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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235화 (235/500)

235화. 미래를 위한 논의

알현(Audience). 제국의 황제를 배알하는 형식 중 하나.

다른 청중이 있는 곳에서 황제를 만나는 일을 그리 부르기도 하지만, 신분이 높은 자가 대외비적인 회담을 요청하거나 친분이 있는 자가 사적으로 만나고자 할 경우엔 황제의 허가하에 배석자 없이 독대의 형식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그리고 발렌티아 공작은 그 두 가지에 모두 해당되는 만큼, 황실 기사들의 검문도 형식적일 뿐이었다.

다만.

“각하……?”

“얼굴은 왜……?”

기사들이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오늘 공작의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왼쪽 뺨이 상당히 부풀어 오른 상태.

일반인이었다면 누군가한테 세게 따귀라도 맞았으려니 생각했겠지만, 상대는 무려 발렌티아 공작이자 이 나라 유일의 오러유저로 알려진 초인, 검제였다.

알현을 앞둔 초인, 그것도 공작의 얼굴이 저렇게 된 상황이라면 사제의 치료도 먹히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오러로 인한 부상일 것이다.

답은 뻔했다.

“……요새 훈련에 매진하신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존경합니다, 각하.”

“초인이시면서도…….”

기사들이 선망의 눈길을 보내며 검제를 향해 고개를 숙일 때.

정작 그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고, 그 뒤에 따라오던 검은 머리 청년은 숨죽여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이 집무실의 문을 닫은 후에야 뒤를 돌아본 검제의 푸른 눈이 살기를 담아 이글거렸다.

“닥. 쳐.”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웃지 마.”

“제가요?”

“이빨 보이지 마라. 다 털어 버리기 전에.”

하지만 청년, 타이니는 검제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분노가 통쾌하기만 했다.

뭐,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 하니까.

‘크크크크크.’

이가 드러나지 않게 입을 악다문 채 몸을 비비 꼬며 내적 광소를 터트릴 뿐이었다.

자연히 그 광경을 보는 검제의 눈동자와 손이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하는데.

“어서 오십시오, 장인어른. 타이니 경도 오랜만일세.”

황제답지 않은, 존대를 담은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그에 검제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돌아서는데.

“장인어른, 얼굴은 왜……?”

황제의 놀란 목소리가 다시 그의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게다가.

“킥.”

뒤쪽에서 작게 튀어나온 웃음소리까지 신경을 거슬렀지만, 검제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설마 어른과의 따귀 내기에서 이겼다고 진짜로 때리는 X새끼가 있을 줄이야.

아니, 솔직히 진짜로 때릴 것 같은 놈이었기에 애써 피하려 한 것은 맞지만.

‘내가 저를 위해 해 준 게 얼만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꾹꾹 누르다 보니, 문득 다른 나라에 있는 악우, 그리드 녀석의 말이 생각났다.

- 네 녀석, 성격 더럽다는 소리 요새도 자주 듣지?

‘절대! 아니다! 이런 놈이 있는데, 나보고 성격이 더럽다니!’

눈을 지그시 감고 속으로 여신교의 경전을 외며 사랑과 자비, 용서에 대한 깨달음을 갈구하는데.

“장인어른, 공작?”

“아버지?”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다시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아. 아, 폐하. 죄송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얄미운 놈이 먼저 예를 취하고 있었고, 그 앞에서는 딸 클로이가 황제와 함께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클로이까지 이 자리에 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아, 황후도 타이니 경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자리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군요.”

“아닙니다. 저야 이렇게라도 황후 전…… 흠, 제 딸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면 좋지요.”

황제가 존대로 나온 마당에 굳이 딸에게까지 공식적인 예를 지키고 싶지 않아 편하게 말했는데, 다행히 황제는 그 말 또한 기껍게 받아들인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잠시 애틋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딸은.

“타이니, 월은?”

아니,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고 있던 딸은 어디선가 쪼르르 달려 나온 하얀 강아지를 안아 들고 볼을 비비기에 여념이 없었다.

“컹!”

“어디 갔었어, 우리 월?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니?”

“컹! 컹!”

풍차처럼 꼬리를 돌려 대는 작은 강아지와 딸의 훈훈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하…….’

제자라 생각한 놈한테는 따귀를 맞고, 딸은 아빠보다 개가 더 좋단다.

