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예언
“혼돈의 씨앗이 도래해 파멸의 운명을 가속시킬 것이다, 운명의 변수를 도와라? 이건 정말 애매하군요.”
용사, 크롬벨의 말에 교황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혼돈의 씨앗이란 말에는 정말 부정적인 느낌만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변수를 도우라는 말에선 분명 긍정적인 뜻이 느껴졌지요.”
문맥상 파멸의 운명을 가속시킨다는 혼돈의 씨앗이 곧 운명의 변수일 텐데, 그 변수를 도와라?
교황은 신탁을 본인의 입으로 말하면서도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감정을 느꼈다.
더구나 그 변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용사 역시 얼굴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혼란스럽군요.”
“예. 앞뒤가 맞지 않는, 아니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신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지 못한 것이지요.”
“이해합니다, 성하.”
크롬벨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런 그를 보는 교황의 얼굴에 작은 불안감이 깃들었다.
“용사님.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신탁은 자의로 해석하시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금기…….”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랬다간 모든 것이 틀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아마 제가 가장 잘 알 겁니다.”
모든 것이 틀어지게 해 봤다는 말일까? 고대에 세상을 구했다는 용사가?
쓴웃음을 짓는 용사의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거기에 담긴 각오만큼은 여실히 느껴졌다.
그런데 용사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만…….”
“예?”
“변수를 도우라는 말은 아무래도 성하께서 자의적으로 해석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 저는 신탁을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만.”
“돕다, 도와라……. 변수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라’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예? 하지만 분명 긍정적인 느낌이었습니다만?”
“그러니까요. 올바른 방향으로 말입니다.”
“허…….”
어찌 보면 말장난 같았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오히려 문맥을 생각하면 더 올바른 해석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하지만 본래 신탁은 문맥을 따지지 않으니, 그 모호한 단어들을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억지로 연결하면 신의 뜻을 곡해하는 것이라.
“용사님, 그건…….”
“혼돈의 씨앗이 변수라면, 마땅히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로써 운명은 올바른 방향을 찾아갈 테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모든 것이 틀어질 수 있다고 말해 놓고, 벌써 자의적 해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교황의 얼굴에 깃든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을 보면서 크롬벨은 슬쩍 말을 돌렸다.
“뭐, 어찌 되었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올바른 방향으로 저와 신전의 힘을 쓰면 되겠지요. 강림의 시간이 머지않았으니, 충분히 대비할 수 있도록.”
올바른 방향으로. 지금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만큼은 정론이라.
“그건 맞습니다.”
교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죄송하지만 성하께 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
“엘프족과 연락해, 혹시나 계약 전이거나 주인을 잃은 정령을 찾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아……!”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하던 교황은 이내 무언가 깨달았는지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크롬벨 역시 빙긋 웃음을 보였다.
“예, 저는 정령사이기도 하니까요. 다만 봉인되면서, 아니 잠들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그 친구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지요.”
찜찜함과는 별개로, 용사의 능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셨군요. 트리플 클래스가 아닌 쿼드러플 클래스. 하, 그 전설이 진짜였군요.”
교황은 새삼 감탄하는 눈으로 용사를 바라보았지만, 당사자는 손사래를 치며 겸양을 표했다.
“하하.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정령을 얻는다 해도 전성기의 힘을 찾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그런데 엘븐하임은, 음…….”
교황이 무언가를 생각하며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데, 크롬벨이 엉뚱한 부분에서 말꼬리를 물었다.
“엘븐하임? 아, 아직도 세계수의 도시가 남아 있었군요?”
“……예? 제 기억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때는 언어 위주로 습득하느라 말입니다. 하하, 그게 자주 쓸 수 있는 수법도 아니고 만능도 아닙니다. 아무튼 아직 엘프들의 도시가 남아 있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크롬벨은 그 말을 하며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것이 교황에게는 조금 이상하게 와닿았다.
“다행……이라니요?”
“예전 마계 대전에서, 제가 마지막에 큰 실수를 하는 바람에 당시 세계수를 날려 먹었거든요.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잠들었는데…….”
“…….”
그 말에 교황의 얼굴이 멍해졌다. 새삼 자신이 대화하는 상대가 고대의 용사라는 게 실감이 났던 것이다.
다만 그 내용이…….
“세계수를 뭘 어떻게 하셨길래……?”
교황이 미심쩍은 눈길로 되묻자 용사가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음? 아, 그 얘기는 전해지지 않았나 보군요. 부끄러운 일이라 말씀드리기 좀 그렇습니다. 아무튼, 엘븐하임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현대에는 다음 세계수가…….”
“……존재합니다.”
“하하,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겠군요.”
다만 계속 웃음 짓는 용사를 보다 보니, 교황은 앞선 찜찜함과는 또 다른 위화감을 느꼈다.
어렵지 않다니? 상대는 엘프족인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
“엘븐하임과 저희 신전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예?”
그 말에 용사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엘프들이 단체로 배교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아, 아닙니다. 여전히 그들은 어머니 세계수와 더불어 여신을 따르고 있지요. 그런데…….”
“……그런데요?”
“정확한 사연은 모릅니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엘프들이 신전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습니다. 아마 저희 신전이 본분을 잊고 타락했을 때의 잘못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
“……조금 전에,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황이 말끝을 흐리며 크롬벨을 바라보자, 이번에는 그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네가 세계수를 날려 먹었다며.
그 생략된 말이 그대로 귀에 꽂히는 듯했으니까.
