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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246화 (246/500)

246화. 우란 누드

그는 날 때부터 거대했다. 아니, 그랬다고 들었다.

아무리 수인족이 부모의 특성과 상관없는 종의 힘을 물려받는다고는 해도, 그의 경우는 굉장히 이례적이었다.

강력한 전사였던 그의 어머니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을 정도로 큰 아기.

차라리 그 남다른 덩치만큼 특별함을 보여 주었으면 상황이 나았을 텐데.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덩치만 클 뿐 자기 몸도 못 가누는 ‘진짜 아기’라는 사실에 아버지는 크게 실망하고 분노했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의 특성이 고대 신께 반역했던 인어족의 저주로 탄생했다는 ‘고래’ 종의 것이며, 그중에서도 그가 유별나게 큰 개체일 것이라 짐작했었다고 한다.

따라서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와 상의해 ‘명예 살인’을 준비했다 했던가.

다만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수인화’를 시도했고, 그렇게 발현된 종의 특성은 주변의 어떤 수인족도 처음 보는 희귀한 것이었다.

- 뿌우우!

아기 같지 않은 덩치, 기다란 코, 튼튼하고 질긴 피부.

다행히도 그런 해양 생물은 없었기에, 그는 명예 살인의 위협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다만 불행인 것은 너무나도 독특한 발현 특성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더욱 멀리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 제 어미를 잡아먹은 놈.

- 밖으로 나가지 말거라.

- 그 흉한 몰골을 남에게 보이지 말란 말이다!

아버지는 그가 위대한 수인족이 아닌 괴물의 특성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원체 대식가인 다른 수인족들에 비해서도 유난히 많이 먹고 또 빨리 자라는 그의 신체도 그 의심에 한몫했을 것이다.

상황이 그랬던 탓에 유년기에는 그야말로 끔찍한 기억만 가득했던 그의 인생은, 소문을 듣고 왕궁에서 사람이 찾아오면서 바뀌게 되었다.

- 드디어! 찾았구나! 왕실 제사장의 재목을!

왕궁에서 그를 찾아온 이, 즉 스승님은 그를 보자마자 감격에 젖어 무릎을 꿇었다.

- 넌 괴물이 아니다. 동대륙에 존재하는 코끼리라는 신성한 동물의 특성이 발현된 거지.

- 몇백 년 만에 태어난 ‘신성한 코끼리 수인’. 넌 제사장으로서의 운명을 타고난 거야!

역대 제사장들의 기록을 통해 그의 본질을 파악한 그의 스승, 선대의 우란 누드가 그를 후계자로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왕실로 향하게 되었고, 스승에게 정령술을 배웠다. 스승의 사후, 왕실의 수호령이자 고대의 정령인 ‘펜릴’의 계약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 교육, 아니 수련은 고달프기 그지없었지만, 태어나 처음 받아 보는 관심과 애정은 그 어떤 것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다.

- 너라면 펜릴의 제대로 된 반려가 될 수 있어. 오랜 기간 비어 있던 왕실 제사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펜릴의 계약자로서 우란 누드라는 이름을 계승하기는 했지만, 그 경지가 6단계에 머물렀기에 정식으로 왕실 제사장은 되지 못했던 스승.

그 스승의 한을 풀어 주겠다는 일념하에 그는 끝없이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의 나이가 마흔이 되었을 때, 마침내 그 바람을 이뤄 줄 수 있었다.

- 여한이 없다, 여한이. 이제는 네가 우란 누드다. 네가 ‘진짜’ 왕실의 제사장이야.

노쇠한 스승은 스피릿유저가 된 그의 품에서 웃으며 잠들었다.

그리고 ‘고대 정령’ 펜릴의 두 서브 계약자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유일한 계약자의 자격으로 150여 년 만에 정식 왕실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그에겐 그것이 기쁨이 되지 못했다. 제게 정을 주고 사랑을 베풀어 준 유일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 버렸으니까.

결국 그는 세상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왕궁의 신전에 칩거하며, 사랑하고 존경했던 스승의 흔적을 더듬으며 살기 시작했다.

간혹 왕의 권유로 왕국의 장군들과 대련을 하거나 왕실 제사장으로서 왕궁의 제례를 주관할 때 외에는 굳이 외부로 나서지도, 외부의 소식을 전해 듣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대장군의 축출이라는, 최근의 변란도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 부탁한다. 왕실 제사장으로서 의무를…….

