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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251화 (251/500)

251화. 혈기사

멀리 대륙 중북부에서 터진 큰 사건에 대한 소문이 대륙 전역으로 퍼지고 있을 때.

해상왕국 카룬은 수년 전 성물 강탈 사건의 수치를 상기하며 국력 신장에 힘을 쏟고 있었다.

- 나는 카룬을 구해 준 영웅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 이 부끄러움을, 이 수치를 기억하라!

젊은 국왕 헨리 1세는 손수 허리띠를 졸라매 가며 왕실 재정 대부분을 왕국의 무력 강화에 투자했다.

마법사와 기사를 양성하고 병사를 훈련했으며, 양질의 무구와 아티팩트로 무장한 군대를 만들고자 했다.

왕실 기사단장 리암 폰 피터슨 백작이 목숨을 걸고 초인이 되기 위한 수련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성 전체에 퍼졌으며, 기사와 마법사들은 왕성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고 남는 시간에는 수련에만 힘썼다.

카룬 왕국 전체를 휩쓰는 국력 강화의 열풍. 그것은 왕실을 엿 먹인 데스 나이트 3기를 포함한 말룸의 정예를 왕국의 은인인 광휘의 기사가 몰살시켰다는 소문이 퍼진 후에는 더욱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은인이라도! 우리 나라가 한 사람보다 못해서야 쓰나.”

“그래, 쪽팔리는 일이지.”

“전하께서 상심하시지 않게, 우리도 힘내자고!”

나라 전체가 달궈지고 있는 카룬.

그중에서도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오르투스의 분위기는 더욱더 뜨거웠다. 거리를 장악하고 수시로 벌어지는 군사 훈련에도 백성들이 환호성을 보낼 정도로.

그런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오르투스의 서쪽 성문에 백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가 말을 몰고 나타났다.

“……으음, 중앙 신전의 성기사라니, 귀한 분을 뵙는구려.”

성문을 지키는 기사가 그렇게 말하며 정중한 자세로 신분패를 받았지만, 크롬벨의 눈은 그사이 기사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작은 찡그림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는 불쾌하지도 않았다. 중앙 신전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성기사의 신분을 밝힐 때마다 백이면 백 이런 반응이었으니까.

신분패에 어린 신성력만으로도 경외의 시선을 받았던 예전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마다 다시 체감하고 있었다.

‘타락한 사제들이 교에 대한 민중의 신뢰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 또한 그와 현세대의 교단이 극복해 나가야 할 업.

그저 행동으로 증명하고 씻어야 할 허물일 뿐이었다.

“성기사, 크롬…… 님? 설마 최근에 왕국 연합의 남부 지방을 거쳐 오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헙! 이, 이거 몰라뵀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 기사의 태도 또한, 그가 이곳으로 오면서 벌인 작은 일들이 쌓인 결과이듯이 말이다.

“록퍼드 경, 그럼 저분이 최근의 그…….”

“그래. 그 혈기사다.”

자비 없는 성기사.

뒤에서 그렇게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동대륙산 비단이……!”

“남부 산맥산 가죽이 쌉니다. 싸요!”

“오세요, 오세요! 동대륙의 비법으로 만든 요리……!”

“제국에서 유행하는 액세서리가 단돈……!”

성문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와도 여기저기에 보이는 시장판.

교역의 나라 중심지답게, 세상 각지에서 모인 각양각색의 물건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크롬벨의 시선을 사로잡는 특이한 물건이 있었으니, 상인들이 즐비한 거리의 구석에서 초라한 몰골의 아이들이 장판 위에 올려놓은, 땟자국 묻은 나무 조각품들이었다.

하나같이 칼을 든 기사의 형상이었는데, 조막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다소 조악해 보였다.

‘세상이 풍요로워졌지만, 아직도 저런 아이들이 남아 있구나.’

상대적으로 화려한 물건들 사이에서 더욱 눈에 띄지 않는 조각품이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무언가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무서운 괴물을 물리친 용사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듯한 조각품들이 그의 마음에는 쏙 들었다.

“얘들아, 이건 얼마니?”

다가가서 말을 걸자마자 환한 안색으로 반기는 꼬마들.

“5, 5 쿠퍼예요, 기사님.”

그중 남자아이가 자그마한 손을 활짝 펼쳐 보이며 대답하자, 크롬벨은 미소를 지으며 돈주머니를 꺼냈다.

“쿠퍼는 없고, 이거면 될까?”

그 말과 함께 꺼내 든 환한 금빛을 띠는 물체.

난생처음 보는 금화의 모습에 아이들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던 뒷골목의 시선 또한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쓰레기들.’

크롬벨의 예리한 눈빛이 골목에서 아이들을 주시하는 썩은 시선들을 향했다.

