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출발
“오랜만입니다, 타이니 경. 지금은 산만큼 커지셨을 줄 알았는데, 성장이 멈추긴 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의 중년인이 친근한 듯 말을 걸어 왔지만.
“컹!”
나도 알아.
이제는 체화된 소울 사이트가 그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오랜만이야, 제이. 그리고 옆에…… 라프탄 네놈, 사고 안 치고 있는 거겠지?”
제이에게 인사를 건넬 때와는 다르게, 그 옆에 있는 노신사를 보는 타이니의 시선은 매서울 정도였다.
그러자 노신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갈색 머리 푸른 눈의 청년으로 변했다.
“오, 역시 한 번에 알아보시는군요. 봤죠, 라프탄 씨? 성장해 봤자 안 된다니까요.”
“……으, 짐작은 했지만.”
녀석이 제이에게 건네는 돈주머니를 보며 타이니가 눈을 부릅뜨자.
“내기야, 내기!! 사고 안 쳤다고! 오히려 공을 세웠지!! 아니, 분명히 알려 줬다고 들었는데……!?”
라프탄이 다급하게 외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쯧 하고 혀를 차던 타이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서 한번 떠본 것인데, 다행히 여전히 전생처럼 망가지진 않은 것 같았다.
“컹?”
아냐, 그냥 패고 싶었던 건. 이 녀석이 누굴 깡패로 보나.
“킁!”
검제가 대련 안 받아 줘서 스트레스 쌓인 거…….
“아니라고!”
“네?”
“아, 아니. 아니야. 그럼 이번에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예, 바로 저희입니다. 상황 컨트롤은 제 지시에 따르시고, 라프탄 씨는 경우에 따라 단독 잠입이나 타이니 경의 전투 보조를 할 겁니다.”
전투 보조?
그 말에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라프탄을 쳐다보니, 그사이 녀석이 6단계의 정령술사로 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몰라도 라프탄의 나이는 많이 봐 줘도 서른 초반. 그 정도에 6단계급 술사도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으니.
‘역시 이 녀석도 정령술에 관해서는 천재라고 봐야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라프탄이 조금 용기를 얻은 것인지 슬쩍 한 발짝 나와 물었다.
“그런데, 결국 문나이트는 같이 안 가는 건가요?”
“그 친구는 너무 눈에 띌 테니까. 그것도 제이, 당신의 의견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 요즘 실버 팽이 자신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당장은 합도 잘 안 맞을 것 같았지만, 그런 사유보다는.
“맞습니다. 은빛의 늑대인간이 수인족 사회에 숨어들긴 아무래도 어렵죠. 그 덩치를 변장시키기도 어렵고요.”
제이가 말한 이유가 더 컸고, 결국 이번 작전에서 실버 팽은 아예 다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타이니가 그 부분에 관해 말을 보태려는데.
“……그럼 2m짜리 거대한 워해머를 들고 다니는 인간은요?”
라프탄이 타이니가 메고 있던 녹턴을 지적하는 순간 일행은 동시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타이니는 녹턴이 너무 익숙해서, 그리고 제이는 애초에 타이니를 망치 그 자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던 터라 일순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타이니 경, 그 전투 망치는 상단의 물품 속에 넣어 둬야겠습니다.”
“뭐, 그럽……가 아니지. 그러기엔 이게 너무 무거운데?”
“사람이 들고 다니는 게 무거워 봤자…….”
“이게…….”
쿵.
우르르르.
스아아아아.
타이니가 거꾸로 메고 있던 녹턴을 내려놓자마자 땅이 푹 꺼지며 약하게나마 진동까지 퍼졌다.
거기다 주인의 손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녹턴이 노을빛 스산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하자, 그것을 본 제이와 라프탄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좀 많이 무거워. 괜히 딴 사람이 손댔다간 죽을 수도 있고.”
“주, 죽어요? 손 좀 댄다고?”
“어. 아, 너 정도면 죽지는 않겠다. 한동안 고생은 할지 몰라도.”
무슨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하냐며 애써 분위기를 전환시키려 했던 라프탄이 그 말에 그대로 얼어붙고.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초월무구라는 거군요. 가주님의 ‘붉은 날개’ 말고는 처음 봅니다.”
제이 역시 홀린 듯 녹턴을 바라보자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이 생각을 못 했네. 어이없게.”
