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계획
오크족의 동북부 부족들과, 아스란 제국의 북부군이 웨어비스트의 국경으로 움직이고 있다.
오크족과 엘프족, 아스란 제국은 웨어비스트의 후계자 체베르를 말룸의 하수인으로 지목하고 축출을 요구하고 있다.
웨어비스트 왕실 입장 표명, 제국의 수작이다! 어리석은 오크들이 인간들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다!
웨어비스트 왕실 공식 발표로 인한 당국 군단들의 비상 경계 태세가 이어지며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자, 모두의 시선이 대륙의 북부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아스란 제국에서 최후의 협상을 위해 사신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그 사신단에는 축출된 문나이트가 포함되어 있다.
더해진 소문 하나가 긴장 상태의 웨어비스트에 보이지 않는 균열을 만들어 냈다.
“대장군님이?”
“그럼 그 소문이 정말로?”
“뭐가 대장군이야. 반역자잖아!”
“그걸 믿어!?”
문나이트 축출 사건이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
웨어비스트의 7대장군 중 셋이 문나이트의 반역 혐의와 ‘라이칸스로프’ 체베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왕국 전역에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으니까.
“정말로 순혈의 등장이…….”
“악마추종자들 짓이라고?”
“에이, 설마.”
“그래도…….”
웨어비스트 왕국 내부에서도 왕실의 발표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 * *
“왜, 왜 연락이 없는 거야, 왜!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진짜…….”
이상할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의 털을 가진 늑대인간이 화려하게 꾸며진 거실을 서성거리며 연신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예고도 없이 방문이 열리더니, 화려한 은빛 늑대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입은 이가 걸어 들어왔다.
“자중하라고 했을 텐데요, 후계님? 바깥까지 그런 목소리가 들리면 곤란합니다.”
은빛 늑대인간, 체베르와는 달리 여유로운 목소리의 주인은 유독 사나워 보이는 인상의 회색 늑대인간이었다.
그런 그를 체베르가 반색하며 맞이하는데.
“아, 안 그래도 내가 찾아가려…… 억!”
꽝!
일순간 몸을 움직인 회색 늑대인간이 그의 머리를 잡고는 그대로 값비싸 보이는 탁자에 찍어 버렸다.
“끄, 끄르륵.”
탁자를 쪼개고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체베르의 이마에서 ‘은빛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피를 일견한 회색 늑대인간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신음을 흘리는 체베르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를 뱉었다.
“불안한 티 좀 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도대체 몇 번을 더 말해야 들어 처먹을까? 응?”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나긋한 데 비해, 체베르의 목을 움켜쥔 손의 힘은 더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끄, 끄윽. 죄, 죄송……. 사를 님. 용서를…….”
아무리 수세에 몰린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왕국의 후계라는 자답지 않는 지나치게 비굴한 자세.
그리고 그런 말이 나오고 나서야 회색 늑대인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며 그 손에 힘이 풀렸다.
“쿨럭. 쿨럭.”
기침과 함께 눈물과 콧물을 쏟아 내는 체베르.
그리고 그가 호흡을 다 고르기도 전에, 은빛 피로 흥건하던 이마가 언제 깨졌었냐는 듯 아물어 버렸다.
그 신비한 모습이 못마땅한 건지, 사를은 조금 전의 미소를 지운 채 미간을 찌푸렸다.
저 은빛 털도 모자라 피까지 은빛인 걸 보니, 놈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삼 가슴 깊이 숨겨 두었던 열등감이 꿈틀거렸던 것이다.
- 왜 왕실의 핏줄인데 은빛이 조금도 없어?
- 회색 늑대인간이야 평민 중에서도 종종 나오잖아.
- 쓰읍, 역시 천한 핏줄이 섞인 거 아닐까?
태어나면서부터 사를(прдещк, 회색)이라는 천형에 갇혔던 삶.
더구나 같은 핏줄임에도 은빛을 타고난 데다 재능까지 출중한 형, 먼갈럭(вьыйдс, 은빛) 살힌의 그늘에 묻혀 살아왔다. 종국에는 같은 돌림자인 살힌(йлалф, 바람)이라는 나머지 이름마저도 잊힌 채 그저 사를이라 불릴 정도로.
‘이제야 내 세상이 왔다. 절대로 포기 못 해.’
