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이게 무슨?
어둑해진 하늘, 어스름한 달까지 구름 속에 가려진 최고의 환경.
우우우웅.
타이니의 몸은 하늘로 내달리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반투명하게 변했다.
반정령화.
이 세상에 내려진 마나의 축복, 그 정점에 있는 정령의 특성을 반영하여 좀 더 마나와 자연에 가까워지기 위한 수련법이자, 여신이 정령사를 위해 내려 준 축복과도 같은 능력.
그 능력을 잠입용으로만 쓰는 무도한 정령사는, 오랜만에 다시 보는 늑대의 궁을 무거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저번처럼은 안 돼.’
당시에는 목표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대로 박살 내는 것만 생각했기에 그 한 방에 전력을 투사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림을 구해 내야 하는 상황. 새삼 루나가 곁에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라프탄이 말해 준 위치 근처까지 최대한 조심히 들어가서, 그다음부터는 힘으로 뚫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았다. 시간을 길게 끌어 봤자 다른 방도가 생각날 리 만무했다.
“가자.”
나직하게 내뱉은 혼잣말과 함께 타이니의 반투명한 몸이 늑대의 궁을 향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가장 먼저 통과해야 할 것은, 늑대의 궁 전체를 감싸고 있는 외부 결계였다.
내부의 마나 동결 결계와는 달리 침입자를 걸러 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충격을 막아 내는 용도일 뿐이지만, 마나의 파동에 약한 반정령화 상태로 그 결계 안의 벽을 뚫고 스며드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반정령화 상태를 유지하더라도 열린 문이나 창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 말인즉 야밤에도 감시 병력이 가득한 곳을 지나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정도야 어렵지 않지.’
타이니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вл црааг.”
“ылур.”
“поеерад флакр, цоведы йлЦлк слагал.”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경계 병력의 머리 위로 반투명한 인영이 은밀히 나타나더니, 등불이 닿지 않아 그늘이 진 천장 구석의 어둠과 어둠을 타 넘으며 궁전 안쪽으로 순식간에 스며들 듯 사라져 갔다
정말 유령 같은 그 움직임은 반영체 상태에 중력 속성과 공간 밟기의 권능, 그리고 그림자의 법 운신법에서 깨달은 요령이 모두 더해진 결과였다.
‘왕의 영역 지하, 입구는 여기서 세 번째 기둥…….’
쏜살같이 늑대의 궁 중심부로 향해 가는 타이니.
그 아래, 평소보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두 배 이상 배치된 수인족 병력들은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во, цокд!?(어, 저기!?)”
“фто?(뭐?)”
“фтоыкл Йтвгыкз цдылклЕыьыуз?(뭔가 뿌연 게 지나갔는데?)”
“вд ещКд Ур вдаоыз.(이 새끼 또 이러네.)”
“ыо, ыщкл кьвшк Кьыпвьалкр пщЕцд?(너, 내가 그 약 끊으라고 했지?)”
“КьыпвоЕво!!(끊었어!!)”
그들 중 누군가가 천장의 어둠 속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반투명한 무언가를 보았다 한들 그저 스스로의 눈을 의심할 뿐.
하지만 거의 루나의 능력에 준하는 그런 잠입이 가능한 구역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제는 익숙하게까지 느껴지는 궁전 깊은 곳의 마나 동결 결계 안에서 반정령화는 절대 무리.
그렇다고 지하 감옥에 내려가기도 전에, 왕의 구역에 들어서면서부터 무력 충돌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반정령화 없이 맨몸으로 그림자 은신……. 하, 몇 번이나 쓸 수 있을까?’
아무리 범용성이 높은 자신의 마나바디라 하더라도, 그림자의 법은 마력회로 중에서도 독특함의 끝을 달리는 수법이기에 마나 소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
‘무리다 싶은 순간부터 바로 힘으로 뚫는다.’
조절을 제대로 못 하면 일을 벌이기도 전에 심각한 내상을 입을 터.
하지만 타이니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더 이상 동료를, 친구를 잃지 않는다. 절대.’
그렇게 이를 악문 순간.
그의 몸이 마나 동결 결계가 시작되는 지점을 통과하는 동시에.
스슥.
그대로 그림자로 화해 30여 미터 전방에 있는 병사의 그림자에 섞여 들어갔다.
“вьф?”
“врщ?”
“влыд клйцлкд вделвплы кдйтывд уьавоео…….”
