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아르곤
“너는 천재다, 아르곤.”
“예.”
자신의 스승이자 현자의 마탑 장로, 혹한의 마도사라 불리는 아프만의 말에 아르곤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어이없어할 만한 태도였지만,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당연하게 여기니 방 안의 공기는 미동도 없었다.
“그래. 불과 12살에 자신만의 서클 마력회로를 개발하고, 20살에 6서클의 마법사 겸 챌린저급. 그 성취는 천재라는 말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어. 그러나…….”
스승이 한차례 뜸을 들인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지만.
“그 뒤로 3년간 넌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 장로회에서 너를 위해 제작해 준 그 칼의 가치가 무색하게도 말이다.”
직접 귀로 듣는 순간에는 담담했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성취가 없다니, 전혀 아니었다. 자신은 성장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탑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영역에 있긴 하지만.
“그건…….”
“아직도 그 마도 검술이라는 이상한 수법에 집착하는 것이냐? 마법도, 검술도 아닌 그 애매모호한 잡탕을?”
“……처음으로 그 가치를 인정해 주셨던 것은 스승님이셨습니다.”
“그래, 가능성은 있겠다 싶었지. 하지만 실패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난 분명 실패한 실험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더냐?”
그 냉정한 말에 아르곤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실패한 실험이 아닙니다! 마탑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마법입니다!’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시간을,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언제까지 달란 말이냐.”
냉엄한 한마디와 함께 스승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춤으로 향하자, 그것을 본 아르곤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허리춤에 감겨 있는 애검, 초월무구 마기아(Magia)를 잡은 손에는 뚜렷한 힘줄이 돋아났다.
감히 스승을 향해 검을 겨누려는 것으로 보일 법도 했지만, 그 순간 냉엄한 아프만의 입꼬리는 미미하게 올라갔다.
그는 자신을 닮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제자의 심리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아직 마기아를 회수할 생각은 없으니 그리 겁먹지 않아도 된다. 아무도 안 가 본 길을 걷겠다고 우기는 놈이 간은 여전히 콩알만 하구나.”
혹시나 자신의 말이 장로회의 걸작이자 초월무구인 마기아의 회수로 이어질까 봐, 방어 기제가 작동했을 뿐이라는 걸 알아챈 것이다.
“……신중한 겁니다.”
“그렇게 우기는 것도 여전하고.”
“…….”
아르곤은 침묵을 택했다.
천애 고아를 데려와 지금까지 길러 준 스승이었다. 자신에 관해 속속들이 다 아는 사람과 말싸움을 해서 이길 자신은 없으니, 그저 입을 닫는 것만이 상책이라.
‘더는 낚이지 않겠다.’
하지만 그 굳은 결심은 이어진 스승의 말에 금세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장로회에서 마기아를 회수하는 대신 다른 조건을 걸었다. 네가 당분간 마탑에서 나가 있는 것으로.”
“예!?”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랄까.
‘이게 무슨 소리야!’
한창 마도 검술의 기반을 잡아 가고 있는 지금, 마도에 관한 지식과 책이 무한히 쌓여 있는 마탑을 떠나라니?
십수 년간 쌓아 온 평정심이 흔들렸다.
“노, 농담하시는 거죠?”
익숙하지 않은 미소를 억지로 지어 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칼처럼 날카롭기만 했다.
“내가 농담하는 것을 본 적 있느냐?”
“……없죠. 그런데 왜, 왜 쫓아내시려는 겁니까? 마도 검술은 이제 그 기본 형태를 잡았으니 앞으로 발전만…….”
“아르곤.”
실로 오랜만에 표정이 무너진 아르곤의 입에서 장황하게 이어져 나오려던 말은 스승의 담담한 한마디에 맥없이 끊겼다.
“……예, 스승님.”
“나는, 아니 우리는 여전히 너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예?”
방금 쫓아낸다면서?
“우리는 네가 정체하고 있는 이유가 다양한 경험의 부재에서 오는 매너리즘이라 판단하고 있다.”
그 말에는 아르곤도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초인의 벽에 막힌 것을 정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불과 3년…….”
“그게 아니라는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6서클이 다 같은 6서클이고, 챌린저급의 수준이 다 똑같더냐?”
“…….”
