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달을 먹는 늑대
“일이 이렇게 풀리나…….”
휘이이이잉.
온몸을 휘감는 바람 속, 늑대의 궁 상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타이니는 기감을 확장해 상황을 탐지하고는 오히려 웃었다.
예상했던 바는 절대 아니었다.
갑작스레 난입한 코끼리 수인에, 라프탄을 구하기 위해 무리를 한 월랑.
그리고 그런 월랑을 쫓아 사라진 그 코끼리 수인의 행동까지.
전부 예상에 없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잘됐어.’
월랑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보인 놈들은 확인했다.
늑대의 눈으로는 늑대인간들이 확연히 구별되었으니, 녀석이 영혼의 냄새를 맡은 체베르와 사를 살힌의 느낌 또한 타이니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그 느낌을 기준으로 감각을 확장해 보니, 마나의 파동을 통해 주변 상황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이미 그의 초월 감각은 사실상 마법의 수준에 이르렀기에 이런 식의 활용도 가능했던 것이다.
‘방에 있는 자는 그 둘 포함, 모두 스물셋.’
목표들을 제외하고도 챌린저급 셋, 슈페리어급 다섯, 블레이더급 열셋 정도가 같은 방에 모여 있었지만, 그 정도는 이제 타이니에게 큰 부담도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저 도의적인 책임감뿐.
괜한 희생자들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 아니었다.
체베르와 사를 살힌의 곁에 있는 수인족들은 그들의 심복. 놈들 역시 말룸에 동조했거나 악행을 알면서도 방조했을 테니, 같이 죽어 마땅하다.
그저 제 동생을 믿고 있을 친우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사림, 네 동생은 내가 처리하마.’
타이니는 자신이 사를을 죽이는 게 친우에게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물론.
- 내, 내 눈으로 확인하겠소이다. 그럴 리가 없소!!
친구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만, 그 속에 담긴 또 다른 감정이 이제는 확실히 와닿았다.
‘사림, 사실 짐작하고 있었겠지? 넌 나처럼 멍청하지 않잖아. 네 동생은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듯해. 너의 축출에도 깊이 관여되어 있을 테고.’
물론 그 생각은 어디까지나 상황적 증거에만 의존한 주관적 판단이기에, 어쩌면 녀석이 자신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물증을 찾기엔…….
‘시간이 없어.’
혹시나 모를 왕국 연합의 움직임도, 황성에서 월랑의 눈으로 본 그 여자도, 모두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생겨난 변수였다.
“……네 결정을 기다려 줄 시간이 없어, 사림. 미안하다.”
자신의 목소리가 친우에게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타이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약한 죄책감을 덜어 냈다.
그리고 점차 멀어지는 월랑과 그 뒤를 쫓는 스피릿유저의 모습을 잠시 확인한 후 마나를 끌어모았다.
우우우우웅.
‘빅뱅까지는 필요 없어.’
빅뱅은 그 특성상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는 것이 기본.
그의 영혼력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마나를 중첩하고 또 중첩해서 쏟아 내야 하는, 힘 조절을 하려야 할 수가 없는 기술이다.
그러니 한 방 크게 치고 빠지려면 그 열화 버전이 낫다.
‘하, 열화 버전이라니…….’
우우우우웅.
검게 물들었던 녹턴이 다시 새하얀 빛의 에너지를 토해 내는 것을 보며 타이니는 속으로 웃었다.
전생에 자랑하던 필살의 일격이 이제는 열화 버전이 되어 버린상황에 새삼 격세지감을 느낀 것이다.
아직 전생의 경지를 완벽히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한 방의 파괴력만큼은 확실히 그때를 넘어섰다는 사실이 다시금 실감이 났다.
“이 정도면 충분해.”
우우우우웅.
흰빛을 뿜어내던 녹턴의 위에 다시금 노을빛이 덧씌워지기 시작하자, 저 아래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이이잉!
- ущфлйой кгвйрул!
- плыьавдул!
늑대의 궁 위로 푸른 마나의 방어막이 떠오르고, 그 안쪽에서 수많은 병력이 위층으로 움직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그래 봤자 못 막아.”
타이니는 자신감 어린 미소와 함께 녹턴을 치켜든 채 낙하했고, 그 속도는 녹턴에서 쏟아지는 노을빛이 진해질수록 점점 더 빨라졌다.
