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살힌? 사림!
발렌티아에서 온다는 한 사람.
에스티나에게 그가 도착할 때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타이니는 엘븐하임의 녹색 담장을 열고 동쪽으로 걸어 나왔다.
“어, 사람이다!?”
“엘븐하임에서 사람이!? 오크도 있어.”
“저게 무슨 일이야. 대체!?”
“검은 머리……. 어,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엘븐하임의 동쪽 담벼락 앞에는 수많은 상인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들이 자신을 보자마자 수군거리기 시작하는 것은 이제는 익숙하게까지 느껴졌다.
다만 그 무리에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ущцоыелыдфвдул!”
“대전사님이다!”
“ущцоыелыдфКз вгвкрлввьа!”
특이하게도 오크족 상인들도 상당수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저릭이 자신을 향해 무릎 꿇는 오크족 상인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눈인사를 건넬 때, 광장의 소란은 점점 더 커져 가고 있었다.
“세계수의 수호자다!”
“오크의 대전사도 있어!”
“그럼 저 검은 머리 남자는…….”
역시나 시끄러워지는가.
점차 웅성거림이 커져 가는 광장의 무리를 보며 타이니가 혀를 차자, 말렸는데도 굳이 마중을 나온 에스티나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기, 온다.”
“응!?”
그녀의 말에 시선을 돌리자, 엘븐하임을 향해 달려오는 은빛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파바바바박.
말 그대로 은빛 바람이 나무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듯한 모습.
하지만 그 사이사이 번뜩이는 번갯불이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는 거체를 보는 순간.
“어……!”
에스티나가 왜 굳이 그의 정체를 숨겼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타이니는 일전에 저릭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림!!”
문나이트, 실버 팽.
그리고 그의 본명, 은빛 바람이라는 뜻을 가진 ‘먼갈럭 살힌(вьыйдс йлал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반가운 마음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그 발음이 어려워서 편한 대로 부를 때면 살힌과 사림은 전혀 다른 말이라고 타박을 들었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런데.
“음!?”
그 목소리의 여파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광장에 나타난 늑대인간.
“수인족?”
“잠깐, 저 할버드는…….”
“은빛의 늑대인간에, 벼락 속성. 설마…….”
“문나이트다!”
광장이 더욱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그 앞에 멈춰선 거대한 늑대인간은 자신을 부른 타이니와 그 뒤의 에스티나, 그리고 저릭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의문 섞인 시선에 에스티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이 사람이 바로 광휘의 기사, 타이니예요. 많이 말씀드렸었죠, 문나이트?”
실버 팽은 그 말을 듣고서야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 그……. 말씀은 많이 들었소이다, 타이니 경. 문나이트라는 과분한 이명으로 불리는 실버 팽이요.”
정중한 태도와는 다르게 찌푸려진 얼굴은 오히려 약간의 불쾌함을 담고 있었고, 그 이유는 그의 입을 통해서 바로 나왔다.
“참고로 우리 수인족의 본명을 친하지 않은 이가 부르는 건 결례입니다. 아무리 알려진 이름이라 해도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실버 팽이라 불러 주십시오.”
마치 뒤에 있는 두 사람을 봐서 참는다는 듯한 말.
현생에서는 처음 만난 옛 동료, 아니 친구의 경계하는 듯한 표정에 타이니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대신해서 저릭이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발렌티아 기사단 대신 자네만 온 건가?”
“그렇습니다, 저릭 공. 그런데 상황은?”
“대미궁에서 튀어나온 저 친구가 정리했다는군. 그러니 그냥 돌아가세.”
“아…….”
그 말이 당혹스러운 듯, 혹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저릭과 타이니를 번갈아 보는 실버 팽.
그 와중에 전생에는 그리 친했던 동료들끼리 서로 말을 높이는 것도 모자라 한 명은 극공대까지 하는 꼴이 타이니에게는 참기 힘들 정도로 어색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타이니는 실버 팽과 쉽게 친해지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실례를 한 모양이군요. 그럼 실례를 만회할 겸, 대련이나 하실까요?”
내가 실례를 저질렀으니 싸우자.
앞뒤가 맞지 않는 개소리에 주변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타이니?!”
“지금 뜬금없이 무슨!?”
“제가 말룸을 정리했다는 게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시길래요. 여기서 한번 겨뤄 보자는 말입니다, 문나이트.”