“아, 아니다. 그 갑옷도 초월무구였죠. 그것도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슬슬 그것도 유명해질 때가 됐는데요. 모양도 특이하고.”
“아, 그러네. 이걸 어쩌지?”
씁.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갑옷이야 뭐, 특이한 형태기는 해도 적당히 색을 칠하거나 다른 갑옷을 받쳐 입으면 해결될 거 같습니다만…….”
“상인이 갑옷을 입어?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타이니가 타당한 의문을 제기하는데, 제이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가죽 갑옷 정도야 입습니다만, 뭐 그것과 별개로 타이니 경을 상인으로 위장시키라는 제안은 제가 잘랐습니다.”
“뭐?”
“타이니 경이 어떻게 상인 흉내를 냅니까? 계산은 하실 줄 아시고요? 당연히 용병이어야죠.”
……죽일까?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솔직히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라서 이를 갈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계산은 할 줄 안다. 도대체 날 뭐로 생각하는 거냐.”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작은 발악을 했을 뿐.
그에 제이가 다시 픽 웃으며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럼 3×7은요?”
“이십……이던가?”
“21입니다. 쯧쯧.”
이게 진짜……!
“아니, 갑자기 물으면 당황한다고!! 누군 안 그럴 거 같아? 너 해 봐! 324×423은!?”
“음…….”
“거봐, 너도……!”
“137,052군요.”
“어……?”
솔직히 정답을 확인할 자신도 없지만, 제이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니 맞을 거 같았다.
“……하, 씨…….”
그게 어떻게 되냐, 썩을…….
치졸하기까지 한 자신의 반격이 너무나도 쉽게 격파되자 타이니는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제이가 위로하듯 그의 등을 팡팡 치며 씩 웃었다.
“앞으로 한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용병 잰슨 씨. 일단 염색부터 하실까요?”
패배감이 엄습했지만, 타이니는 이를 악물며 다시 소심한 반격을 시도했다.
“녹턴은……?”
“녹턴? 아, 저 망치요? 저건 옮겨만 주시면 사두마차 한 대를 통째로 배정하겠습니다. 그 위에는 가벼운 식료품 정도만 쌓아 두죠. 제국산 육포 같은 걸로. 웨어비스트에서 인기가 많거든요.”
“그래도 바퀴가 눌릴 텐데? 사두마차로도 힘들 수 있어.”
“아티팩트 마차를 준비해 놨습니다. 지금 발렌티아는 그 정도는 거뜬하거든요.”
“……그런 걸 타고 다니는 상인은 말이 안 되지 않아?”
“많습니다. 무게 줄이는 아티팩트는 운송용으로 비교적 많이 생산되거든요. 더구나 그건 발렌티아 가문의 주력 생산품입니다. 차라리 말값이 더 비쌀 정도죠.”
“아, 그래……?”
전혀 통하지 않은 반격에 자꾸 고개만 숙어질 때.
“컹!”
월랑이 갑자기 이상한 의사를 전달해 왔다.
“아, 저 정령도 절대 내보이시면 안 됩니다. 라프탄 씨, 라미도 자제를 해야…….”
제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더할 때.
타이니는 월랑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있겠다고?”
“컹!”
왜?
물론 이제는 7단계 스피릿유저 수준에 올라섰으니, 나라 하나를 격하고 월랑을 소환해 두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거기다 지금 작전상 웨어비스트에서는 월랑을 대놓고 소환할 수도 없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월랑의 요구는 분명 의아한 것이었다.
“대체 왜?”
“컹!”
기분이 찜찜하다고? 그러니까 왜?
‘금발 인간 암컷, 씁. 그러니까 클로이 주변에 있고 싶다? 불길하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고?’
“컹!”
허어…….
월랑이 생전, 아니 정령이 된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반항.
더구나 요새 이 녀석의 변한 성향을 생각하면…….
“너, 지금 클로이랑 놀고 싶어서 수작 부리는 거지?”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크르르르.”
아니란다.
심증이 너무 확고한데.
“크르르르. 컹!”
절대 아니란다.
“으음…….”
잠시간 녀석을 째려봤지만, 눈도 피하지 않는 태도에 결국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뭐, 어차피 널 내놓고 다닐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 그렇게 하자. 대신 혹시나 급한 상황 되면 부른다? 정령 합신이나 반정령화가 필요하면 어쩔 수 없어. 알지?”
“컹!”
물론.
“컹. 컹.”