- 자식이고 제자고, 키워 봤자 다 헛수고다.

인생의 진리를 또 하나 깨달은 듯한 기분에 가슴 한구석이 휑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허탈한 마음과 상관없이, 황제의 집무실에서는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타이니 경, 정말 수고 많았네. 더구나 돌아오면서 고생도 했다던데.”

“아닙니다, 폐하.”

“장인어른께 들은 말이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자네에게 직접 듣고 싶네. 자네가 겪었다는 ‘이전의 세상’ 이야기를.”

“이미 들으셨다면, 더 해 드릴 말씀이 딱히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당사자에게 듣는 것이 더 실감이 나지 않겠나.”

“실감이요?”

“황궁의 재앙도 자네가 막았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상황이 맞아떨어졌으니 믿지 않는 것은 아니네만, 나는 그런 미래를 직접 겪은 자네에게 얘기를 듣고 당시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것이네. 아무래도 이 황궁 안에 있다 보면 위기감과는 멀어지기 마련이니까.”

불과 몇 년 전 재앙이 일어났던 황궁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 세부 사정을 아는 입장에선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결국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자신의 기억을 토해 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컹?”

황제보다는 클로이의 표정이 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힘들었고,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기였습니다. 절망적인 이야기를 퍼트리거나 불평을 내뱉는 자는 마족 숭배자로 몰려 처단당했고, 카룬이 멸망하면서 동대륙으로 가는 뱃길마저 모두 끊겨 버렸죠. 그런 상황에서 인류의 지배자들 모두가 멸망을 예견하면서도 끝까지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생의 우울한 나날들을 떠올린 타이니의 침울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인류의 최정예, 여기 계신 공작 전하와 저를 포함한 대륙 10대 기사 모두가 생명을 갈아 넣어서 겨우 마수왕 하나를 죽였습니다. 두 번째 강림이 예정된 시각을 불과 두 달 앞두고 말입니다.”

마침내 그의 기나긴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 자리에는 깊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정말로…… 내가 그때 없었단 말인가.”

한참 후에나 나온 황제의 목소리.

제왕의 교육을 받고 자란 이는 생각도 남다른 건지, 그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그 시기 본인의 존재 여부였다.

물론 그에 대한 타이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예. 말씀드렸듯 클로이 공녀께서 전 황태자비의 신분으로 발렌티아 가문의 힘을 등에 업고 임시 황제에 오르셔서, 박살이 난 제국을 간신히 수습하셨었습니다.”

“각지에서의 내전, 오크족의 침입, 웨어비스트와 연합의 영토 내 대치, 거기에 민중 봉기까지 일어난 제국을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 말에 깊게 한숨을 내쉰 황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옆에 앉아 있는 반려의 손을 잡았다.

“고생 많았겠소이다, 황후.”

“저, 저는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폐하.”

클로이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는데, 타이니가 한 번 더 말을 보탰다.

“항상 딱딱한 미소만을 띤 채 표정의 변화가 없으셨습니다. 철혈의 여제, 비운의 미망인, 인류 최후의 황제. 칭송하는 말은 많았지만,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누구도 행복을 말할 수 없는 시기긴 했지만요.”

그 말에 그녀를 그 누구보다 아끼는 두 남자의 눈에 다시금 안쓰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그런 시선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클로이는 애써 웃으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타이니 경, 아니, 타이니. 그때는 우리가 안 친했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애써 반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도 저보다는 월랑이랑 더 친하지 않으십…….”

“야!”

타이니의 너무 솔직한 답변은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는 결과만 낳았다.

다만 그 덕에 피식 웃은 황제와 검제의 표정은 조금이나마 밝아졌으니.

“그래, 그랬군. 확실히 자네가 느꼈던 감정이 전해져. 자네에게 직접 듣길 잘한 것 같아.”

홀가분한 미소와 함께 황제가 짝! 하고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시 정리해 보지. 어쨌거나 자네의 전생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아졌으니……. 다만 웨어비스트의 변수가 문제인데, 그건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내가 빠트렸거나 아직 모르는 게 있나?”

“그게…….”

그 순간 아차 싶어서, 타이니는 슬쩍 검제의 눈치를 보았다.

