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저 새끼, 설마……!?
아무리 수인족이 그 종족 특성상 덩치 큰 전사들이 많다고 한들, 정도라는 게 있다.
3m가 넘는 덩치는 인류라기보다는 괴물의 영역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저 위쪽에 보이는 코가 이상할 정도로 길고 귀도 부채처럼 컸으니, 라프탄은 자신을 습격한 것이 괴물이라 생각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하지만 당장은 이것저것 따질 틈이 없었다.
“합!”
우드드득.
그 순간 의태를 푼 라프탄의 몸이 그대로 부풀어 오르며, 습격한 괴물보다 더 커진 덩치로 그 공격을 받아쳤다.
콰아아아앙!
라미의 두 번째 특성, 거대화.
체격이 커진 만큼 질량과 근력까지 늘어나는 사기적인 특성이 발현되며 회색 피부 괴물의 주먹을 받아 냈지만.
쾅!
우드드득.
“억!?”
기대와는 달리 일순간에 오른쪽 어깨가 탈골된 라프탄의 거체가 형편없이 튕겨 나가 반대쪽 벽에 부딪히며 벽을 일각을 무너뜨렸다.
꽈르르르릉.
그 소음이, 황당한 상황에 멍해 있던 체베르와 호위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우란 누드 님!?”
“침입자다!”
“후계를 보호해!”
곰 수인이 재빨리 체베르의 앞을 막아섰고, 호랑이 인간과 표범 인간은 나가떨어진 라프탄을 향해 돌진했다.
“큭!”
어쩔 수 없는 상황.
라프탄의 의지를 따라, 늑대인간 왕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라미가 그의 앞에 소환되었다.
“크와아아아아앙!”
갑자기 나타나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울 듯 커진 거대한 사자의 정령이 그대로 포효를 내질렀다.
라미의 3번째 능력, 피어(Fear).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 싶어 했던 특이한 영물, 라미의 잠재력이 만들어 낸 피어에는 다수의 동급 전사들조차 일순간 몸이 굳어지게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라미와 동급의 존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딜!”
“컥!”
그 틈에 도망치려던 라프탄은, 곧바로 회색 피부의 거인, 우란 누드에게 목이 붙잡혀 들어 올려졌다.
콰득.
부러진 팔에 충격이 더해지자 뼈가 한 번 더 어긋났고, 의태를 하려다 만 라프탄의 몸이 다시 본래의 색을 찾아 갔다.
“끄으…….”
신음 소리와 함께 붙들린 목에서 소름 끼치는 우드득 소리가 나고.
“크앙……!”
그 순간 덤벼들려던 라미까지 역소환 되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다시 그의 귓가에 우렁찬 수인어가 울려 퍼졌다.
“정령사가 어찌하여 이런 무도한 일을 하는가? 정령을 보기 부끄럽지도 않은가!?”
“끄흑.”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고!
‘어찌해야 하지? 젠장!’
무슨 수를 쓴 건지, 부상도 부상이지만 이 괴물의 손에 잡힌 이후부터 마나가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우란 누드라면 이 괴물이 바로 그 스피릿유저라는 건데, 차라리 그의 정령에게 당했다면 이렇게 어이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령도 없이 대체 어떻게…….’
최악의 상황에 몰린 라프탄의 눈이 또르르 굴러가며 괴물, 아니 처음 보는 거대한 덩치의 수인족 스피릿유저를 탐색해 보는데, 뒤쪽에서 그에게 달려들던 전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우란 누드 님, 침입자는 저희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되었다! 아미르, 후계나 보호하도록.”
쿵.
크게 한 발 내디딘 우란 누드가 다가오는 호랑이 수인과 표범 수인을 막아서며 외쳤다.
“대답하라! 정령사! 그대가 정령의 친구라는 것을 믿고, 해명할 기회를 주겠다!”
“커흑!”
자신의 목을 잡고 흔드는 손길에 라프탄의 몸이 허공에서 격하게 출렁거렸다.
‘미친! 놔 줘야 말을 하든 말든…….’
목에 가해지는 강력한 압박에 점차 의식이 아득해지고, 부러진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조차 희미해져 갔다.
자연스레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 잡힌다면요? 당연히 자살해야죠.
미쳤냐!
“끄으응.”
갑자기 뇌리를 스친 제이의 말이, 멀어지려던 의식의 끈을 억지로나마 붙잡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시야 가득 은빛 섬광이 번뜩이더니.
콰아아앙!
“큽!?”
굉음과 함께 회색 기둥 같은 팔이 튕겨 나가면서 라프탄의 막힌 기도가 뚫렸다.
“컹!”