전생에 그가 수틀리면 황제건 교황이건 머리를 깨 버리겠다고 호언했던 것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으니, 이 시대에 존재하는 어떤 방어막이라도 그의 일격을 버텨 낼 수는 없을 터였다.
그것은 전생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늑대의 궁의 결계라 해도 마찬가지.
‘간다!’
노을빛 유성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린 타이니의 몸은 늑대의 궁 결계를 뚫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바위 궁전의 천장과 바닥을 일직선으로 뚫어 버렸다.
그리고 목표가 있는 방에 도달한 순간.
- 타이니식 전투 살법 3식. 유성 떨구기.
자신을 향해 눈을 부릅뜨는 회색과 은빛의 늑대인간과 수인족의 전사들을 또렷이 인식하며, 그들이 있던 공간의 중심에서 녹턴의 망치 머리에 담긴 모든 에너지를 발산해 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 일격은 방 안에 있던 수인족들은 물론, 늑대의 궁을 보호하는 결계마저도 그대로 터트리며 일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분쇄해 버렸다.
콰콰콰콰콰콰콰.
우르르르르르르르릉.
“후으읍.”
무너져 내리는 궁전의 중심.
타이니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아찔한 탈력감을 참아 가며 급속히 마나를 끌어모았다.
머리가 핑 돌고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굳이 목표의 생사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방 안에 존재하던 모든 것이 터져 나간 건 분명하니까.
물론 천장과 바닥을 비롯한 사방의 벽이 터져 나간 만큼 노을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다 못해 사방에 퍼졌을 터.
그럼에도 유성 떨구기의 힘은 최대한 방 안에만 집중시켰고, 밖으로 퍼진 여파 역시 궁을 감싼 결계를 흔드는 과정에서 거의 소진되었을 테니 애꿎은 희생자가 생길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르르르릉.
쾅!
“아악!”
……그래, 거의.
‘수인족이 저걸로 죽진 않겠지.’
난데없이 떨어진 돌에 깔려 비명을 지르는 아래층의 늑대인간을 애써 외면하며, 타이니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은 그것보다 탈출이 먼저였다.
‘이제 와라, 월랑.’
- 컹!
‘안 돼! 급해!’
왜인지 망설이는 월랑의 의지가 느껴졌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그 절실함을 알았는지, 월랑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고.
우우우웅.
이내 반정령화 상태로 변한 타이니가 방금 억지로 끌어모은 마나를 동원해, 자신이 박살 낸 결계의 마나 사이로 성안의 벽들을 투과해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ущсз воУоы ырфвд клфпд!!!!(대체 어떤 놈이 감히!!!!)”
엄청난 분노가 담긴 노호성과 함께, 무너지는 궁전의 중심부에 회색 피부의 거한이 나타났다.
그리고.
“слцвлвш плйыдул, воаьеды! йлыуьед!(찾아야 합니다, 어르신! 반드시!)”
그의 전신에서 거대한 검은 늑대의 환영이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컹!”
실체화된 고대의 정령이 눈을 빛내며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고, 회색 피부의 코끼리 수인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 뒤를 쫓았다.
* * *
타이니가 이상을 느낀 것은 라프탄의 기척을 찾아 북으로 향하면서부터였다.
반정령화, 즉 반영체 상태를 유지한 채 허공 밟기로 미친 듯이 질주하는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기척을 느낀 것이다.
- 컹!
‘정령?’
탈진했던 신체 컨디션도 조금씩 회복해 나가고 있었기에 정신을 집중해 보니, 뒤쪽에서 무섭게 가까워지고 있는 독특한 마나가 느껴졌다.
오직 마나로만 이루어진 생물 같은 느낌, 정령의 기척이 확실했다.
‘이거 따돌리기 어렵겠는데…….’
정령사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정령 자체의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다.
결계를 완전히 박살 내고 반정령화 상태로 탈출했는데, 대체 어떻게 자신의 흔적을 쫓아오는 걸까?
난감함에 입술을 깨무는데, 월랑이 뜻밖의 의지를 전해 왔다.
- 컹!
뭐? 영혼 탐지?
‘그건 네 특기잖아?’
- 컹!
다른 녀석도 있다고.
‘아는 녀석이야?’
- 컹!
안다고? 네가 설득해 보겠다고?
‘여기서?’
황당한 마음도 잠시.
정령의 기척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타이니는 월랑의 바람대로 반정령화 상태를 풀며 그대로 녀석과 자신의 몸을 실체화했다.