전생에서의 데스 나이트 존재 여부와 더불어 강림의 시간이 빨라질 수도 있다는 소식을 깜빡하고 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타이니 대신 나선 검제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타이니 경의 전생에는 놈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음?”

“얼마 전 제가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 경에게 자료 조사를 부탁한 것이 그것과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원래 초월급 마족은 흑마법으로도 이 세상에 소환이 안 되는 것이 법칙이니까요.”

“제가 그 결과를 보고받았던가요?”

“아직 확실치 않아서 제가 보류해 달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엘프족과 오크족의 고서에서도 동일한 흔적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티네스 경이 곧 따로 보고를 올릴 겁니다.”

“……결론부터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마계 대전이, 강림의 시간이 타이니의 전생보다 훨씬 빨라질 수도 있다는 안 좋은 내용입니다.”

오? 역시!

굳이 자신이 말해 주지 않아도 이미 모든 걸 파악한 듯한 검제의 모습에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반면 황제는 한껏 인상을 구기더니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부 정리부터 확실히 해야겠군.”

“내부 정리요?”

“‘인류’의 내부 정리 말입니다.”

그 말에 검제와 타이니의 시선이 맞부딪쳤고, 이내 두 사람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수인족을 차별하고 오크족을 경멸하는 아스란 제국 황제의 입에서 ‘인류’라는 말이 나왔다. 전생과 달리 온전한 제국이 그들의 편에 서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다시금 마음이 든든해졌다.

자연스레.

“일단 웨어비스트의 혼란을 처리하려면, 공식적으로는 제국 소속이 아닌 타이니 경이 나서는 게 제일 좋겠지요.”

검제의 말을 시작으로.

“타이니 경이 그리 선언하긴 했지만, 지금도 여기 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초월무구를 선사한 것도 있고, 장인어른과의 친분도 많이 알려졌으니 웨어비스트에서는 믿지 않을 겁니다.”

황제가 답하면서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되려는데.

“저기……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음?”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습니다만, 체베르라는 놈이 어떻게 나타난 건지 짐작 가는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타이니의 그 말이 다시금 주변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무슨 얘기지, 타이니 경?”

“그게, 제가 제 정령, 월랑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전생에는 몰랐던 일이고요. 필레스라는 작은 영지의 뒷골목 무리 중에 울프라는 놈이 있었는데…….”

타이니의 말이 이어질수록 검제와 황제의 표정은 심각하게 변해 갔고.

마침내.

“만들어진 라이칸스로프일 것이다?”

황제가 그리 결론을 내리자.

“말도 안 돼요! 어떻게 흑마법사가 감히, 여신의 권역을 침범해요!!?”

황후이기 이전에 클레릭이기도 한 클로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신의 권능은 완전하지 않아, 누나. 그렇게 따지면 내가 회귀한 것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이 자리에서 뱉을 수는 없었기에, 타이니는 담담히 고개만 끄덕였다.

“……네, 아마도.”

“흐음. 그것만 증명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검제가 말끝을 흐리자, 황제가 바로 다른 말을 꺼내 들었다.

“장인어른. 일단 문나이트, 그 수인족의 초인을 한번 볼 수 있겠습니까?”

“예? 아, 예. 당연히 그래야 하지요. 하지만 당장은 타이니 경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틀 내내 기절해 있는 바람에…….”

“수인족 초인이 이틀 내내 기절이요?”

그건 죽은 거 아닙니까?

그 뒷말이 보이는 듯한 황제의 표정에 검제가 다시 타이니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타이니는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 좋아 보인다고 생각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흘겨보던 검제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문나이트는 웨어비스트의 일이라면 당연히 눈에 불을 켜고 나설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말룸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고 인류 연합이라는 퍼즐을 맞추기 위한 제국 수뇌부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같은 시각.

“이곳이 그 제국의 중심이라……?”

아세리안의 아득한 상공.

붉은 머리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퇴폐적인 인상의 여인이 구름 위에서 지상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빙긋 미소 짓고 있었다.

‘가장 약한 인간이 가장 강성한 나라를 세웠다라…… 역시 중간계는 신기하단 말이지.’

한 손에 특이한 보랏빛 홀이 달린 지팡이를 든 여자는, 그 높은 곳에서도 지상이 잘 보이는 듯 한참 동안 발아래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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