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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250화 (250/500)

250화. 월랑의 고향

- 고대의 맹약이 실현되는 때에 다시 만나자꾸나. 인간, 타이니.

펜릴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후에야 타이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었지만, 결국 모든 게 잘 풀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어쩌면 우란 누드라는 스피릿유저와 그의 고대 정령 역시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또 하나 해냈다!’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다시 주변에 눈길이 갔다.

“키에에!”

“컹!”

“크르, 크르륵!”

월랑의 주변으로 모여든 온갖 동물들. 급박한 상황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멀리서 다가오지 않고 바라만 보는 수많은 동물은 그렇다 치고, 그중 월랑의 가장 가까이 있는 호랑이, 검은 퓨마, 독수리, 그리고 녀석을 그대로 축소한 것 같은 은빛 늑대를 볼 때는 타이니의 눈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동물들이 마나를…….’

넷 다 영물 같았으니까.

마나를 깨우쳐 일반 동물보다 지능이나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존재. 그 후신이 되는 정령만큼 희귀하다는 영물들이 넷이나 모여 있었던 것이다.

“……얘들은 뭐냐?”

그 가운데 있는 월랑의 모습은 왜인지 신이 나 보였다.

어두워진 하늘에는 어느새 월랑이 가장 좋아하는 보름달이 떠 있었지만, 녀석은 웬일로 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주변에만 흐뭇한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녀석의 눈길이 꽂혀 있는 것은 은빛의 늑대였다. 보통의 늑대보다 살짝 큰 그 늑대를 볼 때마다 녀석에게서 아련하고 따듯한 감정이 밀려왔다.

“컹!”

“뭐?”

“컹! 컹!”

내 후손과 그 친구들.

그 답변에 타이니는 다시 멍하니 영물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월랑이 그의 머리에 자신의 이마를 툭 하고 갖다 대었다.

그 순간 스며드는 장면들.

월랑의 살아생전 기억의 일부가 그의 머릿속에 전해진 것이다.

육체가 더욱 커지기 전 무리에 속해 있던 때부터, 홀로 무리를 뛰쳐나와 마나로 호흡하며 성장한 뒤로 마기에 물들거나 숲에 침입한 마수들을 물어 죽이던 지배자 시절의 기억까지.

그 단편적인 기억들 속에서 드문드문 등장하는 작은 퓨마와 독수리, 새끼 호랑이. 그리고 월랑의 자식의 자식이 낳은, 녀석을 꼭 닮은 밝은 은빛의 늑대 새끼가 태어나던 광경.

지금도 월랑의 체온을 느낄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영물들에 대한 기억과 그들을 보는 녀석의 마음까지, 타이니에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기가 네 고향이었구나.”

“컹!”

“말을 하지 그랬어? 잠깐이라도 들러 볼 수는 있었을 텐데.”

“킁!”

그래, 그럴 시간은 없었겠지. 헛소리해서 미안하다.

“컹!”

“……괜찮다고?”

“컹! 컹!”

이곳에서 내 운명은 끝났다. 이들을 만나 기쁘지만…….

“부질없다고? 왜?”

“컹!”

이제 내 운명은 이 땅에 속해 있지 않다.

“그럼?”

“컹!”

신의 축복으로 다시 태어난 지금은 정령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령의 의무?”

“컹!”

난 알 필요 없다고?

“……너 가만 보면, 가끔 날 무시하는 거 같단 말이지.”

“킁!”

“고개 돌리지 마라, 진짜 같으니까.”

“킁. 킁.”

“진짜……? 야, 날 봐!! 내 눈을 보라고, 인마!”

“컹!”

“어쭈?”

그렇게 타이니가 월랑을 잡고 본격적인 몸싸움을 하려 들자.

“컹!”

“크르르!”

“끼에!”

그것이 월랑에 대한 공격이라 생각했는지, 주변의 영물들이 그에게 뛰어들어선 물고, 할퀴고, 쪼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인간의 한계를 월등히 초월한 타이니의 육체에 상처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야, 이것들아. 아니, 아니야! 장난이라고!”

차마 그 영물들에게 반격할 수 없었던 타이니는 단숨에 수세에 몰려 난타당하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그 난장판을 지켜보던 라프탄이 슬그머니 뒤쪽으로 발을 뺐다.

“저게 뭐 하는 짓이냐…….”

보면 볼수록 이상한 놈이었다.

영혼의 반려에게는 생각으로 뜻을 전하면 되는데, 늑대랑 대화도 하고 싸우기도 하다니?

정령사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크앙!

‘……부러워?’

- 크르!

‘왜?’

아, 너도 저기 껴서 놀고 싶다고? 근데 노는 걸로 안 보이는데?