바람결에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무심코 은빛 털을 잡아챈 손아귀에 힘이 들어갈 때.
호랑이 수인과 표범 수인이 각자의 대검과 장검에서 시뻘건 마나 블레이드를 뿜어냈다.
“어딜!”
“멈춰라!”
그들의 대응은 기민했고, 또 위력적이었지만.
콰아아아앙!
“컥!”
“푸헙!”
은빛 늑대의 정령이 두른 검고 투명한 기운에 부딪히는 순간 그대로 무기가 부러져 나가며, 둘 모두 시뻘건 피를 토해 냈다.
그렇게 거대한 늑대가 벽을 뚫고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졸지에 기습을 당해 포로를 잃어버린 우란 누드는 그 뒷모습을 그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단순히 예상치 못한 기습에 당황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북쪽 숲의 주인??”
사라지는 거대 늑대의 뒤태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느낌이 그를 아연하게 만든 것이다.
“정말 정령이 되었다고? 그런데, 왜 나를……?”
이내 인상을 굳힌 그가 그대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이윽고.
- 캬오오오오오!
늑대의 궁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포효 소리와 함께 그의 전신에 거대한 검은 늑대의 환영이 떠오르고.
우드드득.
그의 덩치가 3m 조금 안 되게 ‘축소’되며 일순간 온몸에 검은 털이 돋아나는 순간.
스팟.
그 거대한 육체가 아주 작은 소음만 남긴 채 부서진 벽 사이로 사라졌다.
“놓치지 않는다!”
벽을 부수고 탈출한 은빛 늑대를 쫓아서 날아간 거인.
그 충격적인 상황 전개에 어안이 벙벙해진 체베르와 호위들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볼 때.
“무슨 일이냐!”
“체베르 공!”
회색 늑대인간과 일단의 병력이 그 방에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 사태의 원흉도,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파바바바박.
쎄에에에에에.
늑대의 궁에서 벗어나, 무려 허공을 내달리며 순식간에 라이칸 밖으로까지 달려 나간 늑대.
날카로운 바람이 한동안 얼굴을 스친 뒤에야, 라프탄은 자신이 사경을 벗어났음을 깨닫고 늑대의 털을 붙잡은 손아귀에서 힘을 뺄 수가 있었다.
“고맙다, 타이니. 아니 월인가?”
“컹!”
“월이구나. 그래, 고맙다. 그런데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니?”
“컹!”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 가고 싶은 데로 가자. 일단…….”
- фофстоал(멈춰라)!!!!!!
“저 괴물을 피해야 하니까.”
우렁차게도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본 라프탄이 질린 표정으로 다시 월랑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다행히.
“컹!”
월랑도 그 기대에 부응해 거침없이 속도를 높이며, 라이칸의 북쪽 숲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우우우우우!”
허공에서 숲길로 착지하는 순간 자연스레 울려 퍼진 하울링.
‘쫓기는 와중에?’
당혹스러웠지만, 그도 정령술사인지라 늑대 정령의 울음소리에 어린 기쁨과 반가움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반응하듯.
- 아우우우우우우!
- 컹!
- 크와아아아앙!
사방에서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데 어째서인지 그 포효들에서 경계심이나 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정령술사 이전에 사냥꾼의 아들로서 수도 없이 대수림을 들락거렸던 그에게도 생소한 상황.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우습게도 그들을 쫓아오던 괴물, 우란 누드가 알려 주었다.
쿵.
“역시, 북쪽 숲의 주인. 정말로 그대였군!”
무겁게 착지한 우란 누드의 입에서 나온 수인어는 여전히 이해 못 할 뜻을 담고 있었다.
“북쪽 숲의 주인?”
“크릉.”
라프탄이 긴장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그를 태운 월랑은 오히려 여유롭게 우란 누드를 바라보며 콧김을 내뿜었다.
우란 누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월랑이 아닌 그의 등에 타고 있는 라프탄에게 향했다.
“대답하라, 정령사여! 북쪽 숲의 주인이 정령이 된 일에 그대가 관련되어 있는가!?”
이미 체베르에 관한 일은 잊어버린 듯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 우란 누드.
당연히 대답해 줄 말이 없는 라프탄이 슬그머니 월랑의 등에서 내려와 그 뒤에 숨는데.
“크르르르.”
“컹!”
“캬오오오오!”
그 순간, 해가 다 지지도 않았는데 숲의 안쪽에서 맹수의 노란 눈이 하나둘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건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스윽.
소리도 없이 월랑의 옆으로 다가온 검은 퓨마.
“끼에에!”
그 어깨에 바람과 함께 내려앉은 거대 독수리.
