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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258화 (258/500)

258화. 전쟁 선포

왕과 1순위 후계자가 1년 정도 사이에 연달아 암살되는 비극이 일어난 웨어비스트.

그 충격이 완전히 가시기도 전에 다시금 왕성이 시끌벅적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심지어 그에 관련해서 충격적인 소문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광휘의 기사 타이니가 늑대의 궁 테러의 주범이다.

그가 대장군 문나이트까지 습격하여 납치했다.

악마추종자들의 조직, 말룸 박멸을 주도한 영웅의 이름이 뜬금없이 튀어나온 것이다.

더구나 제국 측에서 체베르가 악마추종자의 주구라 주장했던 일까지 맞물리자, 그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납치되었다던 문나이트, 실버 팽이 불과 하루 만에 다시 라이칸으로 돌아오면서, 막 라이칸 밖으로까지 퍼지려던 소문은 금세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이어진 실버 팽의 공언은 다른 의미로 웨어비스트를 들끓게 만들었다.

- 늑대의 궁 테러는 말룸에서 소환한 마족이 벌인 일이다.

- 웨어비스트는 제국과 오크, 엘프와 연합하여 말룸의 잔재와 그 마족을 처단하는 일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마족?”

“갑자기?”

“그건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괴물 아니야?”

불신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민간에서 시작된 소문도 아니고 왕국 최고 권력자의 발표였기에 그 말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웨어비스트에서 제국을 넘어 왕국 연합에까지 전해질 정도로.

-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제국이 우리 연합을 압박하려는 수작……!

애초에 제국이 웨어비스트를 삼키기 위해 수작을 부린다고 주장하던 왕국 연합은 그 역시 헛소문이라며 일축하려 했지만.

제국의 사절단이 문나이트만 남겨 놓고 그대로 제국으로 돌아갔다.

아스란 제국, 웨어비스트와의 오랜 원한 관계를 잊고 우방으로 선포.

뒤이어 퍼진 소문과 제국 황실의 발 빠른 대처에는 그들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설마 제국이 진짜?

- 그럴 리가…….

하지만 왕국 연합의 불신과는 별개로 정세는 빠르게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 엘븐하임, 오크 연합, 아스란, 웨어비스트가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려 한다.

- 목표는 악마추종자들과 마족의 박멸.

- 대륙 중부와 서부에 이제 전쟁은 없다!

종족과 나라를 막론하고 모든 민중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발표가 더해진 것이다.

민중들로선 악마추종자를 잡는다는 등의 뜬금없는 소리보다, 당장 최대 분쟁 지역에서 전쟁이 없어진다는 소식에 더 관심이 가는 게 당연했다.

“이러다 정말 대륙에 전쟁이 없어지는 거 아냐?”

“에이, 그럴 리가.”

“오크들은 그래도 자기들끼리 싸울걸?”

“그래도 국가 간 전쟁은 확 줄어들 거 같은데…….”

“이렇게 되면 다른 곳도 다 조약을 맺게 되려나?”

“그건 아니겠지.”

“그래도 그럼 좋겠다.”

“그거야 뭐…….”

세상의 변화에도 여전히 그들만의 세상에서 나오지 않는 테르티우스, 인류의 ‘세력’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남해의 어부 연합.

그리고 타락했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고 주장하는 중앙 신전과, 제국과 더불어 인류의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인 왕국 연합까지.

세간에는 그 모두를 묶는 범인류 연합에 관한 이야기까지 스멀스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은 제국의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연합의 수뇌부들에게 두통을 안겨 주었다.

* * *

“이중의 술수를 전부 힘으로 깨트린다……. 하, 참 어이가 없단 말이죠. 운명의 변수란…….”

화려한 궁전 안.

“더구나 마족이라……. 내 정보가 남았을 리는 없으니 추측이겠지?”

궁정 드레스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야한 옷차림의 붉은 머리 미녀가 그리 중얼거리자, 그 앞에 놓인 수정구 속 로브를 깊게 눌러쓴 사내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에게 정확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준비’는 다 잘되어 가고?”

[예. 말씀하신 대로 이제 곧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야지. 뒤를 생각하지 않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다 썼는데…….”

말룸의 전투원들이 마역에서 대다수 박살 나긴 했지만, 악마추종자들의 진짜 저력은 조직원의 전투력이 아니라 암중에 퍼져 있는 협력자들이었으니.

‘자신들이 사는 세상이 뒤집히길 바라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니. 인간들이란 참…….’

원래대로라면 온 세상에 혼란을 일으키는 데 쓰였어야 할 그 세부 전력과 자원들이, 이제는 다른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조리 동원되고 있었다.

고작 6개의 도시에 전부.

[아닙니다. 이 모든 건 릴리스 님 덕분입니다. 살아남은 모두가 흥분에 차서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만 마무리되면…….]