- 크앙!

‘아, 나 대신 저놈을 때려 주고 오겠다고?’

그 뜻이 전해지는 순간 라프탄의 눈도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스르륵.

라프탄의 의지가 일어나는 순간, 사자의 정령 라미가 실체화하며 다시 주변의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저기서 짐승 아닌 놈이 제일 위험하니까 조심해.”

라프탄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크앙!”

“억! 넌 또 뭐야!”

그 난투극 사이로 뛰어든 사자의 정령 때문에 탄력받은 영물들이 타이니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아! 진짜 이것들이!!”

결국 참다못한 그가 폭발하려던 찰나.

“아우우우우!”

“끼루루루루!”

“크와아아앙!”

“아우우우우!”

어딘가 상쾌해진 듯한 월랑의 하울링과 함께 물러난 영물들이 일제히 달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월랑의 기억 속 평화로운 날들의 풍경처럼.

밝은 달빛 아래에 선 영물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 그들의 왕을 환영했다.

예전 그들의 방식 그대로.

* * *

타이니가 터트린 일의 반향은 클 수밖에 없었다.

늑대의 궁에 테러가 일어나 후계자인 체베르와 7대장군의 수석, 사를 살힌이 사망했다.

늑대의 궁, 권력의 공백 지대.

살아남은 왕족들이 사태 수습을 위해 애를 쓰고 있고, 수도 근방의 1~3군단과 장군들이 라이칸으로 움직이고 있다.

대장군 축출 사건의 중심이 되었던 체베르와 사를 살힌이 죽자, 웨어비스트에는 사실상 다시금 권력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 그 이유가 고대의 결계로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늑대의 궁 중심부에 일어난 폭발이었으니, 당연히 세간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일부의 사람들은 ‘엄중한 결계 속 폭발’이라는 정황에 집중했다.

“아스란 황궁 사건과 비슷하지 않아?”

“희생자 수가 적긴 하지만, 그렇긴 해.”

“악마추종자들이 또…….”

그 주장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다수는 다른 쪽에 주목했다.

“제국의 짓 아닐까?”

“그래, 안 그래도 지금껏 압박하고 있었잖아.”

“죽은 사람도, 제국이 지목한 후계랑 그 후원자고.”

“밝혀지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아스란 제국과 웨이비스트의 긴장 상태가 결국 파국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퍼지고 있을 때.

그 소문으로 인해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라이칸으로 향하던 제국의 사절단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찍 일을 저지를 거라곤 듣지 못했는데요?”

은빛의 늑대인간이 푸른 눈을 번뜩이며 압박하자, 사절단 책임자 로스트차일드 백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 저에게도 제대로 된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현장 요원이 독단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절단의 진짜 목적을 아는 수뇌부 중 두 사람.

문나이트가 나라도, 직위도 잃어버린 식객일 뿐이라지만 그 실력이 곧 신분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제국의 귀족이라 한들 영지도 없는 명예 백작에 불과한 이반 로스트차일드는 그저 그 날카로운 눈을 피하기 급급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외교관이라 하더라도, 일반인인 그가 오러유저의 살기 어린 기세를 버텨 내기는 힘겨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상대는 허세를 부릴 만한 적이 아니라 아군이었으니.

‘역시 수인족은 말이 통하지 않아.’

제국의 황성에서 나름대로 잔뼈가 굵은 그는 새삼 이 불합리한 상황을 되짚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실버 팽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발렌티아에서 사절단에 합류해 있는 신속의 기사뿐이라 했던가?

“현장 요원이라…….”

눈을 감고 자조하듯 읊조리는 저 늑대인간의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송곳니를 볼 때마다 살이 떨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실버 팽은 그런 백작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암살을 계획했는데 폭사를 시켜 버린, 상리를 벗어난 무식한 일 처리.

초인이나 그에 준하는 마나 장악력이 아닌 이상 외부인은 마나를 사용조차 할 수 없는 결계를 내부에서부터 작살내 버린 위력.

거기에 노을빛 서광이 비쳤다는 증언.

그 세 가지만으로도 그 일을 저지른 이가 누구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타이니…….’

시간을 거슬러 멸망할 인류를 구원하려 한다는, 그야말로 신화 속 주인공이 아닌가 싶은 사내.

그리고 부담스럽게 친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하게 폭력적인,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강력한 초인.

인류의 위기가 찾아올 거란 설명에 전사의 명예를 걸고 돕겠다 약속했지만, 여전히 그 말이 완전히 가슴에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전생에 친우라고 했던가.

사실 대련에서 얻어맞고 짐처럼 실려 온 기억밖에 없는 실버 팽에게, 그 말은 그저 공허하게 귓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더구나 이 사태가 벌어진 지금은 더욱.

