 몇 발짝 물러서는데.
그 순간 발밑에 턱 걸리는 물체, 아니 정령.
“킁.”
한심하다고 말하는 듯한 녀석의 표정에 울컥 치솟은 감정이 방금 느낀 한순간의 위기감을 지워 냈다.
‘그래, 이건 마도 검술의 은신 마법이야. 일반 기사들이 발견할 리 없어.’
그 생각으로 애써 의연하게 가슴을 펴 보지만, 나아가는 발걸음이 확연하게 느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왕궁 벽에 달린 등잔 아래로 뛰어나오는 일단의 기사들이 눈에 들어온 순간.
아르곤은 자신이 느꼈던 위기감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
타다다닥.
서로 정확하게 발을 맞추며 뛰어오는 7명의 기사.
굳이 탐지 마법을 쓰지 않아도 그 수준이 확연히 보였지만, 문제는 고작 익스퍼트급 1명에 2단계 6명에게서 ‘간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합이 잘 맞는다 해도 그렇지, 저들 한 조가 자신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말이 안 되는데?’
7명의 기사가 마치 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상했다.
‘내 감각에 이상이 생겼나?’
스스로의 판단에 혼동이 오는데, 이내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기사들이 증명해 주었다.
챙!
아무런 말도 없이 검을 뽑아 드는 기사들.
그들의 눈이 이상하리만큼 붉게 빛나며 자신을 응시하는 순간, 아르곤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X 됐다…….”
그리고 그 생각을 증명하듯.
“하!”
하나의 기합과 함께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기사들의 속도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경지와 괴리감이 들 정도로 빨랐다.
“젠장!”
자연스레 안색이 새파랗게 질림과 동시에 다급하게 휘둘러지는 마나 블레이드.
쾅!!!!!!
그 일격에 깃든 싸늘한 마나가 은신 마법을 깨트리고, 어두워진 왕궁의 밤마저 깨우기 시작했다.
* * *
- 쾅!!!!!!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에 왕궁의 서쪽을 뒤지고 있던 타이니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이제는 집중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레 옮겨지는 월랑의 시선. 그것을 통해 보인 광경이 생각했던 것과 사뭇 달랐던 것이다.
아르곤의 썩어 빠진 정신 상태를 고치기 위해, 월랑에겐 녀석이 위험하지 않으면 지켜만 보라 했는데.
‘……마족이 아니라 인간 기사?’
왕궁 어딘가에 세뇌된 적들이 있을 것이라 짐작은 했었지만, 아르곤을 몰아치고 있는 놈들의 모습이 생각보다 더 이상했다.
관절이나 신체 일부가 터져 나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한계 이상의 속도와 공격력을 내는 모습.
‘세뇌로 저렇게까지 된다고?’
아르곤이 버티기만 해도 놈들이 알아서 자멸할 것이 눈에 보였지만, 문제는 그 뒤로 달려오는 또 다른 일단의 기사들이었다.
‘저게 다 같은 식으로 세뇌된 놈들이면……. 안 되겠다. 월랑, 도와.’
- 컹!
이 안에 도사린 마족이 아니라면 아르곤을 위협할 적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발목이 잡힌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소란이 아르곤 쪽으로 집중되었다는 것.
그리고 불안한 점이라면 자신의 주변이 왜 이렇게 조용한지 모르겠다는 것.
하지만 그조차 착각이었음을 금세 알게 되었다.
- 오러유저라? 그렇다면 이 이상 인형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음?”
- 꽤 독특한 마법을 두르고 있지만, 그래 봤자 어설퍼.
머릿속에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아르곤이 걸어 준 은신 마법이 깨어져 나가는 순간.
월랑의 특성, 소울 사이트와 동조한 그의 감각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강대한 존재감을 확인했다.
그 안에 자리한 거대한 마기도 느껴졌지만, 타이니의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번질 뿐이었다.
“찾았다.”
녹턴을 잡아채는 손길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이내.
- 너는……!?
점점 가까워지던 마족의 존재감이 갑자기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
‘날 알아? 어떻게?’
일순간 당황하던 타이니는 그대로 그 존재감을 쫓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딜!!!”
은폐를 유지하는 것보다, 당장 확인된 적을 놓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타이니의 몸이 빠르게 멀어지는 마족의 존재감을 향해 직선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쾅!
