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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253화 (253/500)

253화. 예상치 못한 변화

끼이이이.

“잰슨 경, 이제 소란 피우시면 안 됩니다.”

“물론이오.”

친절하게 공용어로 충고해 주는 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타이니는 철창을 나왔다.

예상대로 라이칸에는 난리가 났지만, 말을 타고 달려도 3일이나 걸리는 이곳 가츠에서 그 사건의 흔적을 찾으려 하는 이는 없었다.

설령 있다 해도, 그동안 감옥에 있던 이를 의심하지는 않을 테고 말이다.

다만.

“정말 조심하셔야 할 거요. 요새 인간족을 향한 경계심이 더욱 커졌으니, 아무리 익스퍼트급이라도 소란을 피우면…… 아시겠소?”

자신의 목을 슥 그어 보이며 설명하는 말 인간 병사의 말대로, 왕궁 폭파가 제국의 짓이라는 소문 때문에 인간족에 대한 겁박이 많아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교대(?)하러 왔을 때 제이에게 들은 바로는 상단에서도 물건 판매는커녕 환불만 많아졌다고 하던가.

심지어는 종종 음식물 쓰레기가 날아온다고도 했다. 타이니로선 가장 위험한 임무가 끝난 마당에 적당히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제이에게는 제법 스트레스였는지 상당히 초췌해 보였다.

- 저는 지금 상인입니다. 손해에 민감한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가짜 신분에 그렇게 집착하는 건 병 아닌가 싶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 남은 것은 실버 팽이 웨어비스트를 수습하고 제국이 연합을 압박하여 연맹을 약속받는 것뿐이다.

분위기만 생각대로 풀린다면 제이 일행을 무사히 데리고 귀환하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그렇게 돌아가게 되면.

‘황실에서 테러를 일으킨 그 여자를 찾아야지.’

월랑의 눈으로 본 흐릿한 인상의 여자를 떠올릴 때면 한없이 찜찜한 마음만 가득했다.

‘지금쯤이면 수습도 끝났을 테니, 빨리 돌아가서 상의해 봐야지. 영감이라면 뭔가 알아낸 게 있을 거야.’

감옥에 며칠 있지도 않았는데 이상할 정도로 답답해서 한숨을 내쉬는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잰슨 경.”

멀지 않은 곳에 제이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다만 그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가짜 신분에 집착하는 건가 싶어서 절로 웃음이 나오는데, 굳은 얼굴의 제이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더 이상의 문제는 정말 사양하고 싶은데.

타이니가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눈초리로 제이를 바라보자.

“일단 나가서 얘기하시죠.”

병사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제이가 무거운 표정으로 돌아섰고, 돌아가는 길의 분위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Коцгал!(꺼져라!)”

“Коцгал, вдыклыырфуьа!(꺼져라, 인간 놈들!)”

“втад Улввзео кщетцлк йтада ещвклкфлал!(우리 땅에서 개수작 부릴 생각 마라!)”

내성을 나서자마자 쏟아지는 적의 어린 눈초리들.

들은 대로 정말로 음식물 쓰레기까지 섞여서 날아오는데, 그보다는 제이의 표정이 더욱 신경 쓰였다.

그렇게 간신히 돌아온 상단의 숙소. 청소도 해 주지 않은 듯 엉망진창이 된 방 안에서 타이니는 비로소 전후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웨어비스트에서 상행은커녕 이동조차 제대로 허가를 안 해 줄 분위기입니다. 인간 상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말려 죽일 생각인 것처럼요. 돌아가는 길이 가시밭길, 아니 불꽃 길이 될 것 같습니다.”

“휴, 난 또 큰일 난 줄 알았잖아.”

“예?”

“조금 기다리면 알아서 분위기 바뀔 거 아냐. 사절단이 라이칸에 들어가지 않았어?”

그 말에 제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말씀을 먼저 안 드렸군요.”

왜 그러냐 또, 불길하게.

“……진짜 뭐가 잘못된 거야?”

“아니,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른다고?”