코를 찡긋하며 뒤를 돌아보는 개 대가리 수인과 하이에나 수인.
뭐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타이니의 미숙함이 만들어 낸 허점을 살짝 감지한 것 같았다.
그러나 최소 익스퍼트급 이상의 수인족 강자들이 경비하는 구역이니만큼 이 정도는 각오했던 범위.
지금 그에게 그런 것에까지 신경을 쏟을 정신은 없었다.
‘후으읍.’
이미 육체에 걸리기 시작한 부하가 막대했다.
타이니는 흩어지려는 집중력을 간신히 부여잡고, 50m가 넘는 거리에 있는 다른 조 병사들을 향해 다시 한번 그림자 도약을 시전했다.
“воаал?”
“вьф?”
역시나 미약한 반응을 보이는 병사들.
하지만 그 정도는 무시하기로 했다.
‘끄으으. 앞으로 한 번만 더.’
오히려 연달아 시전한 덕에 그 한계에 대한 감을 잡았고, 지하로 가는 입구의 위치 역시 짐작할 수 있었으니.
‘간다.’
스슥.
“вьф?(음?)”
“врщ?(왜?)”
왕의 구역인 에르켐천의 지하에 위치한 왕족 전용 감옥 입구를 지키던 표범 수인이 찜찜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вл, влыш. мдкрыпщео кьаоыклйрл.(아, 아냐. 피곤해서 그런가 봐.)”
“вл, ыо вдчьа Цщ улвцдквдцд? ущсз вд елвпрлв воыцз Кьчылыш.(아, 너 이틀째 당직이지? 대체 이 상황 언제 끝나냐.)”
“кьаокз флавдул.(그러게 말이다.)”
병사들은 그렇게 돌아섰고, 그 직후에 창살 안쪽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입가에 옅은 피를 흘리며 소리도 없이 지하로 내려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더는 무리야.’
아무리 왕족 전용 감옥이라 해도 지하는 지하인 만큼 내부로 갈수록 그림자가 짙어졌지만, 타이니는 더 이상 그림자 은신을 쓰는 것을 포기했다.
이미 3번의 그림자 은신과 그림자 도약을 반복한 끝에 내상을 입고 말았다.
여기서 더 무리를 한다면 뭘 해 보기도 전에 자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힘으로 뚫는다.’
후으읍.
깊게 숨을 들이켜며 내상을 진정시킨 뒤 주먹을 움켜쥐었다.
좁은 복도, 그리고 지하. 녹턴을 휘두르기에는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니었으니, 정말 위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웬만하면 맨손으로 해결해 볼 생각이었다.
이미 그의 육체는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였으니.
“ытктыш!?(누구냐!?)”
끼이이이이잉.
철문을 조용히(?) 뜯어내고.
“фто, фтов!? вок!!?(뭐, 뭐야!? 억!!?)”
경계를 서던 익스퍼트급 병사의 발목을 잡아채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뻑! 뻑!
“цок……!”
뻐어어억!
“фдлсды……!”
쾅. 쾅.
수인족 해머(?)를 휘둘러 주변의 다른 병사들까지 모두 침묵시키는 데에는 불과 수 초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끄르륵.”
‘이 정도면 녹턴보다는 훨씬 조용하지.’
거품을 물고 널브러진 병사들을 보며 그렇게 자평하고 있는데, 그것이 허튼 생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소음이 위아래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삐이이이익!
- цоквдул!
- цоквьд сдфвдйвдул!!
“……빌어먹을.”
사림이 있는 곳은 지하 3층이라 했던가?
통로를 밀고 들어오는 무수한 기척들에 그의 표정이 저절로 구겨졌다. 이미 거의 마법 수준에 다다른 마나 감응력 덕에, 몰려오는 병력의 수준까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슈페리어급만 수십, 챌린저급도 있어? 이 감옥에?’
맞은편 통로를 바라보던 타이니의 시선이 자연히 바닥을 향하고, 그의 손이 등 뒤의 녹턴을 잡아챈 직후.
꽈아아아아앙!
노을빛 서광 속에서 지하 감옥의 재질과 결계의 모든 효과를 부숴 버리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지하 감옥의 바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꽝!
꽈아아아앙!
우르르르르릉.
콰콰콰콰콰콰.
천장이 무너지고 자욱한 먼지가 쏟아지는 늑대의 궁 감옥 지하 3층.