우르르르릉.
왕궁의 벽이나 복도에 세워진 물건 등,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일직선으로 뚫어 가면서.
* * *
‘저놈이 어떻게 여길……?’
왔던 길을 도로 미끄러지듯 돌아가는 릴리스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지금 가장 경계해야 할 난적을 만난 탓이었다.
분명히 제국에서의 흔적을 전부 지웠을 텐데 어떻게 쫓아온 것인지 의아했지만, 궁금해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놈은 귀족의 위계를 가진 아크 리치와 그 부하들을 한순간에 쓸어 버린 괴물.
굳이 정면으로 붙어서 손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 ……제거하라. 하지만 여의치 않거든 굳이 제거할 필요는 없다.
- 운명의 변수는 그 존재 자체로 차원의 균열을 커지게 만드니…….
반드시 죽일 필요도 없었으니.
‘그래, 난 하찮은 인간 하나를 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대계를 위해서.’
릴리스는 그렇게 자신의 회피를 정당화하며 다시금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최대한 간을 보되, 여의치 않으면 준비한 모든 것을 터트리고 놈에게 뒤집어씌운다.
그렇게 다짐한 릴리스가 재빨리 대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모두 이곳으로 달려오는 침입자를 죽여라.]
자신의 지배를 받는 모든 인간에게 명령을 내렸다.
“침입자를 막아라!”
“침입자를!”
광범위 세뇌 마법에 의해 현실 도피에 빠져 있던 귀족과 기사들이 한순간에 무기를 빼 드는 광경.
그것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은 릴리스가,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의 등 뒤로 숨어들었다.
“폐하, 잠시 저를 보호해 주시지요.”
“오, 내 사랑. 당연히 그리하겠소.”
왕관에 깃든 푸른 마나가 빛을 발하는 것도 잠시, 그리마의 왕 오트만 2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대전의 문이 터져 나가며 거대한 워해머를 든 검은 머리 기사가 나타났다.
“침입자!”
“침입자다!”
챙! 챙!
자신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귀족들과 나름대로 경지를 이룬 기사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대전.
‘죄다 눈깔이 맛이 갔군.’
굳이 상대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타이니가 그대로 마족을 향해 돌진하려는데.
[터져라!]
대전을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그 하찮은 적들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흡!”
머리로 내린 판단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녹턴을 정면에 앞세운 타이니가 그대로 마족을 향해 내달리고.
꽈아아아아아아앙!
이내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맹렬한 충격파가 대전을 덮쳤다.
한순간 대전에 불어닥친 피바람, 그 가운데서 전신에 피 칠갑을 한 기사가 튀어나왔다.
“X 같은 경험을 선물해 줘서 고맙다! 쌍X아!”
쩌렁쩌렁한 고함과 함께 그 원흉을 향해 휘둘러지는 워해머.
하지만 그 앞에 내밀어진 것은 방금의 일격에도 터져 나가지 않은 몇 사람 중 하나, 금색 왕관을 쓴 노년의 사내였다.
‘왕!?’
그그극.
아무리 타이니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휘두르던 녹턴에 제동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의 망설임이었지만.
“시간 줘서 고마워.”
쾅!
“큭!”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전해진 강력한 충격이 그의 몸을 다시 대전의 중심으로 날려 버렸다.
“이런 젠장!”
콰콰콰콰콰콰콰.
분노하는 타이니를 향해 연신 쏟아지는 피의 화살들.
하지만.
파바바박.
한순간에 패턴을 파악한 타이니는 그것들을 가뿐히 피했고, 동시에 벽과 허공을 밟으며 다시 마족에게 접근했다.
“역시 대단해. 하지만…….”
왕의 뒤에 숨은 붉은 머리 미녀가 요염하게 웃으며 분홍빛 마기를 움직인 순간.
[일어서라!]
꽈아아앙!
피바다 속에서 거대한 붉은 손이 솟구치며, 릴리스를 향해 쇄도하던 타이니를 그대로 후려쳤다.
그그그그그.
“짜증 나게!!”
또다시 튕겨 나간 타이니가 이를 갈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눈앞을, 피로 이루어진 10m가 넘는 거대한 인간형 괴물이 막아서고 있었다.
“캬아아아아아!”