스승의 유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뒤늦게 몰려왔다.

그래서 다시 세상에 관심을 가져 볼까 하던 시기.

갑자기.

- 아우우우우우.

늑대의 궁 내부에서, 펜릴이 아닌 다른 정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 *

라프탄은 타이니가 가르쳐 준 마나 동결 해제 방법을 몇 번이나 시도해 본 끝에, 그중 세 번째 방법으로 간신히 의태와 라미를 유지하며 에르켐투스로 들어왔다.

목표인 체베르나 사를 살힌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진입하고 나서야 타이니처럼 간과하고 있던 점을 깨달았다.

‘X발, 생긴 게 다 똑같잖아!?’

덩치랑 털 색만 다를 뿐, 늑대인간들의 얼굴은 거의 다 똑같아 보였다.

자료로 사를 살힌과 체베르의 얼굴을 보았을 때는 회색과 은빛 털 때문인지 확실히 구별됐었는데, 돌아다니는 인구의 반수 이상이 늑대인간인 왕족의 영역에서는 비슷하게 생긴 놈들이 너무 많았다.

늑대인간이라는 것은 수인족에게 자랑이기에, 시종을 제외하면 그 흔한 인간화 상태로 돌아다니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들 뻔한 것도 잠시, 이내 라프탄은 벽에 의태한 그의 앞으로 지나가는 한 늑대인간을 바라보면서 차츰 정신을 되찾았다.

‘옅은 은색……이 섞여 있네?’

그러고 보면 실버 팽은 완전히 은색이었고, 체베르는 아예 빛을 뿜어내는 듯한 은색이라고 했다.

사를 살힌은 그 이름 그대로 완전히 회색이라고 했으니, 체베르의 희소성은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회색이나 갈색 늑대인간은 웨어비스트 왕국 평민 중에서도 종종 나오지만, 왕궁에는 하나뿐이라고 했던가.

‘빛나는 은색 털과 회색 털만 찾으면 된다.’

그리고 그 위치를 타이니에게 알려 주기만 하면 된다. 굳이 자신이 무리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 생각이 라프탄의 마음을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라미, 빛나는 은색 털과 회색 털이다. 찾아.’

- 크륵.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귀염성 없는 대답과 함께, 라미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녀석은 굳이 몸을 숨길 필요가 없었으니까.

다만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오! 우쭈쭈, 여기까지 왔어? 이 녀석, 크게 될 녀석이구나.”

“너무 귀여운 녀석인데?”

“낑?”

들어오는 길에 만난 시종들은 금기라도 되는 듯 라미를 건드리지 않았던 데 비해, 이곳 왕족들은 작아진 라미를 들어 올리거나 쓰다듬으며 서슴없이 애정을 표한다는 것이었다.

‘흥, 우리 라미는 본래 모습으로 덩치만 작아지는 게 더 귀엽……. 아, 이게 아니지.’

사실 수인어를 다 알아듣는 그로선 늑대인간들이 자신의 정령을 예뻐하는 게 싫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곤란했다.

‘젠장.’

이래서야 라미도 처음부터 주변 환경에 의태하는 것이 나았을 것 같았다.

‘손길 벗어나는 대로 환경 의태 해.’

- 크릉.

그렇게 의사를 전달해 놨지만.

“뭐야? 새끼 늑대가 여기까지?”

“심지어 은색이네?”

“크게 될 녀석이야.”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얘 혹시, 그 사라진 북쪽 숲 주인의 새끼 아닐까?”

“에이, 사라진 지 이십 년이 넘었다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들어올 정도면…….”

“어……. 혹시 그렇다면 대박인데?”

“야, 나도 좀 안아 보자!”

북쪽 숲의 주인?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오히려 더욱 몰려드는 늑대인간들의 꼴을 보니, 한동안은 빠져나오기가 어려울 듯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라미가 왕족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는 틈에 자신이 홀로 목표를 찾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전달하자마자.

- 킁.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대답과 함께.

“아우! 아우우우우우!”

라미가 늑대의 하울링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끼가 하울링을!?”

“역시 크게 될 녀석인가!”

“진짜 북쪽 숲의…….”

더더욱 모여드는 늑대인간들.

그로선 제발 저 중에 정령과 실제 동물을 구별할 수 있는 놈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걸리기 전에 찾아야 하는데…… 어디 있냐, 이것들아.’