“지난 3년간, 넌 조금의 발전도 없었다. 마법도, 검술도. 네 부탁으로 애써 초청한 채프먼 경은 네가 자신의 검술을 개조해 괴악한 것만 만들고 있다고 학을 떼더구나.”
“괴악한 것이 아니라 마도 검술입니다!”
“그래, 그것.”
“이론은 완벽하게 정립했습니다. 이제 실험을 해 가면서 증명을…….”
“그러니 그 실험을 해 보라는 말이다.”
“예?”
스스로 똑똑하다 자부하는 아르곤이거늘, 아까부터 자꾸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다.
“마탑을 나가서요? 아니, 여기보다 더 좋은 환경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씀을…….”
“실전.”
그 단호한 말에 아르곤은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
“실전……이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생소한 말.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스승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네가 말한 마도 검술도 결국 ‘검술’이 아니더냐. 너도 실전을 겪어 봐야 실력이 늘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아니 내 판단이다.”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마도 검술은, 마학을 다른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학문이자 기술입니다. 비록 검술이라 이름 붙였다지만, 절 그 가능성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는 전쟁터로 내모실 생각입니까?!”
절로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스승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래.”
“예, 그래……요? 예?”
“전쟁터로 내몰겠다는 뜻이다.”
“…….”
그 말에 아르곤은 입만 뻐끔거릴 뿐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언제나 냉철하고 이론적이었던 스승님, 혹한의 마도사가 갑자기 왜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것일까.
“전쟁이라니까 겁이 나느냐?”
“그럴 리가요? 저는 다만 효율을 따지는 것뿐입니다.”
대답은 빠르게 나왔다.
당연한 것 아닌가. 온갖 환경이 갖춰진 마탑 안에서의 발전이 빠르지, 어떻게 전쟁터에서 구르는 게 빠르겠는가.
그런데 스승의 반응이 이상했다.
“겁을 먹은 게로구나.”
까득.
순간 스승에게 무례를 저질렀지만, 고의는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평생 안 하시던 농담을 지금 하시는 것 같은데요?”
“농담이 아니다만?”
“하. 하. 하. 제가 겁을? 하…… 어이가 없어서, 뭐라 말도 안 나옵니다.”
“네 녀석, 조금이라도 다칠 것 같으면 대련도 안 하지 않느냐.”
“합리적인 겁니다. 대련으로 역량만 겨루면 되지, 굳이 피를 봐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겁쟁이 녀석이 진짜 말은…….”
“예? 겁쟁이라니요? 누가요?”
흔히 들어 온 매도지만, 매도는 진실을 이길 수 없기에 이번에도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에 다시 한숨을 내쉰 스승의 말이 이어졌다.
“한계에 부딪혀 보지도 않고 한계를 넘겠다?”
이성의 마도사가 어째서 이런 불합리한 얘기를 하는 것일까.
“왜 부딪혀야 합니까? 천천히 계단을 쌓아 넘어도 되는데.”
충분히 합리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스승의 얼굴이 미미하게 더 찌푸려졌다.
“재수 없는……. 이 자식을 패 버릴 수도 없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상한 불평이 들린 것 같았지만, 아르곤은 그 뒤에 이어진 말이 더 신경 쓰였다.
“……그것이 지금 네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인 것이다. 아니, 그런 성정으로도 여기까지 발전한 걸 대단하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힘들 것이야.”
“전 가능합니다. 천재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어차피 네 녀석은 시간만 지나면 성과를 보일 것이라고.”
“예, 충분히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말씀은 철회해 주십시오.”
“장로회의 결정이다.”
“바꾸실 힘이 있으시잖습니까!”
스승, 혹한의 마도사 아프만은 마탑 장로회의 실세였으니,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생각 없다.”
오늘 스승님은 정말 평소와는 달랐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걸……!?”
“광휘의 기사.”
“……예?”
뜬금없는 말에 아르곤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너도 소문은 들어 봤을 거다. 악마추종자들을 물리치고, 7대 기사인 문나이트를 패배시켰다는 신성.”
“그 소문이 사실이었습니까?”
“그런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심지어 그 신성이 이제 고작 17세라더구나.”
“예!?”