“타……! 윽, 야! 여기!!”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보인 것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라프탄과.
“끼에에에!”
“컹! 컹!”
“크릉. 크릉!”
그런 그를 둘러싼 채 자신, 아니 월랑을 보며 왜인지 환호하는 듯한 동물들이었다.
그 기묘한 광경에 타이니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컹!”
흐뭇한 기분이 느껴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돌아선 월랑이 몸을 최대한 부풀리더니, 상공을 바라보며 가슴 가득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이내.
“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어두워져 가는 밤하늘, 막 떠오르기 시작한 달 사이로 엄청난 크기의 하울링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 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멀리서 비슷한 느낌의 하울링이 들려오더니, 이내 그들의 앞에 몸을 최대 크기로 키운 월랑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검은 늑대’, 아니 정령이 나타났다.
“허……?”
떠오르는 달 아래 요사스럽게 빛나는 붉은 눈, 어두워지는 하늘보다 더욱 짙은 검은색 털.
겉모습만 보면 정령이라기보다 오히려 마수에 가까워 보이는 거대한 늑대가 자신을 바라보는데, 타이니는 그것이 거북하기는커녕 왠지 익숙하게만 느껴졌고 이내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월랑과 닮았어?’
털의 색깔과 눈빛은 확연하게 다르지만, 전체적인 얼굴 형태나 골격 등이 이상할 정도로 월랑과 비슷했다.
게다가 왜인지 가까이 다가올수록 눈의 붉은빛이 옅어지는 것과 동시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감정까지.
감정?
“컹! 크르르.”
“컹!”
자신을 보며 짖는 월랑을 향해 서슴없이 다가가더니, 이내 혀를 내밀어 월랑의 볼을 슥 핥고는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검은 늑대.
마치 인간처럼 확연히 감정이 묻어 나오는 그 ‘표정’에 타이니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턱을 들어 월랑의 머리를 슥슥 비비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어른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련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월랑 역시 ‘낑!’ 소리를 내며 검은 늑대에게 몸을 비비고 있엇으니, 타이니로선 더더욱 황당할 노릇이었다.
나아가, 마치 그를 기다린 듯한 주변의 동물, 영물들도 왜인지 점점 더 커져 가는 검은 늑대의 존재감 아래 어느샌가 조용히 꿇어 엎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그 직후에 벌어졌다.
- 결국, 너도 정령이 되었구나. 안타깝고 안타깝구나.
- 인간, 그대가 이 아이의 계약자가 되었는가?
검은 늑대의 영파가, 또렷한 ‘뜻’을 담고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진 것이다.
“아이?”
- 내 후손이니 아이라 불러도 되지 않겠는가, 인간이여.
“……정말로 말을 하는군.”
“말도 안 돼. 어떻게 정령이……?”
라프탄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цлйвлЕул ызырф!(잡았다, 네놈!)”
쿵.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는지, 급속도로 가까워지던 또 하나의 거대한 존재감이 마침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런데 그때, 당장이라도 타이니에게 달려들 것 같던 그를 검은 늑대가 말렸다.
- 우란 누드, 진정하라. 달이 다시 나에게 지혜를 주었으니, 내가 이 아이와 이야기를 해 보겠다.
“воаьеды!?(어르신!?)”
- 달은 이제 막 떴으니 시간은 많다. 대화를 시작해 보자꾸나, 인간이여.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지만, 빛나는 붉은 눈의 검은 늑대 앞에 선 타이니는 섣불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컹!”
괜찮다고?
“컹! 컹!”
타이니의 시선이 검은 늑대와 그 뒤의 코끼리 수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젠장, 이미 목격자가 생겼다. 그것도 스피릿유저. 아마도 저자가 사림이 말한 우란 누드겠지.’
어쩌면 인류의 큰 전력이 될 수도 있다는 인물. 하지만 당장은 걸림돌밖에 되지 않는 자.
‘저자를 어찌한다?’
사실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점점 회복되고 있었으니, 아무리 코끼리 수인에 스피릿유저라 한들 그의 상대가 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군이 될지도 모르는 자를 죽일 수도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 나의 이름은 펜리르(Fenrir). 달을 먹는 늑대. 여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소멸한 짐승 신의 마지막 흔적이며…… 최초의 정령이다.
- 인간이여, 내 후손의 계약자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어진 정령의 영파가 복잡하던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