애써 조급함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라프탄은 벽을 타고 조금씩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천운이 따라 준 걸까, 아니면 비교적 인적이 드문, 더 깊숙한 곳으로 향한 그의 판단이 맞았던 걸까.

점점 넓어지는 동시에 방의 수는 적어지는 에르켐투스의 중심부에서, 그는 빛나는 은빛 털의 늑대인간을 발견했다.

‘찾았다!’

사실 빛나는 은빛 털이 아니더라도 알아봤을 것 같았다. 놈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정복을 입은 채 챌린저급으로 보이는 표범, 호랑이, 곰 수인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니까.

‘체베르.’

눈을 빛낸 라프탄은 이내 신호를 보내려다가, 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놈이 이쪽에서 발견되었을 때 보내기로 약속한 신호는 라미가 월랑을 찾아가는 것.

물론 반대로 타이니가 발견하면 그 혼자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멀어진 라미를 향해 잠시 의식을 집중해 보니.

“어디서 왔니, 얘야.”

“진짜 북쪽 숲에서 왔어?”

“귀엽네. 어머, XX 있는 거 보니 수컷이구나.”

……씁.

라미는 성희롱까지 당하며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었고, 탈출은 아무래도 힘들어 보였다.

라미를 당장 사라지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바로 에르켐투스 전체에 난리가 날 테고, 눈앞의 목표도 어디론가 꼭꼭 숨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쩐다…….’

그렇다고 자신이 혼자 챌린저급 수인족 셋을 감당하고 놈까지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다른 방도를 생각해 내지 못한 라프탄은, 결국 최대한 조심스럽게 목표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조차 쉽지만은 않았다.

“음?”

“왜 그래.”

“아니, 느낌이 조금 이상한데.”

분명 거리를 제법 두고 따라갔는데, 호랑이 수인 하나가 자신이 있는 위치를 보며 눈을 빛낼 때는 정말이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 와중에 자신이 수인어를 알아듣는다는 게 두려움을 더욱 배가시켰다.

라미의 능력은 모습은 물론 냄새나 마나의 흐름까지 일체화시키는 최고의 특성이었으니 들킬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아냐. 그냥 착각인 것 같다.”

“아미르, 자네 요새 너무 예민한 거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지. 지금 상황이…….”

그렇게 한 번의 고비는 넘어간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목표가 향한 넓은 방.

너무 넓어서 파티장으로 써도 될 것 같은 그 광활한 방에서, ‘빛나는 은빛 털의 늑대인간’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후계, 상징성을 생각해서라도 인간화는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나는 이게 편하단 말이다. 사를 공이 아니라면 참견하지 말도록.”

그렇게 드러난 모습은 수인화 상태의 털처럼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체모를 제외하면, 라프탄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가, 가리온!?’

미남이긴 했지만 매끄럽게 잘생겼다기보다는 타인에게 신뢰를 주는 그 훈훈한 인상은 라프탄에게 증오 그 자체로 남아 있었으니, 체모의 색깔이 좀 바뀌었다고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에이, 설마…….’

아닐 것이라 애써 부인해 보지만, 그럴수록 놈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볼에 난 작은 흉터와 인상을 찡그릴 때의 특유의 습관까지도.

보면 볼수록, 그가 아는 가리온임이 확실했다.

- 그런 물건들을 고작 생필품 몇 개에 넘기신다고? 솜씨는 뛰어나신데, 좀 어수룩하시구먼.

- 우리와 함께 갑시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도와주겠소.

자신이 상인들에게 사기를 당하고 있음을 알려 준 은인이자, 그보다 더 크게 자신을 등쳐 먹고 튄 쓰레기들의 대장.

그러나 놈은 분명 인상만 좋은 사기꾼, 즉 그냥 인간이었다.

‘가리온, 네놈이 어떻게?!’

라프탄은 당장이라도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혼신의 인내심으로 그것을 참아 냈다.

원한은 원한이고, 임무는 임무다.

길진 않지만 자신의 인생을 바꿔 준 발렌티아에서의 경험이, 그의 이성의 끈을 붙들어 준 것이다.

그렇게 애써 사적인 원한을 억누르고 임무에 집중하려는데.

- 정령사가 살기를 뿌리는가, 불청객이 확실하구나!!

갑자기 들려온 분기 어린 고함과 함께.

콰아아아앙!

우르르릉.

방의 한쪽 벽이 터져 나가며, 키가 3m도 훌쩍 넘는 것 같은 회색 피부의 괴물(?)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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