피가 응집되어 녹아내린 듯한 얼굴, 입 같아 보이는 구멍에서 쏟아 내는 괴성.
꿈에 나올까 무서운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타이니에게는 그저 짜증 나는 광경일 뿐이었다.
덩치가 크면.
“때릴 곳도 많지!”
타이니식 전투 살법 1식, 벼락 떨구기.
꽈아아아아아앙!
한순간에 지면에서 튕겨 나가듯 돌진함과 동시에 휘둘러진 녹턴이 괴물의 몸을 세로로 가르며, 그 정중앙에 존재한 마기의 핵을 단숨에 깨트렸다.
“끼에에에에에…….”
위압감 있는 등장이 무색하게, 한순간에 허무하게 박살 나 흩어지는 핏덩어리 괴물.
“쿨럭.”
그에 타격을 받은 듯 살짝 휘청거리는 릴리스를 향해, 타이니는 무서운 기세로 재차 쇄도해 갔다.
“과연…….”
붉은 머리 미녀의 냉소와 더불어 다시 한번 전면으로 내밀어지는 왕.
하지만.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녹턴을 휘두르는 타이니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무엇으로 가로막건 그대로 널 박살 내 버리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일격.
“……미친놈이로구나.”
그에 눈빛이 변한 릴리스의 뒤쪽에서 보랏빛 홀이 달린 지팡이가 솟구쳤고, 이내 순식간에 분홍빛의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끅!”
짧은 비명과 함께 왕의 몸이 그 마법진에 빨려 들어가려 하던 순간.
왕관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번뜩이더니, 그의 몸이 다시 튕겨 나왔다.
“이……!?”
릴리스의 표정이 구겨짐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아앙!
그그그그극.
순식간에 그녀의 전면에 형성된 보호막과 녹턴의 노을빛 오러가 충돌하며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물론.
“발악은, 이게 끝이냐, 마족!”
우드드득.
이를 가는 타이니의 살벌한 미소와 함께 그의 전신이 부풀어 오르며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새하얗게 변하는 순간.
그 힘겨루기는 급격하게 한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
“이, 이런……!?”
“흥!”
코웃음과 함께 보호막이 깨어져 나감과 동시에 녹턴이 그대로 목표를 타격했다.
꽈아아아아아앙!
우르르르르릉.
폭음과 함께 퍼진 충격파. 대전의 모든 유리창이 깨어지고 건물 자체가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콰직.
“……씁!”
녹턴이 부순 것은 마족의 본체가 아니라 보랏빛 홀이 달린 지팡이 하나뿐이었다.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은 알아봤지만, 설마 녹턴의 일격을 막아 낼 줄이야.
심지어 박살이 나며 흩어지는 지팡이 사이로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영혼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그 순간 타이니의 소울 사이트는 이미 사라진 마족의 존재감을 찾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 광휘의 기사가 전하를 살해했다!!
어느새 꽤 멀어져 버린 마족의 존재감을 찾아냄과 동시에, 궁전 안에 황당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게다가 이 상황까지 미리 대비한 것인지, 대전 바깥의 기사들이 일제히 안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들의 살기가, 타이니가 아니라 그의 곁에 널브러진 왕을 향하는 것까지 고스란히 느껴졌으니.
“하…….”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왕을 구한다고 저 마족을 놓칠 수는 없는 노릇.
‘평판 따위…….’
그대로 무시하고 적을 쫓으려던 순간.
쾅!
대전의 문 쪽에 쌓인 잔해가 터져 나가며 아르곤이 튀어나왔다.
“타이니! 기, 기사들이 미친 듯이 쫓아……!”
잘됐다.
“왕을 보호해라, 아르곤!”
“……뭐?”
“지키라고!!”
“내, 내가!? 야!? 나부터 살려……!”
달려 나가던 기세 그대로 왕의 덜미를 잡아채 아르곤에게 집어던진 타이니가 멀어지는 마족을 향해 가속했다.
“놓칠까 보냐!”
콰아아아앙!
‘넌 꼭 내가 쳐 죽인다.’
부드득 이를 가는 타이니의 신형이 점점 멀어지는 존재감을 쫓아 번개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 이, 이런 X바!
그 뒤편에서 터져 나온 동료의 고함 소리는 애써 무시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