부르르 떨리는 격앙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릴리스의 얼굴에 다시금 요염하고 위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작업이 마무리되고 적합한 제물만 바쳐진다면 ‘문’이 열릴 것이다. 진정한 정화를 향한 문이.”

[충심, 충심으로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잔뜩 흥분한 사내가 분홍빛 마력에 잠식된 눈을 빛내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곳에서 그 제물을 위한 준비를 할 것이니, 마무리 잘하도록.”

[물론입니다!]

파지지직.

빛이 사라진 수정구를 들여다보던 릴리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지금 제국의 행사에 불만을 품은 분들이 이곳에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그 시선이 향한 곳. 새하얀 곱슬머리에 얹혀 있는 황금색 왕관 아래, 머리와 같은 색의 구레나룻이 얼굴의 반을 감싼 위엄 있는 인상의 주인이 멍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국이 세상을 주도해서는 안 되지요.”

어쩐지 어색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왕국 연합의 6왕국 중 넓은 평야를 비롯해 가장 큰 영토를 가진 그리마 왕국의 국왕, 오트만 2세. 칼 같은 논공행상과 철권통치로 유명한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응대했다.

그 이질감은 둘째 치더라도, 일국의 왕이 정체 모를 여인에게 존댓말을 하는데도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의아해하지 않았다. 격식을 지적할 법한 호위 기사들 역시 멍한 눈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서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모두 눈동자에 옅은 분홍빛 마력이 깃들어 있다는 것.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본 릴리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국이 대륙의 흐름을 주도해선 안 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정상적인 대화라기보다는 그저 같은 말을 반복하는 수준의 이상한 대화.

그러나 그 말에 담긴 마력은 다시금 늙은 왕의 머릿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물론이지요. 절대 제국이 연합의 우위에 서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만큼은 그의 멍한 눈빛에 생기가 돌아오고 투지까지 엿보이는 듯했지만, 릴리스는 개의치 않았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완벽한 세뇌란 대상을 아예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의식을 극대화시켜 술사의 목적에 맞게 이끄는 것이니까.

“자, 그럼 이 상황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국의 전횡을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저지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그럼 방법은요?”

“방법, 방법이…….”

잘 대답하다가 일순간 버벅이는 국왕의 모습에 릴리스가 살포시 웃음을 보였다.

이것은 한 가지 의식을 극대화시켜 놓는 부작용. 목적은 확고한데 제대로 된 방법을 찾지 못해서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야 술사가 이끌어 주면 된다.

“다른 방법이 딱히 없다면 ‘전쟁’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하?”

“……그렇습니다. 전쟁, 전쟁을 하면 됩니다!”

오트만 2세는 그제야 방법을 찾았다는 듯 격하게 동의하기 시작했다.

연합이 모두 뭉쳐도 제국을 이기는 것조차 확신할 수 없는 판국에 웨어비스트와 오크, 엘프를 등에 업은 세력과의 전쟁을 말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생각은 하더라도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할 말.

하지만 오트만 2세의 타오르는 듯한 두 눈은 격렬한 진심을 토하고 있었고, 그 눈을 보며 흐뭇하게 웃은 릴리스는 조용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전하. 그대로 진행하세요.”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던 그 순간.

갑자기 왕관이 푸른 빛을 발했고, 그와 동시에 국왕의 눈에 갈등의 빛이 서렸다.

“하, 하지만 저희 왕국의 힘만으로는…….”

국왕이 잡은 마지막 이성의 끈이었을까.

‘저 왕관, 떼어 낼 수도 없는 것이 끝까지 귀찮게 하는구나.’

릴리스는 인상을 쓰며 국왕의 머리에 있는 왕관을 노려보다가, 이내 다시 미소를 보이며 말을 보탰다.

“……락스턴 왕국과 페이든 왕국 역시 호응할 것입니다. 연합의 3국이 움직이면 연합 전체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 맞지요, 전하?”

“아.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우웅.

왕관의 푸른빛이 안타깝다는 듯 스러지고, 릴리스는 그제야 돌아서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전쟁. 전쟁이다.

‘오래전 정화되었어야 할 이 대지에 피와 죽음의 꽃이 필 것이다.’

그리고 그 피와 죽음은 거대한 운명을 흔들어 차원의 벽을 무너트릴 것이다.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다시금 정화의 때가 찾아오리라.”

릴리스의 미소가 진해질수록 국왕의 눈빛이 흐려졌고, 이내 그리마 왕국에서 시작된 흐름이 세상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 * *

그리마 왕국이 제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락스턴, 페이든 왕국이 호응했고 왕국 연합의 군사들이 락스턴 왕국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퍼진 소문에 세상의 이목이 왕국 연합으로 집중되었다.

“에이 설마…….”

“연합이 미치지 않고서야.”

“……헛소문이겠지.”

처음엔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세 왕국의 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민중들은 패닉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진짜!?”

“진짜라고!?”

“무슨 생각이야 대체!?”

6왕국 중에서도 강 3국에 속하는 그리마,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락스턴 왕국, 그리고 남부의 페이든 왕국이 호응했다.