“크르.”
그리고 뒤쪽에서 마치 월랑을 호위하듯 나타난 호랑이.
거기다.
“컹!! 아우우!”
다가와서 월랑에게 머리를 비비적거리는 게 누가 봐도 격하게 반가워하고 있음이 분명한, 녀석을 꼭 닮은 은빛 늑대까지.
“전부 영물……?”
하나같이 맹수나 동물답지 않은 행태를 보이며, 월랑을 위협하는 듯한 우란 누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숲에 영물이 이렇게나 많다고?’
그리고 우란 누드는 이내 정령 합신 상태를 벗어던지고 원래 상태로 돌아와 그 영물들을 보며, 아니 월랑을 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북쪽 숲의 영물들이 전부 그대를 반가워하고 있다, 숲의 주인. 그대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직접 묻고 싶은데.”
안타까운 눈으로 월랑을 바라보던 우란 누드.
그는 결국 그 뒤쪽에 숨은 라프탄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정령사여, 내게 진실을 말해 줄 생각이 없는가?”
“……무슨 진실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소만?”
“어찌하여 그 늑대, 북쪽 숲의 주인이 정령이 된 건지. 대체 이십 년 전 이 숲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 모든 것을 말함이다.”
조금 전만 해도 자신의 팔을 부러트리고 질식사시키려 했던 자의 태도가 지나치게 정중해졌지만, 라프탄의 표정은 더 굳어질 뿐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네.’
자신이 수인어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조차도 의심스러워지는데.
“……말을 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가 숲의 주인을 해친 무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말과 함께 자욱하게 퍼지는 살기를 보고 있자니, 임기응변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영물이 정령이 되었다면 자신을 해친 자들과 계약을 맺겠소?”
이 상황에 그나마 파악이 되는 맥락을 좇아 그럴듯한 반문을 제시해 보지만.
“흥. 영물은 순수한 만큼 속이기도 쉬우니 무슨 야료가 있었을 수도 있지.”
쿵.
“키륵!”
“컹!”
“크르르르.”
발을 딛는 것만으로 땅이 울리고 영물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거대한 수인족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쿵.
“우리 짐승 신의 축복을 받은 라이칸의 주변에는 영물이 많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북쪽 숲의 주인은 수백 연래 독보적으로 뛰어난 영물이었다. 축복을 홀로 독점하지 않고 여러 영물들의 성장을 도왔지. 라이칸에서도 주목하던 존재였다. 그런 숲의 주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고.”
더욱 강해지는 기세에 영물들이 긴장하는데.
“킁.”
오히려 여유로워 보이는 월랑을 힐끗 째려본 후, 라프탄은 최후의 한 수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수인족이 간과하고 있던 것.
“……내 정령은 아까 보지 않았소? 이 친구는 내 반려가 아니올시다, 우란 누드. 내 반려는 여기 이 아이지.”
우우우웅.
그 순간 스으윽 하고 다시 나타난 라미가, 사자 정령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며 다시금 덩치를 키웠다.
물론 그런다 한들 저 괴물 같은 스피릿유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았기에.
‘타이니, 제발 빨리 와서 이 괴물 좀 어떻게 해 줘!’
바라는 것은 오직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어……?”
그제야 자신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듯한 우란 누드의 모습.
괴물 같은 전투력과는 달리, 판단 능력은 그리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발!’
그렇게 라프탄이 우란 누드의 고민이 길게 이어지기를, 그리고 타이니가 빨리 나타나 주기를 간절히 바라던 순간.
-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멀리서 들려온 엄청난 굉음에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숲 지대 아래 먼 곳에 보이는 늑대의 궁 일각이 ‘노을빛’ 기운 속에서 산산이 터져 나가는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본디 전혀 예상치도 못한 광경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법이라.
“어…….”
우란 누드와 라프탄의 눈이 확대되며 절로 입까지 떡 벌어지는데.
“이런 빌어먹을!!”
이내 먼저 정신을 차린 우란 누드가 한마디 욕설을 내뱉으며 번개처럼 늑대의 궁 방향으로 사라졌다.
- 네놈! 사악한 정령사! 기억해 두겠다!!
상대방으로선 억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만이 그가 떠난 공간을 맴도는 가운데.
여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라프탄의 머릿속에 얼마 전 타이니와의 대화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 발견하면 네가 죽이겠다고? 네가 암살을? 흔적 안 남게 제대로 할 수 있겠어?
- 암살이 뭐 별거냐?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지.
- 그건 암살이 아니라 몰살 아냐……?
“서, 설마, 진짜……?!”
아무래도 그가 속으로 애타게 찾던 동료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