사를 살힌은 그렇게 다시 각오를 다지며, 체베르가 정신을 차릴 때쯤 나지막이 본론을 꺼냈다.
“그분의 연락이 왔다.”
“그럼……!”
체베르의 낯빛이 환해지는 것을 보며, 사를은 자신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 그분이 인간 애송이한테 당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흥.”
사실 자신 역시 연락을 받기 전에는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건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역시! 그럼 이 상황에 대한 해결책도 말씀해 주셨습니까!?”
“물론.”
그 대답에 체베르의 미소가 진해지는데.
“제국은 절대 전쟁을 일으킬 수 없으니, 겁먹지 말고 시간을 끌라고 하셨다. 그리하면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예?”
고작 그게 끝이냐는 듯한 표정.
그에 사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는 알 필요 없습니다, 후계님. 그분의 계획은 완전하니 그저 믿고 따르면 될 일이지요.”
갑작스레 존대로 바뀐 말투는 더 이상 체베르를 제대로 상대해 주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체베르의 볼살이 잠시 경련을 일으켰지만, 이내 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말룸에 의해 만들어진 라이칸스로프, 그 약점이 있는 이상 제겐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사를이 그런 체베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시지요, 후계님. 그 대가로 당신은 이 땅의 왕이 될 겁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꼭두각시에게는 말할 수 없는 진짜 계획을 떠올렸다.
- 시간을 끌고 버티다가, 제국의 사신단이 물러가려 하거든 꼭두각시를 폐기하라.
- 이제는 제국 소속이 된 문나이트의 짓으로 만들어서.
- 끝내 협상을 거부하니 제국이 무력을 행사했다…… 정도가 좋겠지.
‘뭐, 여차하면 저 녀석에게 복면을 씌워 형을 암습하게 만들어도 되고.’
아니, 그게 제일 쉽겠는데?
‘형이 복면을 쓴 저 녀석을 죽일 때, 경비병들과 내가 들이닥친다면?’
그 상상을 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마 그 순간 과거의 대장군 문나이트의 명성은 바닥을 치게 되고, 웨어비스트와 제국의 전면전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리하면 나는 제국을 정벌하고, 대륙 최강의 국가를 건설한 진짜 황제가 될 테니까.’
그러나 웨어비스트가 어떻게 북부 산맥 지대를 떠나 평지에서 아스란 제국을 압도할 수 있을까. 설령 기책을 발휘해 제국을 정벌할 수 있대도, 그 이후에 온전히 지배권을 행사할 병력이 남아 있을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사를은 자각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아주 흐릿한 분홍빛 마력은 끊임없이 그의 머릿속에 분홍빛 환상을 주입하고 있었으니까.
이미 야망이란 마법에 잠식되어 있던 그에게 더해진 고등급 현혹 술수는, 그 당사자나 주변 사람들이 조금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 * *
“문나이트가 제국의 사절로 웨어비스트에 간다고요? 도대체 그런 미친 생각은 누가 한 겁니까?!”
일행이 웨어비스트에 들어서고 한참이 지나서야 전해진 소식에 정색하며 소리치는 제이.
그에 대한 타이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검제.”
그 순간 당장이라도 욕을 쏟아 낼 것 같던 제이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흠, 영명하신 각하께서 무슨 복안이 있으시겠지요.”
끄응.
그렇게 억지로 말을 얼버무리던 제이는 이내 다시 무언가 생각난 듯 따지고 들었다.
“그럼 채찍과 당근 사이에 칼을 집어넣자는 식의 무식하다 못해 미쳐 버린 작전은요!? 우리 각하께서 그따위 계책을 내셨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어. 그건 딴사람.”
“역시……!!”
“황제.”
“……여, 역시, 젊은 황제 폐하께서는 바, 발상도 남다르시군요. 허……. 하, 하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극단적인 태세 전환.
그런 제이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타이니는 명상 수련하던 자세를 풀고 오랜만에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제이의 눈동자에 비친 ‘티아 상단’ 소속 용병 ‘잰슨’의 금색 머리와 푸른 눈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완벽한 계획 실행을 위해선 동료의 불안을 덜어 줘야 할 필요도 있었다.
“어차피 위험한 일은 내가 해. 너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필요한 정보를 전해 주고, 돕기만 하면 되니까 큰 부담 갖지 마.”