우드득.

꽉 쥔 주먹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울리자 이반이 흠칫했지만, 지금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내 동생은 아닐 거라고, 직접 확인해 보겠다고 그렇게 몇 번이고 부탁을 했었는데.

그거 하나 지켜 주지 않으면서.

뿌드득.

“……뭐가, 친구란 말인가. 뭐가!”

절로 이가 갈렸다.

그러다.

“예? 친구……요?”

당혹스러워하는 이반의 음성이 귓전을 때리고 나서야 다시 이성이 돌아왔다.

“하……. 아닙니다. 사절단의 속도를 높여 주시겠습니까, 백작? 다른 이들은 몰라도 3군단장은 내게 반감이 있는 자라, 그자가 먼저 라이칸에 입성하면 일이 더 꼬일 수도 있습니다.”

“아. 무, 물론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책망하지는 않을 듯한 느낌에 이반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를 떠났다.

그렇게 마차에 홀로 남겨진 실버 팽은 머리를 싸매고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광휘의 기사, 타이니…….’

솔직히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모든 일을 감정에 내맡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수인족인 그에게는 금기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 그는 익숙하게 감정을 억누르며 머리를 맑게 하려 애썼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마땅히 따라야 할, 정해 놓은 원칙을 떠올리는 것.

‘대의…….’

지금 그가 몸을 담고 있는 발렌티아의 주인과 광휘의 기사가 추구하고 있는 목표에는 그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검제, 오크의 대전사, 세계수의 수호자, 그리고 광휘의 기사. 그 쟁쟁한 인물들이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뜻을 합쳤다.

게다가 그에게 보여 준 상황 증거 또한 차고도 넘친다.

심지어.

‘솔직히, 사를이 나를 밀어내는 데에 협조했을 확률이 높다. 그래, 외면하지 말자. 그 뛰어난 기사가 아무런 확신도 없이 일을 벌였을 리는 없어.’

생각만 해도 여전히 치가 떨리는 그와의 대련 또한 결국 자신의 성장을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자 분노가 확실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다만, 냉정한 이성을 되찾은 만큼 눈앞에 닥쳐온 과업이 다시 떠오르며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이대로라면, 내가 왕이 되거나 왕과 같은 권력을 휘둘러야 한다. 대의를 위해서라도.’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

지금 웨어비스트가 내부 반발을 무마하고 검제와 광휘의 기사가 주장하는 인류 연합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직계 왕족에게 왕권을 온전히 쥐여 줬다가 이 암살 의혹(?)을 빌미 삼아 제국에 날이라도 세우면 큰일 난다. 그들이 계획한 모든 것이 꼬일 테니까.

‘……이걸 노리고 일부러 그런 것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검제면 몰라도 그 광휘의 기사는 절대 이렇게 잔꾀를 부릴 만한 인물은 아니다.

“하…….”

한숨과 함께 잡념과 고뇌를 털어 내려는데, 문득 사절단이 출발하기 전 파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 어머나, 이름은 익히 들었어요. 7대 기사, 문나이트 님. 소문대로 용맹해 보이시네요.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인상적인 느낌을 받았던 ‘붉은 머리’ 귀부인의 말.

제국의 귀족이란 생각에 이름을 듣고도 한 귀로 흘렸었지만.

‘그 여자가 분명…….’

- 혹시나 돌아가셔서 왕이 되시는 건 아닙니까? 저희 제국에서 밀어준다면 그것도 어렵지는 않을 듯한데요.

절로 안색이 굳어지던 말에 이어진 부언.

- 만약 그렇게 되면, 웨어비스트와 아스란의 오랜 악연도 종식되겠네요. 역시 폐하께서는 영명하세요.

- 대체 몇 년 전부터 세운 계획인 건지.

몇 년 전부터 세운 계획.

그 말이 껄끄럽게 다시 떠올랐다.

그땐 분명 가당치 않은 말,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제국에서 나를 이용하려고, 모든 것을 조작……?’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어떤 인간이 데스나이트나 말룸, 그리고 타이니 같은 변수를 모두 예상하고 수년 전부터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그러나 이상하게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말룸이라는 쓰레기들을 제국에서 오랫동안 처리 못 한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 필연적으로 광기를 동반하는 종족이라, 조건만 성립되면 오러유저도……. 어쩌면 그렇게 되는 게 더 재밌겠네요.

- 무슨 말이지?

- 아, 아니에요. 긴 이야기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문나이트.

이해할 수 없었던 여자의 마지막 말과 요염한 윙크가 다시 뇌리에 떠오르는 순간.

실버 팽의 푸른 눈 안쪽에서, 희미한 분홍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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