주변의 모든 동료들이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는데, 오직 한 명의 늑대인간만은 오히려 푸른 눈을 빛내며 송곳니가 드러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 그래도 궁금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냈다는 광휘의 기사, 그 이름을 제가 직접 시험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얼마든지.”
“그건 반말입니다만? 제가 공용어에 익숙지 않다고 착각이라도 하시는……?”
“꼬우면 너도 반말해.”
그 말에 실버 팽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투쟁심을 율법으로 다스리는 오크와 광기를 예의로 다스리는 수인족. 근본이 미묘하게 다른 두 종족이지만 그들과 친해지는 방법은 비슷했으니.
“어차피 지금부터 치고받을 건데, 무슨 존대야. 안 그래?”
“그거, 나쁘지 않군요. 아니, 나쁘지 않아.”
예의를 벗어던지면서 광기의 속박도 살짝 풀어 버린 수인족의 송곳니가 더욱 날카롭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 *
결국.
동료들을 포함한 광장의 모두가 지켜보는 와중에 대련을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문나이트에 광휘의 기사라고?”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나도 그렇게 들었어. 몇 년 전에 사라진 광휘의 기사가 왜 엘븐하임에서…….”
“어찌 됐든 대박이다!”
투쟁심이 넘쳐나는 오크가 아니더라도, 소문에 민감한 상인들이라면 두 사람의 대련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유명한 이름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상황은 자연스럽게 내기 판으로 이어졌다.
“자. 누가 이길지 걸어 봅시다! 난 일단 문나이트!”
“나도, 나도 실버 팽!”
“어허 이 사람들. 이러면 게임이 안 되지……!”
물론 내기가 한쪽으로 기우는 듯한 그 분위기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럴 만하지.’
납득할 수는 있었다.
애초에 문나이트는 증명된 초인인 데 반해, 광휘의 기사라는 이름은 그간의 업적으로만 평가받은 이름일 뿐.
거기다 타이니는 근 2년간 활동이 없었으니, 그 위명조차도 조금씩 빛이 바래 가고 있었던 것이다.
명성에 집착했던 전생 같았으면 제대로 실력을 보여 주겠다고 투쟁심을 끌어 올렸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어차피 이 모든 건 과정일 뿐이다.’
보다 멀리 보는 시야를 얻은 덕에, 그는 어쩌면 불쾌할 수 있는 내기 판조차 웃으며 관망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웃음이 한창 투지를 불태우던 실버 팽의 눈에는 조금 거슬린 모양이었다.
“여유가 넘치는데?”
“자신이 있으니까.”
“……그 자신감, 과연 어디까지 갈지 보지. 크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짐승의 소리. 그것은 실버 팽이 투쟁심을 극도로 끌어올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서 다시금 전생을 떠올린 타이니의 웃음은 더욱 진해지기만 했다.
‘비슷했지. 너랑 나, 그리고 저릭은.’
하나같이 상식을 초월하는 육체 능력을 지닌 데다가 그만큼 투쟁심도 강했던 셋.
말세가 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숙적이 되었을지도 몰랐을 그들은, 뭉쳐 다니다 보니 오히려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었다.
물론 건수가 잡힐 때마다 마나를 배제한 박투를 벌이긴 했지만 말이다.
- 대체 매일 뭐 하는 거예요!? 당신들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인간! 그것도 종족을 대표한다는 초인들이 왜!
저기 있는 에스티나의 잔소리가 항상 따라다녔던 그룹.
그런 기억조차 이제는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말세였기에 어두웠고, 어두운 만큼 더 소중했던 작은 추억들.
그 추억들을 다시 만들어 가기 위해서라도, 현생의 관계를 제대로 시작하는 게 맞았다.
“실망스럽진 않을 거야.”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실버 팽은 전생에도 결국 8단계의 벽을 넘지 못했으니, 지금 타이니가 그에게 질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다만 둘 다 무기는 내려놔요. 초월무구를 휘두르면서 대련한다는 말은 안 하겠죠?”
그것이 설령 서로가 무기를 쓰지 않는 대련이라고 해도 말이다.
쿵.
서로의 초월무구, 녹턴과 라이트닝 로드 그리고 아니무스와 문 아머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타이니가 실버 팽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첫수는 양보하지. 와라.”
우우웅.
타이니식 전투 보조 기술. 오러 신경망 열화식(Minor Version), 마나 신경망.
그 말과 함께 주변으로 투명하게 뻗어 나가는 노을빛 마나.
“재미있는 수작을 부리는군. 하지만…….”
그것을 보는 실버 팽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지다가.