그 너른 공간에서 창살 사이에 갇혀 있는 것은 은빛 털의 늑대인간 하나였다.
죄인을 가두는 곳 같지 않게 비단 침대와 넓은 개인 공간이 별도로 구비되어 있는 화려한 감옥.
하지만 그 안에 있는 늑대인간은 죄수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목과 사지에 범상치 않은 푸른빛이 번뜩이는 족쇄를 차고 있었다.
천장이 무너지는 소리도 못 들었는지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정자세로 앉아 있는 늑대인간은 미동조차 없었는데.
“구하러 왔다, 사림!”
흙먼지 사이에 울려 퍼지는 공용어에 늑대인간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눈을 뜨지는 않았는데.
- фдчвдул!
- 삐이이익!
위쪽에서 경계 병력의 호통이 들려오자, 먼지를 걷어 낸 침입자가 늑대인간을 보며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야! 지금 시간 없…… 젠장, 지독한 걸 달고 있네.”
그의 모습을 본 타이니는 이내 감각만으로 족쇄에 담긴 ‘마법’을 알아보고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뱉어 냈다.
“비켜 봐!”
그 고함에도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실버 팽을 두고, 타이니는 지체 없이 녹턴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앙!
족쇄와 마찬가지로 마법의 힘이 깃든 흑강철 철창들이 녹턴에 의해 종잇장처럼 뜯겨 나가며 구겨졌다.
그렇게 한순간에 실버 팽 앞에 다가온 타이니는 그의 전신을 구속하고 있는 다섯 개의 족쇄 중 하나를 붙잡고 노을빛 오러를 끌어 올렸다.
우우웅.
“이까짓 마나 구속 정도야……. 흡!”
찌지지지지징!
늑대의 궁 내부 결계의 효과에 마나를 흩어 버리고 제한하는 힘까지 더해진 상황이었지만, 단단하기 그지없을 흑강철 재질의 족쇄는 타이니의 오러를 견디지 못하고 맥없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따아아아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끊어지는 목의 족쇄.
그와 함께 실버 팽의 눈이 반쯤 떠지는데.
“조금만 참아라.”
한 번의 성공으로 요령이 생겼는지, 그 직후부터 타이니는 더욱 빠르게 나머지 족쇄들을 끊어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가 다섯 개의 구속구를 전부 끊어 내고 나자 실버 팽의 눈이 완전히 뜨였다.
“역시 와 줬구나, 타이니.”
지나치게 차분한 음성에 살짝 의아해하는 찰나.
- сдфвдйцлаьа цлйвл!
그 순간 그가 뚫어 버린 천장 위에서 수십의 인영이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감사의 말은 됐어. 일단 나가자!”
타이니가 자연스레 녹턴을 움켜쥐며 돌아서는데, 순간적으로 뒤쪽에서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
‘읏!?’
반사적으로 황급히 몸을 비틀어 보지만.
푸우욱.
“커, 커윽…….”
노란 뇌전의 오러를 두른, 날카로운 늑대인간의 손톱이 옆구리를 꿰뚫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쾅!
“큭!”
타이니가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녹턴에 습격자 실버 팽이 벽으로 튕겨 나갔지만, 녀석은 큰 타격이 없는 듯했다.
불시에 당한 기습으로 중상을 입은 탓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고, 더구나 그 대상이 친우인지라 타이니의 일격에 의지가 제대로 담기지 않은 것이다.
“끄응. 너, 너 왜……!?”
“역시, 이 상황에서도 피하고 반격을…….”
살짝 충격을 받은 듯한 실버 팽이 먼지를 털어 내며 몸을 일으키더니 뒤쪽의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крлвптдвьд кделаьа цлйвлырпвлал! цзктккрл пгйелввзео вивнвплы мщкл урда човдыд.(광휘의 기사를 잡아 놓아라! 제국과의 협상에서 유용한 패가 될 것이니.)”
쿨럭.
“사, 사림! 뭐, 뭐 하는 거야!”
피를 토해 낸 타이니가 버럭 고함을 지르는데도, 실버 팽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개인적인 유감은 없다, 타이니.”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데.
“ущцлвктывьд фгввдул! цлйвл!(대장군의 명이다! 잡아라!)”
떨어져 내려온 인영 가운데 독특한 중갑을 입은 거대한 갈색 곰 수인을 필두로, 수십의 수인족 병사들이 타이니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꽈아아아아아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그들이 존재하는 지하 3층 감옥의 벽면이 갑자기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