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이놈이 어디……?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형태의 영토를 가진 락스턴 왕국의 서부 국경과, 그 남부에 위치한 페이든 왕국의 서부 국경 일부.
아스란 제국과 맞닿아 있는 연합의 국경선에서는 긴장감이 날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그중에서도 락스턴 왕국 서부 끝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국경 도시 ‘이너빌’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고 가는 수많은 상단 때문에 거의 항상 개방되어 있던 서쪽 성문은 굳게 닫혀 열릴 줄을 몰랐고, 동쪽 성벽으로는 지속적인 병력이 유입되고 있었으니.
“이게 무슨 일이래.”
“제발 전쟁만은 아니길…….”
“이미 폐하가 선전 포고를 했잖아.”
“그래도 다른 왕국이 어떻게 나올지는…….”
웅성웅성.
가장 큰 국경 도시이자 무역 도시이기도 했던 이너빌의 주민들은 하루하루 시름만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너빌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락스턴의 정예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장님, 단순히 제국이 다가 아닙니다. 지금 그 뒤에는 엘프와 오크, 수인족까지 있습니다. 이대로는 연합이 파멸할 뿐입니다.”
언젠가 오러유저가 될 수 있을 거라 기대받는 락스턴 왕국 기사단의 미래, 대륙 7대 신성(新星) 중 한 명인 폭염의 기사 로안나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그 말에 대다수의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결정권자인 왕국 서부 변경백 클린스만은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이미 전하의 뜻이 세상에 공표되었다. 우리 기사들은 그 뜻을 따를 뿐.”
“그러다 왕국이 망해도 말입니까!!”
“어허! 불경하다!”
쾅!
쩌저적.
클린스만의 금속 부츠가 대전의 바닥을 내리찍자 대리석이 그대로 깨져 나가며 기사들 사이로 강렬한 기세가 퍼져 나갔다.
로안나가 대륙 7대 신성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이제 거의 오십 줄에 다다른 클린스만 역시 챌린저급이니 그 연륜과 함께 쌓아 온 묵직한 마나는 그녀를 찍어 누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젊은 만큼 혈기가 왕성하고 그 붉은 머리와 불꽃 속성처럼 성정도 강렬한 로안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지 않았다.
“정녕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건 왕국이 망하는 길입니다.”
“3국의 중의가 모였으니, 연합 법에 따라 다른 왕국들도 곧 참전할 것이다.”
“그래도……!”
역부족이다.
로안나가 그렇게 변론하려는데.
“그만!! 로안나 경! 지금 그대가 하는 말이 아군의 사기를 꺾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가!?”
클린스만의 호통에 그녀는 그대로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전쟁을 시작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토록 영민하시던 스승님이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
답답한 속마음을 가눌 길이 없는데,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준 건지 클린스만이 그녀를 달래듯 조금은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아네, 로안나 경. 그리고 그대들 모두. 하지만 나는 전하께서 깊은 뜻을 가지고 하신 일이라 믿고 있네.”
“……이 무모한 전쟁이 말입니까?”
이번에는 로안나가 아닌 다른 기사들 틈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결투와 전쟁에서 공적과 명예를 찾는 기사들의 눈에도 작금의 사태가 이상해 보인다는 말.
그에 클린스만이 눈을 더욱 매섭게 뜨며 좌중을 노려보았다.
쿵.
“이대로 제국의 전횡을 보고만 있다가는 우리 왕국도, 연합도 그 흐름에 휩쓸려 버릴 것이야. 연합의 힘을 모아 그 흐름에 저항하거나 주도권의 일부를 가져오는 것. 그것이 전하를 비롯한 다른 왕국의 뜻일 것이네.”
그에 대다수 기사들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밝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뜻일 것이다?’
로안나를 비롯한 눈치 빠른 소수는, 그것이 클린스만의 희망 사항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표정이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클린스만은 조금이나마 풀어진 대전의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리고자 희망적인 이야기를 이어 갔다.
“현자의 탑 대표도 곧 도착한다고 하니, 연합의 총력이 모이는 것도 시간문제다. 제국도 어느 정도는 양보하게 되겠지.”
“현자의 마탑에서 직접 참전한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대표를 보내지 않았겠나. 심지어 여태 외부 활동도 안 했던 기대주라고 하더군.”
“기대주요?”
“나도 믿을 수 없지만, 전해 오는 소식으로는 20대 중반도 되지 않았는데 챌린저급에 6서클 마법사라더군.”