‘저 새끼…….’
말이 끝나자마자 신이 나서 황궁 방향으로 뛰어가는 녀석을 보니 심증은 더 굳어졌지만.
후.
‘그래,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까. 잘 놀아라.’
- 컹!
노는 거 아니라고? ……그래, 알았다.
정령 키워 봤자 다 헛고생인가.
얼마 전 누군가가 느꼈던 허전함을 잠깐이나마 체험한 타이니가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정령 합신? 반정령화? 설마 깡패 너, 스피릿유저?! 그,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나, 나한테도 좀 알려 줘 봐!”
갑자기 눈에 불을 켠 라프탄이 겁도 없이 그에게 엉겨붙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떻게 수련해야 할지 지금 감이 잘 안 오…….”
“깡패?”
그 수다스러운 말 중에서 매우 거슬리는 단어에 반응한 타이니의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고.
“……어?”
그제야 실수를 자각한 라프탄의 얼굴이 빠르게 창백해졌다.
까드득.
“오래 못 봤더니 그새 간이 부었구나, 라프탄.”
“아, 아니. 자, 잘못 들었을 거야. 잘못 들었을 겁니다요. 광휘, 광휘라고, 내가, 아니 제가 촌 출신이라 발음이 안 좋아서 깡이라고, 하, 하하.”
여태 살아온 인생이 인생인지라 온갖 욕을 다 들어 본 타이니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싫어하는 욕이 바로 그런 종류였다.
깡패, 건달, 양아치 등등.
태생상 그가 가장 혐오할 수밖에 없는 종자들.
그랬기에 기회만 나면 모조리 때려죽이고 자금 조달처로 써먹었던 싸구려 악당들을 지칭하는 단어.
마계 대전에 집중하느라 요 몇 년은 자중하고 있다지만, 그 악감정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그런데.
“나한테 깡패라고?”
순식간에 터져 나온 살기가 사방을 자욱하게 물들이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를 말리려던 제이가 ‘어마, 뜨거라’ 하는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물론 그전에 눈이 반쯤 뒤집힌 타이니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고.
“뭐?”
“아, 아닙니다. 죽이지만 마세요. 아, 장애도 좀 곤란…… 하, 하하하.”
제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슬쩍 그의 시야 바깥으로 사라지는 순간.
“죄송합니다! 이놈의 입이 죽을죄를……!”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한 라프탄이 자신의 입을 찰싹찰싹 치며 자학을 시작했다.
물론 통할 리는 없었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우드득.
주먹을 쥔 손의 뼈마디를 꺾는 타이니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오들오들 떨던 불쌍한 정령술사가 대항을 포기하고 넙죽 엎드린 시점부터, 발렌티아의 뒤뜰에서는 때아닌 비명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 예정보다 하루 뒤에야 웨어비스트로 향하는 ‘티아 상단’이 아세리안을 출발하게 되었다.
* * *
“그랬구나. 타이니가 다시 떠났구나.”
“컹!”
가볍게 짖으며 풍차처럼 꼬리를 돌리는 작은 강아지, 아니 늑대를 보는 클로이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런데 우리가 그 아이한테만 너무 큰 짐을 주는 건 아닐까?”
“컹!”
“괜찮다고? 그래, 네 주인은 강한 아이니까.”
이제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커 버렸지만, 여전히 타이니를 처음 보았을 때의 광경이 눈에 선했다.
너무나도 작고 작았던, 그래서 아이도 아니고 아기로만 느껴지던 모습도.
자신이 서슴없이 가문의 반지를 주었던 그 불쌍한 아이가, 불과 몇 달 뒤에 꽤 자란 어린이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순간도.
볼 때마다 무섭게 성장하는 몸과는 달리 지독하게 슬프게만 느껴지던, 그 깊은 한이 서린 듯한 눈동자는 거의 변하지 않았던 것도.
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아버지에게 그의 비밀을 듣고 나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지만.
“누나가 되어 준다고 해 놓고 자꾸 짐만 맡기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월?”
“컹!”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정령이 짖는 소리는 제게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 위에 타이니의 작고 작았던 어릴 적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였으니.
“그래, 누나도 지금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할게.”
클로이는 월랑을 보며 다짐했다.
철혈의 여제 같은 거창한 별명은 필요 없다.
그저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행복할 수 있도록.
황후로서, 딸로서, 그리고…….
‘누나로서.’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