아르곤의 눈이 부릅떠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몇 년 전 카룬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그 광휘의 기사라는 자의 소문은 보통 대륙 서부, 제국 쪽에서 들려 오는 것이라 분명 과장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인재가 최근에 무려 대미궁에서 나왔다고 하더구나. 몇 년간 사라졌던 이유가 그 안을 탐험하기 위해서였다는 소문이 제국에서부터 퍼지고 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거긴 들어가면 답 없이 뒈지는 곳이라고 스승님께서……!”
“……내가 언제 그렇게 품위 없이 말을 했더냐.”
살벌한 눈빛이 쏘아지는 순간, 아르곤의 목이 대번에 움츠러들었다.
“아니, 뭐 그 비슷하게…….”
목소리가 절로 줄어드는데, 더 귀에 거슬리는 말이 들렸다.
“하, 이 쫄보 새끼를 어찌…….”
아니, 스승님이니까 대거리 못 하는 건데!
스승의 매도에 다시금 울컥하려던 찰나, 다시 아프만의 입에서 한숨과 함께 말이 이어졌다.
“아무튼, 우리는 소문이 사실이라 판단하고 있다. 거기서 나온 직후 그가 마역에서 말룸과 전쟁을 치른 흔적도 있으니.”
“…….”
그 말에는 아르곤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스승과 장로회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이어지는 스승의 말에 의해 바로 증명되었다.
“나는 현 대륙에 너만 한 천재는 없을 것이라 확신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현실엔 이미 너를 능가한, 너보다 어린 자가 있더구나.”
“……그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진짜라고요?”
“그래. 하지만 나는 그 차이가 결코 재능의 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거친 야생에서 자란 나무와 온실 속 화초의 차이라고 보는 거지.”
애써 외면하려 해 보지만, 그 노골적인 비유는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온실 속 화초라고?’
하…….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또래의 누군가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다시 한번 평정심이 흔들리며,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이 나왔다.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그 말에 스승의 얼굴에 미소가 보인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닐 터였다.
“락스턴 왕국으로 가라. 요새 웨어비스트의 일 때문에 연합의 중지가 모여 제국을 견제하던 참이다. 최악의 상황에는 수십 년 만에 제국과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일단 그곳에서 대기하다가……,”
전쟁이란 말에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지는데, 그런 제자를 본 혹한의 마도사가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피식 웃음을 짓더니.
“……향후 상황을 봐서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거라.”
미처 예상치 못한 결론을 꺼내 놓았다.
“예?”
아르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들어도 말의 맥락이 이상하지 않은가.
‘설마 진짜 농담을 하신 거……?’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스승을 바라보는 순간.
“진짜 전쟁에 참여하라고 하면 바짝 얼어서 못 나설 것 아니냐.”
“무슨! 절대 아닙니다! 절 뭘로 보시고……!”
순간적으로 발끈하는데, 다시 냉엄한 표정으로 돌아온 스승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꼭 전쟁을 겪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연합의 수뇌들도 생각이 있다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상황은 어차피 벌어지지 않을 테니.”
“그럼……?”
“뭘 하든 세상의 비바람을 직접 느껴 보란 말이다. 뭐, 개인적으로는 그 광휘의 기사라는 자를 만나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네가 새롭게 느끼는 것이 있을 테니까.”
“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제자를 보며, 마도사는 보이지 않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긴장한 군대도 겪어 보고, 새로운 영웅도 만나 보고. 그러면서 성장하거라, 제자야.’
특히나 저 심약한 성정은 반드시 고쳤으면 싶었다.
광휘의 기사에 대한 소문이 반만 사실이라도, 그를 만나면 분명 배우는 것이 있을 테니까.
‘티네스에게 연락해서 운을 띄워 놓을까?’
왕국 연합과 제국의 관계는 외부에서 보는 것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으니, 복잡한 인연의 그물이 얽혀 있는 애증의 관계라고 볼 수 있었다.
광휘의 기사가 제국 소속이 아니라곤 하지만 그 행태를 보면 분명 깊은 관계가 있을 터. 현 황실 마탑주라면 제자를 그와 연결시켜 줄 것이다.
그런데.
“……진짜 전쟁이 나면요?”
저 자칭 신중, 타칭 겁쟁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꺼내 든 순간에는 아프만도 울컥하고 말았다.
“그럴 리는 없으니까 당장 꺼져!”
그래, 절대 없다.
연합의 여섯 왕이 다 같이 미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