“사절단은 분명 라이칸에 들어갔고, 문나이트를 비롯한 그 측근 군단장 3인방이 라이칸에 모여서 새로운 왕을 옹립하겠다는 예고를 했습니다.”

“계획대로 된 거잖아?”

“예. 분명히 그런데…….”

“그런데?”

“그 직후부터 오히려 웨어비스트 내부에서 인간족에 대한 통제가 심해지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뭐?!”

이게 무슨 소리야?

“실버 팽은?”

“그게, 소식이 없습니다. 이쪽에서 직접 연락할 방안은 만들어 두지 않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뇌물을 먹여 둔 천인장이 은밀히 알려 준 사실인데, 지금 갈색 바위 군단 상부에서 이상한 명령이 내려왔답니다.”

“무슨?”

“인간족의 기사급 이상의 강자 중 일주일 전의 그 사건 전후로 2주, 그러니까 한 달 사이 갑자기 도시에 나타났거나 수상한 거동을 보인 자들은 전부 잡아들이라는 명령이요. 잰슨 경은 그 전에 감옥에 있었기에 풀려난 겁니다.”

“…….”

그 말은 아무리 행복 회로를 돌려도 좋게 해석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거 같지?”

“예, 단단히요.”

다시금 두통이 생기는 것 같았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머리를 굴리다 보니, 제국을 떠나올 때 들은 검제의 말이 떠올랐다.

- 아, 그리고 이건 희박한 확률이지만, 네가 일을 성공적으로 처리하고 사절단까지 무사히 도착해도…….

“……실버 팽의 측근들이 배반을 했다면 그가 권력을 잡지 못한 채 내부에 구금되거나 처형되고, 반제국파가 정권을 잡을 수도 있다고 했던가?”

“예.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상정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 씨……. 사림, 아니, 실버 팽 그 친구가 우리의 현재 신분을 알던가?”

“아니요, 모를 겁니다. 상단이라는 것 정도밖에는.”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나쁜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

이미 군단에 내려온 명령이 있다는데, 그것도 하필…….

“웨어비스트에 인간족 강자들이 머무는 경우는?”

“대부분 상단 호위죠.”

“설마, 실버 팽 그 친구가…….”

반제국파에 협조한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왕궁의 사건이 제국 측 짓이라 추정한다면, 그들이 인간족 암살자를 찾는 건 당연한 과정입니다. 당장은 문나이트 경을 의심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 경우가 더 문제야.”

실버 팽이 목숨을 잃었거나 그에 준하는 상태가 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안 돼. 이대로는 못 돌아가.’

그 낌새를 느꼈을까.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제이가 선수를 쳤다.

“일단은 제국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각하와 상의하시는 게 먼저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안 돼. 최소한 실버 팽은 구해서 돌아가야 한다. 초인은 나라 하나를 버리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전력이야.”

“나라 하나?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그런 게 있어. 검제와 합의된 사항이야.”

“후…… 하지만 그러다 잘못되면 진짜 전쟁이 터지게 됩니다. 일단 돌아가서 의논을 하시고…….”

“그러다 사림이 죽으면? 그건 네가 책임질 건가, 제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타이니의 목소리에는 살기마저 담겨 있었고, 한순간 핼쑥해진 제이가 입술을 꽉 깨물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시는군요.”

“미안해.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그 친구는 반드시 구해야 해.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라도.”

단순히 친구를 구하기 위한 핑계가 아니었다. 군단장이나 마계 귀족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초인 전력, 특히 오러유저는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그 사실은 수없이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 인류를 위해서라는 말은 참…… 아직도 이해가 안 되네요. 말룸도 거의 처리한 것 같은데.”

자신이 모르는 정보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토해 내던 제이는 여전히 미동도 없는 타이니를 보며 한숨을 쉬고는 진짜 걱정거리를 꺼내 들었다.

“……만약 문나이트가 구금되거나 처형된 것이 아니라면요?”

“그럴 리가! 아무리 짐승 대가리들이라도 생각이 있으면 그 친구를 처형하진 못해!”

“……처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타이니 경.”

“그럼 뭐!?”