“예!?”
그 말에 모두의 얼굴에 불신의 기색이 어렸다.
늙어 죽기 전에 챌린저급이나 6서클 마법사 중 하나에만 도달해도 대단한 전력이라 평가받는 것이 대륙의 현실인데, 20대 중반에 그 둘 모두를 달성한 천재가 있다고?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전하께서 직접 확인하신 사항이니 사실일 걸세.”
그 순간에는 로안나를 비롯해 내내 회의적이던 기사들의 얼굴에도 안도하는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왕국 연합의 전력은 6왕국에 현자의 마탑까지 더해서 7개의 왕국이 합쳐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세간의 인식.
하지만 실제로는 현자의 마탑 출신들이 각 왕국의 궁정 마법사로 존재하면서 그곳 소속 마법사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니, 마탑의 전력이 왕국 연합 중 최강이라 봐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현자의 마탑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오직 외세의 침략을 받을 때뿐이었으니, 클린스만이 전한 소식은 절대적으로 암울한 미래를 예상하고 있던 기사들에게는 그야말로 구원의 빛과 같았다.
“그 천재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을 걸세. 그러니 우리 모두가 힘내서, 제국의 위협에서 왕국을 지켜보세나.”
그 와중에 정작 선전 포고를 한 것이 왕국 연합이라는 사실은 쏙 빼고 이야기하는 클린스만.
왕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왕의 명령에 따라 적국을 침략해야 하는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말에 태클을 걸 기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쾅. 쾅. 쾅!
- 백작 각하! 큰일 났습니다!
대전의 문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모두의 안색이 굳어질 때.
끼이이이이이.
“각하! 아르곤 경이 사, 사라졌습니다!”
“뭐!?”
억지로 문을 열어젖혀서 대전 안으로 뛰어 들어온 한 기사가, 그들이 잡고 있던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사라져 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 * *
“이쯤 어디 있을 텐데. 어디쯤이려나…….”
거대한 늑대를 탄 검은 머리 청년이 ‘구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가 타고 있는 늑대는 주변에 흐르는 구름이 신기한 듯 연신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이 정도는 생전에도 올라와 본 적이 없는 높이였던 것이다.
아무리 공간 밟기라는 특성이 있다 한들 늑대는 원래 육상의 생물. 더구나 높은 곳일수록 마나 소모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도 했기에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닐 수는 ‘없었던’ 월랑이었다.
특히나 안 그래도 육중한 자신의 몸에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질량을 가진 주인까지 태우고서는 더욱 힘들었다.
“킁. 킁. 키힝!”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주인이 중력의 속성을 다루는 데다가, 현재 월랑의 본신은 네 발과 척추 부근을 제외하면 반영체화되어 거의 무게가 없는 상태.
반정령화로 주인에게 빙의하는 것보다 부담도 적고, 계약자가 정령 합신을 쓴 건 아니더라도 등에 올라타서 함께하는 상태였기에 공간 밟기의 능력은 훨씬 증폭되어 있었다.
그런 조건이라면 몇 시간 정도 이 고도에 떠 있는 것 정도야 그리 어렵지 않았으니, 주인에게 빙의되어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던 것이다.
“신기하냐?”
“컹!”
기분 좋단다.
타이니는 월랑의 반응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몸이 가벼운 건 새롭게 얻은 초월무구, 바람의 지배자 덕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아니야.’
타이니의 시선이 자신의 발 크기에 맞게 자동으로 조정된 금속 부츠를 스치다가 다시 월랑에게 향했다.
‘오늘 유난히…….’
월랑의 기술을 쓰는데 부담이 적었다.
정령과의 일체감이 확실히 느껴질수록 컨디션이 상승하는 것을 넘어서 모든 능력 자체가 증폭되는 것은 정령술사로서 당연한 일.
하지만 이렇게까지 체감이 될 정도라면, 자신이 불과 얼마 전에 비해서도 한층 성장했다는 말이 된다.
오러바디에 대한 힌트를 얻으며 마나유저로서 성장한 것과는 별개의 일.
‘정령술사로서도 성장했다고? 내가? 특별한 계기가 없었는데……?’