마주치는 순간 그늘 속으로 숨어 버리는 비열한 인상의 무리.

지금과는 또 다른 말세, 그 시절의 풍경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 심했다.

‘아무리 치우고 또 치워도 다시 생기는 쓰레기들.’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봤는데 지나칠 생각은 없었다. 그가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러했듯이.

하지만 일단은.

“기사……님?”

“아, 어떠니? 이거면 충분할까?”

골목길로 향하던 살벌한 눈빛을 감추고 싱긋 웃어 보이자, 멍하니 홀린 듯 금화를 바라보던 아이들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자, 그럼 여기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을까? 이야기로 조각한 거 맞지?”

크롬벨의 말에 신이 난 듯, 여자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어? 알아보셨어요?”

“그럼, 이렇게 잘 만들어 놨는데 알 수밖에. 근데 이 조각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니?”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아이들은 더 밝아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용사님 이야기요!”

역시, 내가 걸어온 길은 틀리지 않았다.

절로 훈훈한 미소가 나오는데.

“오, 용사님 이야기를 알고 있어?”

“그럼요!”

“저는 용사님도 직접 뵀어요!”

활기찬 얼굴로 답하는 아이들의 허풍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 그래? 용사님 잘생겼니?”

“예!”

“어디가 얼마나?”

어차피 허풍이니 장난스레 물어본 말이었는데.

“멋진 검은 머리에!”

“피부는 하얗고요!”

“키는 작으셨는데.”

“엄청 강하셨어요!”

묘하게 구체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심지어 아이들의 묘사는 어딘가 이상했다.

키가 작다는 말은 일단 제쳐 둔대도.

“검은 머리?”

그건 특수한 경우인 ‘그녀’를 제외하면 인간형 마족들한테나 가끔 발현되는 특성 아니던가.

‘아니면 이방인이거나.’

불쾌감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마계 대전 당시 차원 균열이 일어나며 흘러들어 온 다른 차원의 대륙.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동대륙이라 불리는 그곳의 인간들도 그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여신의 축복도 닿지 않는 자들.’

더구나 그 차원 침입자들의 후손은 피부도 노랗다고 들었다.

이질적인 인류.

다만 자신이 그 사태를 유발한 당사자 중 하나였기에 차마 토벌을 주장하지는 못했을 뿐, 여전히 그들의 존재가 거슬렸다.

심지어 흰 피부에 검은 머리라면 마족의 피가 섞였을 확률이 높다.

아무리 세월이 지났다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이따위로 전해지다니,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용사님이 무시무시한 크라켄도 물리쳤어요!”

“저도 봤어요!”

“다리 타고 내려오시는 거!”

이어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이상했다.

‘설마…….’

이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이곳을 찾아오게 만든 자.

“……그 광휘의 기사 이야기였니?”

“예! 용사님이요!”

그 말에 크롬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는지 아이들이 주춤하는데,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크롬벨이 뒤늦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다. 잘 만들었구나. 자, 여기 있다. 아저씨가 이 조각품들은 잘 간직할게.”

“……감사합니다!!”

금화를 받고서야 안심하며 고개를 숙이는 아이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본 크롬벨은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그렇게 모든 것을 걸고 싸웠었는데.’

나와 동료들의 이야기는 이미 이 세상에서 잊힌 것일까. 차라리 그때 여신의 뜻에 따라 천상으로 향해야 했을까.

씁쓸한 마음이 진하게 차오르자.

“아무래도 왕성에 가기 전에 이 찝찝함부터 풀고 가야겠구나.”

크롬벨의 시선이 골목길 안쪽,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썩은 눈빛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직후부터, 오르투스의 뒷골목에서 고아들을 모아 앵벌이를 시켰던 양아치 조직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끄으으, 사, 살려 주세요…….”

“악인은 지옥으로.”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려 보이는, 솜털이 채 벗겨지지 않은 말단 조직원이 극한의 공포 속에서 용서를 빌었지만.

스각.

쿵.

성기사의 칼날에는 단 한 푼의 자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르투스 뒷골목에 자리 잡은 이른바 ‘조직’들이 피바다 속에 궤멸되는 데에는 불과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 * *

“중앙 신전의 사절이시라고요?”

왕실의 기사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지만, 거리낄 것이 없는 크롬벨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교황 성하의 뜻을 대신하여, 전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제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최근 2년간 공식적인 외부 활동이 없었던 중앙 신전이다.

쇄신이니 뭐니 하며 타락한 사제들을 전부 치우고 새롭게 여신의 빛을 좇는다는 둥, 전과는 달라졌다고 광고를 하긴 해도 아직 그 변화가 세상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 한 국가의 왕을 찾는데, 달랑 혼자 온 성기사라?