정말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그 상황에 가장 다급해진 건 아무래도 1차 전장이 될 락스턴 왕국과 제국 동부 국경 지대의 주민들이었다.

극도의 긴장 상태가 되어 버린 국경의 분위기.

그 중심에서, 아르곤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절대 전쟁은 안 날 거라면서요, 스승님! 아으으.”

단정하게 빗어 넘긴 갈색 머리칼이 신경질적인 손길에 흐트러지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머리는 바쁘게 굴러가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오스턴 2세라면 제법 냉철한 왕으로 알려졌는데, 이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가능성은 둘 중 하나였다. 그리마, 락스턴, 페이든 세 왕국의 국왕이 다 같이 미쳐 버렸거나, 아니면 민간에 알려지지 않는 믿는 구석이 있거나.

‘후자겠지. 후자여야 하는데…….’

그래 봤자 최전선에 있는 이들에겐 그리 희망이 되어 주지 못할 것이었다. 그 믿는 구석이 튀어나올 때쯤이면 이미 이곳 락스턴의 최전방 병력들이 거의 괴멸 상태일 테니까.

그리고.

‘그 시체 중 하나가 내가 될 수도 있어.’

그 섬뜩한 생각이 떠오르자 아르곤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현재 그의 신분은 현자의 탑 장로의 제자이자 락스턴 왕실의 식객.

‘락스턴 왕실에서는 분명히 날 전쟁터로 보낼 텐데……. 이를 어쩐다.’

스승님이 유난히 자랑질을 해 놓은 덕분에 그는 이곳에서 거의 초인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었는데, 그 대가를 너무 비싸게 치르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공개된 신분이 신분인지라 이제 와서 튈 수도 없었다. 자신이 도망갔다는 얘기가 스승님에게 전해지는 순간 그대로 수배가 될 테니까.

그의 스승, 혹한의 마도사는 아무리 아끼는 제자라도 현자의 마탑의 이름에 똥칠을 했다면 칼같이 내칠 사람이었다.

그렇게 아르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아르곤 경! 전하의 호출입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 * *

“부탁하네, 아르곤 경.”

마도사의 제자일 뿐 정식으로 기사 작위나 귀족 작위를 받은 적 없는 자신을 ‘경(Sir)’이라 부른다.

사실상 용병이나 다름없는 자유 기사들에게도 쓰는 칭호긴 하지만, 그것이 일국의 왕의 입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그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따로 독대까지 하면서 하는 부탁이라니.

‘빌어먹을.’

아무리 생각해도 외통수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몸을 사리면서 연합의 그 ‘믿는 구석’을 기다려야겠다.

아르곤이 그리 결심을 다지는데.

“그대가 참전한다면, 현자의 마탑에서도 호응해 주지 않겠나.”

이어진 왕의 말이 너무 이상했다.

왕국 연합은 가장 오래된 국가인 셀던 왕국을 비롯해 현자의 마탑 시조께서 세운 카일 왕국과 그 안의 치외 법권 지역에 존재하는 현자의 마탑, 그리고 그 외 네 왕국이 제국에 맞서기 위해 뭉쳐서 만든 세력이다.

사실상 전쟁과 같은 거사를 벌일 땐 셀던 왕국, 아니면 카일이나 현자의 마탑에서 주도하거나 그들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진행하기 마련인데.

“……마탑과 얘기가 안 되어 있는 전쟁이었습니까, 전하?”

아르곤이 결례를 무릅쓰고 그리 물었을 정도로 왕의 말은 비상식적이었다.

그런데.

“연합의 흐름이 정해졌으니 마탑도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나는 단지 그 시간을 줄이고자 함일 뿐이네. 그래야 희생도 적어질 테니.”

그게 무슨 개소리냐.

심약한, 아니 신중한 성격의 아르곤이 순간적으로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말을 억지로 삼키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기운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어? 이거……?’

마탑의 모든 이가 극찬했던 그의 마나 감응력이 눈앞의 왕에게서 무언가 이질적인 힘을 느낀 것이다.

이내 아르곤은 자신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있던 왕의 눈을 더욱 주시하며 은밀하게 마법을 사용해 보았다. 락스턴 왕궁의 결계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왜 그러는가, 아르곤 경?”

락스턴 왕국의 국왕 로만 3세의 눈동자에서 희미하지만 확실히 감지되는 음침한 기운을 확인한 순간, 아르곤은 섬뜩한 느낌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전하.”

“그럼 내 제의를 수락하겠는가?”

“……물론입니다, 전하.”

그리 대답한 아르곤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로만 3세가 흑마법에 홀렸다. 빌어먹을, 제국의 주장이 사실인 거야!’

그렇다면 혹시나 기대했던 그 ‘믿는 구석’ 따위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건…….

‘악마추종자.’

그런 썩은 패에 자신의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절대 안 되지.’

그 순간, 아르곤은 탈영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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