전생의 경험 덕에 오러유저로서의 성장은 착실하게 진행 중이었다. 익시더급에 오르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
하지만 정령술은 애초에 그 계약부터 조금 억지였던 만큼, 자신이 스피릿유저의 경지에 오른 것도 사실상 성장한 영혼력의 보정을 받아 이룬 기적에 가까운 성취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느낌은 마치 자신의 무력이 오를 때마다 정령술도 같이 성장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더 격이 높아진 영혼은 그 짐작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에스티나는 별개의 것처럼 말했었는데?’
사실 그게 정상이었다. 한 가지 이능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다른 이능의 수준도 높아진다면, 성취가 늦어진다는 이유로 멀티 클래스 능력자가 희귀해질 리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자신에게만 벌어진다면.
우웅.
“……너냐?”
“컹?”
“아니, 너 말고. 잠깐만…….”
타이니의 시선이 가볍게 진동하며 노을빛 마나를 뿜어내는 어깨 갑옷을 향했다.
‘아니무스…….’
장착하는 것만으로 육체 능력을 강화시키고 정령술이 상승할수록 영혼력까지 증진하는 초월무구가, 그의 의념에 반응하고 있었다.
‘정령술의 성장이 네 덕분이라는 거냐?’
처음 발견했을 당시에는 어떻게 조건도 능력도 자신에게 딱 맞는 무구가 있을까 하고 기뻐했을 뿐이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긴 했다.
‘영혼력은 그렇다 치고, 다른 부수 효과도 육체 강화라니? 이건 정말 정령술을 기반으로 무술이나 다른 능력을 증폭시키기 위한 무구 같단 말이야.’
그런데 무력이 성장함에 따라 정령술도 깊어지는 효과까지 있었다고?
마치 처음부터 정령술을 사용하는 멀티 클래스 능력자를 성장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신화시대에 비롯되어 현세까지 전해진 고대 마법의 파편, 룬어.
그 작고 복잡한 룬어를 일정한 마나까지 더해서 새길 수 있는 장인이나 마법사가, 희귀한 재료를 조합해서 희박한 확률로 만들어 내는 초월무구.
아직까지 그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밝혀지지도 않았으니, 이런 특이한 초월무구가 존재한다 해도 이상할 바는 없었다.
그저 아니무스의 몰랐던 능력을 이제야 인식한 것이 기꺼울 뿐.
더구나 덕분에 새삼 깨닫게 되는 것도 있었다.
‘월랑의 반영체화. 이거, 오러 분신에 확실히 적용할 수 있겠어.’
정령술의 경지가 깊어짐에 따라 최근 고민하던 기술의 실마리까지 풀려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짝.
“자, 자. 지금은 아르곤 녀석부터 찾고 생각하자.”
“킹?”
“별거 아니야. 집중.”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른 타이니는 다시금 눈에 마나를 집중해서 지상을 살피기 시작했다.
물론 마나를 눈동자에 집중한다고 해도 시력이 좋아지는 데에는 한도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 마나 감응력까지 극대화시키면.
우우웅.
‘눈 빠질 거 같네.’
시각에 집중된 마나가 지상에 분포된 기운들을 어렴풋이 감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검제와 나눈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 상황이 불리하다고 탈영을 한다고? 그것도 그 수준의 천재가?
- 충분히 그럴 놈입니다.
- ……하. 그건 그렇다 쳐도, 그런 자가 작정하고 탈영을 했다면 어떻게 찾으려고?
- 근처에 있을 거거든요.
- 뭐?
- 보신을 위해 탈영하긴 했지만, 또 조직이나 동료들의 추궁이 두려우니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 엥?
- 상황 봐서 복귀할 수도 있게, 전황을 살필 수 있는 곳에 짱박혀 있을 겁니다. 물론 튀기도 쉬운 곳에 말이죠.
- ……그런 놈이 10대 기사라고?
- 예.
- 써먹을 수는 있는 놈이냐?
- 예, 구슬리긴 쉽습니다. 왜냐하면…….
피식.
옛일을 생각하니 다시 웃음이 나왔다.
‘자, 어디 있냐 아르곤.’
이윽고 이미 초월 수준에 이른 그의 마나 감응력이, 까마득한 지상에서 독특한 패턴으로 얽혀 있는 특이한 마나 파장을 찾아냈다.
역시는 역시.
‘아르곤식 마력회로. 너무 잘 보인다. 약점 여전하네.’
타이니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걸리고.
“가자, 탈영병 잡으러.”
“컹!”
그 순간 은빛 유성이 구름을 뚫고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