“고작 그것 가지고 될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펑 소리와 함께 그의 거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쾅!
어느새 타이니의 등 뒤에 나타난 실버 팽과 그의 주먹이 서로 교차하더니, 두 사람이 동시에 좌우로 튕겨 나갔다.
“제법!”
“너 역시!”
파지직.
짧은 대화가 오간 직후, 은빛 바람이 샛노란 전격을 두른 채 타이니의 주변을 불규칙하게 맴돌기 시작했고.
쾅!
뻐억.
퍼버벅.
꽈아앙!
순식간에 수많은 잔상이 허공에 번지면서 연이어 충돌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퍼져 나가는 노을빛과 노란빛의 파장들이 돌풍을 일으키며 주변에서 대련을 지켜보는 이들을 슬금슬금 밀어 내기 시작하는데.
“오러다!”
“광휘의 기사도……!”
“이런……!”
“어떻게 돼 가는 거야!”
“보이지도 않……!”
그 와중에도 결투를 지켜보겠다며 버티던 이들은 눈앞에 펼쳐진 환상과도 같은 광경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네다섯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실버 팽의 잔상은 각기 주먹과 발, 팔꿈치, 손톱, 하다못해 머리까지, 모든 신체 부위를 타격에 활용해 가며 목표인 타이니의 전신을 압박하고 있었고.
제자리에서 방향만 바꿔 가며 그 공격을 모조리 받아 내는 타이니 역시 움직임이 너무 빨라 여러 명이 한곳에 겹쳐서 서 있는 듯한 착시 현상을 만들어 냈다.
거기다 그 움직임을 살필 수 있는 동체 시력을 갖춘 이들은 한 가지 특이한 점도 찾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덩치 차이가 제법 있는데도, 움직이고 방어하는 투법의 형식이 너무나도 유사하게 보인다는 것.
“……너무 비슷한데?”
“타이니가 배웠겠지.”
“수인족 기술을?”
“타이니니까.”
“아, 납득했다.”
저릭과 에스티나가 평가한 것처럼, 현 대륙 7대 기사 중에서도 가장 빠르다고 평가되는 실버 팽의 공격을 타이니는 거의 똑같은 투법으로 맞받아치고 있었다.
쾅!
이마에는 이마로.
쩡!
날카로운 손톱에는 마나를 두른 손날로.
파바박.
근거리에서 쏟아지는 팔꿈치와 무릎의 공세는 역시나 같은 부위로 연달아 후려치면서 말이다.
- 무슨……!
가속화되는 공방 속에서, 실버 팽의 놀란 목소리를 들은 타이니는 내심 살짝 웃었다.
과연 빠르긴 빨랐다. 마나 신경망을 통한 즉시 반응으로 응대하고 있음에도, 이 상태로는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고작.
전생에도, 현생에도 그 속도만큼은 최고였던 친구였다.
만약 실버 팽이 8단계의 벽을 넘어 오러익시더가 되었다면, 사신이 목숨을 걸어 가며 벤투스를 암살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새삼 들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그때보다 미숙해.’
괜히 그가 인간의 몸으로 사용하긴 비효율적인 늑대 투법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현생에 월랑과 영혼의 계약을 맺으며 늑대에 대해 훨씬 잘 이해하게 되기는 했지만, 엄연히 인간인 그는 늑대 투법보다는 웨폰 마스터의 박투법을 쓰는 것이 더 익숙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이 길을 택한 것은.
‘이번에는 내가 가르쳐 줄게, 사림.’
전생에 비해 아직 부족한 친구의 수법을 가다듬어 주기 위함이자, 이후에 있을 설득 작업을 위한 준비였다.
그리고 그 생각이 먹혀들어 가는지.
콰아앙!
한 번의 공세 끝에 뒤로 물러선 실버 팽이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
“대체 어떻게, 늑대 투법을 나보다 더……?”
흔들리는 눈동자. 당혹스러운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
그 모습을 보며, 타이니는 마나를 끌어 올림과 동시에 한 발을 앞으로 크게 내디뎠다.
쿵.
“안 올 거면 내가 간다?”
우우웅.
우드드득.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타이니의 몸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더니, 새하얀 머리와 눈을 가진 거한으로 변신했다.
“헛!?”
“타이니!?”
실버 팽은 물론 주변의 다른 동료들마저 놀란 목소리를 토해 낼 때.
“스으읍. 자, 버텨 봐.”
타이니는 길어진 송곳니가 드러나는 살벌한 미소와 함께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