“……아, 하하. 예,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면, 어렵겠습니까? 혹시 이 시대에는 정령이 흔하거나 하지는…… 않겠군요. 하, 이걸 어쩐다.”
그가 살짝 눈치를 보며 어렵게 꺼낸 말에 교황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 아닙니다. 그래도 아예 연을 끊은 것은 아니니, 신전의 쇄신을 알리고 적합한 대가를 제시하면 엘프들도 협조해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황의 말에는 많은 가정이 들어가 있었지만, 크롬벨은 차마 거기서 더 정령에 대한 말을 보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도 염치 불고하고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리고 제가 봉, 크흠, 잠들기 전에 남겨 놓은 데우스(Deus)…… 아, 지금 용어로는 초월무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 그걸 어디에 뒀는지가 생각이 나질 않는군요.”
“예?”
“아마 ‘아니무스(Animus)’라는 이름을 지어 놨을 겁니다. 고대어로 정신이라는 뜻이지요. 제가 미래의 용사를 위해 남겨 놓은 물건인데, 어떻게든 찾는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아, 물론 못 찾으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입니다.”
“아, 아닙니다. 신전의 영향력을 총동원해서 소재를 알아보겠습니다.”
용사가 남긴 무구라니, 엘프들에게 정령을 달라고 부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더 확률이 높지 않을까.
교황은 그렇게 생각했기에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러면서도 또다시 찜찜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래의 용사라니?’
아무리 용사라 해도, 보통 자기 자신을 그렇게 3인칭으로 표현하나?
이것도 갓 핸드 경이 심어 놓은 찜찜함 때문일까.
교황이 더욱 가중되는 불안감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때, 용사가 또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일단 이 세상의 최근 굵직한 변화 같은 것을 좀 알았으면 합니다. 인류의 연합을 공고히 하기 전에 혼돈의 씨앗이라는 것을 찾아야 할 테니까요.”
“세상의 변화 말입니까?”
“예, 아무래도 뭔가 큰 사건이 있었으니 파멸의 운명이 당겨진 거겠지요. 일단 정보를 수집한 후에, 사실 확인을 위해 제가 직접 움직여 보겠습니다. 그전까지 정령과 아니무스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말에 바로 흐려지는 교황의 표정을 본 크롬벨이 작은 한숨과 함께 부언했다.
“아니면, 먼저 움직여야겠지요. 아무튼 노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리고 또 정말 죄송한 말입니다만, 성검과 성녀는…….”
연달아 부탁만 하는 것이 미안한지 용사가 말끝을 흐리는데, 이번에는 교황의 표정 역시 그리 좋지 않았다.
“아, 성검은 당연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당대에는 아직 성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
용사의 동반자이자 조력자, 현실에 재림한 여신의 화신. 성녀.
당연히 있어야 할 신전의 상징이자 또 하나의 비밀 병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 그것이, 30년 전 불미스러운 일로 당대 성녀께서 세상을 떠난 뒤로, 성녀의 의식을 치를 만한 재원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조금 전까지 조심스레 말하던 용사도 다소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여신의 뜻을 설파하기 위해서 항상 존재해야 할 상징이자 화신인 성녀가 없는 여신교라니?
어이가 없다는 듯한 용사의 눈빛에, 교황은 우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타락한 사제들이 당시 성녀에게 저지른 만행을 차마 자신의 입으로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로 인해 단절된 성녀 의식의 비밀을 복원해 내는 데만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은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10년 전부터 성녀의 후보자로 꼽았던 재원이 있습니다만, 차마 귀의를 강요할 수 없는 신분인지라……. 더구나 최근에 혼인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으니, 그때부터 다른 후보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원래 예언의 시기에 당신이 깨어났다면, 성녀도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변명을 하기도 전에 크롬벨의 입에서 성난 고함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나 됩니까!? 이 세상에 성녀보다 더 고귀한 신분이 어디 있다고 신분 문제라니요!?”
광신자나 할 법한 말이지만, 그 광신자의 대표가 듣기엔 절로 고개를 끄덕일 만한 분노였다.
다만 현실을 아예 부인할 수는 없으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강성한 아스란 제국, 그곳의 황후가 되었다고 합니다.”
“끄응, 그래도. 하…….”
“성검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성녀 후보 또한 빨리 찾아서 다시금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신교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인 교황이 마치 아랫사람처럼 고개를 숙이는데, 용사는 그것을 못 본 것처럼 입술을 깨물며 혼잣말을 이어 갔다.
“……정말 많은 것이 예언과 어긋나 있군요. 아까 한 말을 철회하겠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
“최근 몇 년간,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 어디입니까? 먼저 그곳부터 가 보겠습니다.”
“용사님, 지금은……!”
“물론 제 신분으로 움직이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검과 함께, 위장할 신분을 준비해 주십시오. 자료를 통해서 상황을 파악하기보다는 제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겠습니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고개를 숙이던 교황은 그 말에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적극적인 분이 아니신 걸로 아는데요?”
과하게 적극적인 크롬벨의 태도가 전설 속, 예언 속 용사와 사뭇 다르게 느껴졌으니까.
“과거에는 그러했지요.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많은 기회를 놓쳤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너무 순진했고, 소극적이었으며, 어리석었으니까요. 그게 결국 가장 큰 실수를 불렀죠.”
무언가 맺힌 게 있는 것일까.
그 말을 하는 크롬벨의 눈은 순진하다기보다는 날카롭게만 보였고, 그런 용사를 보는 교황의 눈빛은 더욱 깊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