“……문나이트가 반제국파의 길을 택했다면요. 어찌하시렵니까?”

날카롭게 쏘아붙인 말에 잠시 망설이다 튀어나온 대답에는 타이니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

강림에 대한 이야기도 전생에 대한 이야기도, 사림은 모두 듣고 이해했다.

전사로서, 기사로서 명예와 긍지가 가득한 친구. 그런 친구가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리가 없다.

타이니는 그런 확신을 담아 대답했지만.

“……각하께서도, 경도 대체 얼마 전까지 제국의 적이었던 나라의 대장군을 왜 그렇게 신뢰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그 사정을 알지 못하는 제이로서는 타이니의 태도를 납득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

“……넌 어떻게든 상단을 추슬러서 제국으로 돌아가라.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요원들만 챙기고. 미안하지만 라프탄은 내가 데려가야 한다. 늑대의 궁 안에서 실버 팽의 위치를 찾으려면 그 녀석이 있어야 해.”

수인어를 할 줄 알고 은신에 특출난 녀석의 능력이 이번에도 꼭 필요했다.

사실상 제이와 블랙윙의 요원들 안위를 내팽개치는 이기적인 부탁이었지만, 한숨을 내쉰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가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화되었을 겁니다. 병력도요.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부디 실망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저주 같은 말이었지만, 제이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기에 타이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물론 애로 사항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 * *

“……왜 이 상황에 거길 다시 가? 죽으려고 환장했냐?”

미쳤냐고 묻는 듯한 눈빛.

강제로 차출된 정령사는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 죽든가, 그럼.”

스아아아아.

그 순간 진득한 살기가 자욱하게 엄습하자 정령사, 라프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다 결국.

“아, 진짜……. 부탁은 좀 친절하게 못 하냐? 씨.”

이내 구시렁대며 일어서는 라프탄.

그 말에 양심이 찔렸을까. 그를 겁박하던 타이니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부탁한다. 한 번만 더. 그 친구는 꼭 구해야 해.”

“어……. 뭐, 그럼 내가 힘 좀 써 보지. 어험.”

그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던 건지, 잠시 버벅대던 라프탄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그러다.

“……근데, 나도 이런 경우가 되면 구하러 와 줄 거냐?”

“……너를?”

“뭐냐, 그 눈빛은? 나도 은근히 마음이 여리다고! 배려 좀…….”

마음이 급한 와중에도 타이니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이 녀석이 이런 인간이었던가?’

전생에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까지 망가졌던 것일까.

새삼 궁금증이 일어나는데, 이어지는 말이 조금 신경에 거슬렸다.

“짝친구는 구하려고 목숨을 걸면서 진짜 동료는 씨……. ”

“짝 뭐? 그게 뭔 소리냐?”

“아, 아니야. 간다, 가.”

계속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녀석 덕분에 들끓던 마음이 다소 차분해졌다.

그래서일까.

“난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절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보통 심각한 상황에서 이렇게 쉽게 나오는 말은 둘 중 하나다.

마음이 1g도 담기지 않은 거짓이거나, 수도 없이 다짐해 온 신념이거나.

그리고 당연히 이 말은 후자에 속했다.

그렇지만 애초에 능력이 되는 만큼 이용해 먹다가 또 타락하면 손수 처리하려 했던 전생의 악당에게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던지라.

“물론 진짜 동료라면…….”

이내 억지로나마 주워 담아 보려는데, 녀석은 이미 히죽 웃고 있었다.

“그래, 내가 바로 그 광휘의 기사님 동료니까. 잊지 마라. 약속한 거다?”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눈빛.

타락한 정령사의 흔적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 눈빛에 타이니는 억지로 하려던 변명을 도로 삼켰다.

자꾸 새어 나오는 헛웃음이 가슴속에 들끓는 조급함을 조금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것도 재주 아닐까?

“그래, 믿어라. ‘이번에는’ 어느 누구도 잃을 생각이 없으니까.”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나온 말.

그 말의 진짜 의미를 녀석은 모르겠지만, 어느새 타이니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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