더구나 그의 갑옷에 점점이 묻어있는 저건 분명.

‘핏자국 같은데……?’

사기꾼 같기도 했지만, 아무리 봐도 신성력으로 빛나는 신분패는 진품이었기에 기사는 재차 물을 수밖에 없었다.

“명확지 않은 용건이라면, 저희는 중앙 신전의 뜻을 다시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나 신전의 총의가 아닌 개인적인 용무로 전하를 찾으시는 거라면, 저희 카룬과 신전의 마찰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신분패가 진짜더라도 광신도 중에는 정말 정신 나간 놈들도 있으니, 당신이 그런 쪽이라면 단단히 각오하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얼마든지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저는 단지 전하를 뵙고, 광휘의 기사님에 관해 여쭙고 싶은 것이 있을 뿐입니다. 가능하면 암벽의 기사님도 함께요.”

이 성기사가 도무지 그냥 간과할 수 없는 말을 꺼내 들었다.

“타이니 경에 관해 말씀이십니까? 신전에서?”

“예.”

“허. 그럼, 빨리 전해야지요. 여기 시종이 방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최대한 빨리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확 바뀐 기사의 태도에 이번엔 크롬벨이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그가 카룬의 왕을 접견하기까진 고작 하루의 기다림이면 충분했다.

다음 날 정오.

“……성기사, 크롬 경이라? 알현의 목적도 목적이지만, 어제 오르투스에서 수십의 인명을 해친 것이 자네인 거 같다는데. 할 말 있나?”

카룬의 젊은 국왕 헨리 1세가 녹색 눈을 번뜩이며, 홀로 알현을 청한 성기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은 크롬, 아니 크롬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왕을 바라보았다.

“인명을 해친 것이 아니라 쓰레기를 치운 것이지요. 여신의 처벌이 그들에게 조금 일찍 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하.”

그 말에 헨리 1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처벌할 생각도 없었지만, 오히려 태연하게 나오는 성기사의 태도가 그의 마음에 든 것이다.

“꽤 과격한 발언이군. 혈기사라 불릴 만해.”

혈기사. 그 말에 크롬벨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지만, 왕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신전 혈사를 일으킨 센티널 3세의 심복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 이제 제대로 된 용건을 들어 볼까? 신전에서 예고도 없이 성기사 하나만 보내 내게 묻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조용조용하게 대전을 울리는 목소리에 사방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엄정한 눈으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왕의 말은 중앙 신전의 이 뜬금없는 처사가 카룬을 무시하는 것이냐고 묻는 것이었으니까.

대륙과 동대륙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카룬은 실제로 여신교의 영향력이 미미한 곳이었으니, 수틀리면 이쪽도 신전을 적대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미리 말씀드렸듯, 광휘의 기사 타이니 모르스 경에 관해 묻고자 하는 것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혹 실례가 되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신전은 카룬을 존중하며, 사소한 일로 카룬과 마찰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불쾌하시다면 저를 벌하시는 걸로 참아 주시옵소서.”

답변하는 크롬벨의 말투와 격식은 모두 흠잡을 곳이 없었고, 스스로를 처벌하라 말하면서도 표정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에 헨리 1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 역시 더욱 진해졌다. 눈앞에 있는 성기사의 태도가,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검은 머리 기사와 비슷하게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할 터.

“타이니 경이라? 하면 그와의 친분에 대한 소문이 자자한 제국에 가지 않고 나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신전이 굳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이고?”

미소 짓고 있는 왕의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이미 예상한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도 나왔다.

“신전은 누구보다 앞서서 여신의 뜻을 설파한 광휘의 기사님께 성자의 이름을 내리는 일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일입니다.”

물론 내가 직접 진실을 확인한 후에 말이다.

‘만약 그가 혼돈의 씨앗이라면, 결과는 반대가 되겠지.’

결코 자신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는 신성(新星)에 대해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행보를 보면 분명 영웅이지만, 큰 사건들에 ‘전부 연관된 개인’인 데다가 그 생김새에 대한 묘사도 마음에 걸렸을 뿐.

‘모든 것은 내 눈과 귀로 보고, 듣고, 확인한 후에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생략된 그 말을 알 리 없는 헨리 1세는 다시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 그나마 은인에게 면목이 서는 일이 생겼군. 무엇이 듣고 싶은가, 성기사여?”

“광휘의 기사라는 이름이 이 카룬에서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그 큰 사건의 전후 사정에 대해 당사자분들께 생생한 경험담을 듣고자 합니다.”

그에 미소를 지은 헨리 1세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고, 찬사가 계속되는 동안 크롬벨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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