모두가 아는 사실에 나름의 위로를 더한 말이었는데,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떻게 부담을 안 가질 수 있겠습니까! 잘못되면 그냥 다 죽을 판인데!?”
……뭐, 그렇긴 하지.
씁.
“그래도 체베르를 처리하기 위한 임무라는 것은 미리 알았잖아?”
“제가 그 칼자루 노릇을 하는 건지는 몰랐죠! 그냥 사전 공작을 시키려는 건 줄…… 하긴, 타이니 경을 이 작전에 끼워 넣었을 때 눈치챘어야 했나? 이런 젠장, 바보 같은 착각을……!”
“……너 지금 그거 욕이지?”
타이니가 불퉁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제이가 황급히 말을 수습했다.
“웨어비스트는 특성상 우리 요원을 심기도 어렵단 말입니다. 완전히 저 혼자서 일을 처리하고 살길도 찾아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수인족 나라고…….”
제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타이니는 그런 변명보다도, 분명히 본모습이 아닐 텐데 디테일한 표정까지 나타나는 변장에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분명 마법도 아닌데 말이지.’
그 응시하는 시선을 안 좋게 느낀 걸까, 제이의 말이 더욱 길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상단을 최대한 끌어모아서 덩치를 부풀려야겠습니다. 아니다. 그 정도 고기 방패들로는 불안한데……. 아으…… 진짜! 그런 얘기는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고기 방패……? 허…….”
타이니가 그 내용보다 놀라운 단어 선정에 감탄을 표하자 제이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흠.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시국이 이러니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풍파를 막고 같이 살자는 뜻이죠, 그래도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제가 준비하기 조금이나마 편하지 않았을까. 예, 그런 의미죠.”
하지만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내가 사람을 들어서 화살 막아 본 적이 있긴 한데, 그런 표현은 미처 생각도 못 했네. 역시 똑똑한 사람들은 발상이 남달라.”
“쓰레…….”
“뭐?”
“아, 하하. 아닙니다.”
피식.
지금 제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지만, 말세의 때를 제외하면 항상 혼자 싸워 온 자신이다.
전투에선 늘 사방이 적이었으니, 사람을 무기나 방패로 쓴다 한들 무슨 상관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문나이트는 왕성 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사절단을 홀대할 수도 없으니, 중요 인물 중 몇은 왕성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거다. 자연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편해질 테고. 뒷수습은 사림, 문나이트가 알아서 할 거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마.”
“작전대로 안 되면요?”
“그땐 알아서 살아야지.”
“타이니 경!!”
“고함지르지 말지? 밖에 다 들릴라.”
“방음 처리된 마차라 괜찮,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무책임하게 그러실 겁니까!?”
“응. 난 성공할 거니까.”
그 태평한 대답에 제이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살길은 제가 찾아보지요.”
“성공한다니까.”
“하…….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무언가 주저하던 제이는 이내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제가 가장 불안한 것은, 계획의 성패보다 그 이후의 대처입니다. 왜 뒤처리를 온전한 제국 사람이 아닌 문나이트에게 맡긴 겁니까?”
“신뢰가 안 된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자가 계획 성공한 후에 갑자기 칼을 거꾸로 쥘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자는 전통의 숙적, 웨어비스트의 대장군이었다고요!”
타당한 반론이었지만 그것은 문나이트 실버 팽, 먼갈럭 살힌이라는 남자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인지라, 타이니는 그저 피식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러자 제이가 불안한 듯 한마디를 더 보탰다.
“혹시 그 안일한 생각을 각하나 황제 폐하께서 하신 건 아니죠?”
“응.”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건 역시 타이니 경이……!”
“클로이 황후.”
“으으으…….”
더는 태세 전환도 힘들다는 듯 제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미안해졌다.
‘미안하다. 내 생각이다.’
그냥 네 반응이 재밌어서 뻥을 좀…… 흠, 흠.
그렇게 속으로 키득거리고 있는데,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제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무언가 결심한 듯 단호하게 말을 뱉어 냈다.
“계획을 조금 바꿔야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과하게 압박하면 다른 변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최근 정세 때문에 수인족 거래 상대들의 반응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것도 있고요. 그러니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계획보다 조금 이르게…….”
제이는 걱정하는 듯했지만, 그 압박이란 무려 제국과 오크족의 연합, 그리고 엘프의 방조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변수가 생길 수 있을까?’
제이의 말이 이어질수록 타이니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것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