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녹턴의 유래?
엘븐하임의 서쪽 담장에서 시작된 환영 행렬은, 일행이 전부 각자 배정받은 손님방으로 들어간 뒤에나 흩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립게까지 느껴지는 나뭇등걸 집과 침대, 깨끗한 물과 샤워, 따뜻한 차와 음식을 즐기기…… 전에.
타이니와 루나는 작은 드워프에게 발목이 잡혀 있었다.
“여기, 그리고 초월무구, 완성되면, 타이니 아니라, 내 거.”
“무, 물론이지!”
루나가 꺼낸, 악마급 몬스터 ‘천 개의 눈’의 핵.
본래대로라면 그 등장만으로도 주변의 엘프들이 소스라치게 놀랐겠지만, 대미궁을 나서며 미리 그 안의 마기를 마나로 정제해 놓은 참이었다.
자연히.
“이게, 악마급 몬스터의 핵이라고? 천사급 영물, 신수의 핵이 아니라?”
그란돌은 신화에나 나오는 신수까지 언급하며 놀라움을 표했다.
그리고 그 반응을 보다 보니, 타이니로선 자연히 의문이 생겼다.
“……넌 마물의 핵을 어쩔 생각이었는데? 그걸 그대로 초월무구로 만들 생각이었어?”
“아니, 세계수의 가지로 마기를 정화하고 다시 마나를 채워 넣으려고 했지. 핵이라는 그릇 자체가 중요한 거니까.”
“호…….”
“그 작업만 한 20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이러면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겠어.”
20년……?
가볍게 언급된 것치고는 어처구니없는 수치에 타이니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는데, 그란돌의 동그란 눈이 호기심을 가득 담고 그와 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마물의 핵이라며?”
“……다 방법이 있어.”
그란돌에게 굳이 에너지의 본질 치환에 관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이 역시 사제들이 알게 된다면 발광을 할 만한 이야기였으니까.
다행히도, 그렇게 얼버무리자 그란돌은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뭐, 좋아! 이러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완성되겠어.”
“그럼, 내 거.”
“근데 대가는 줘야 한다? 핵 가격을 빼더라도 비싼 재료가 많이 들어가거든. 인건비 빼고 재료비 정도만 받을 테니까. 어떻게 좀…….”
“물론. 나, 그 정도로, 경우 없지 않아.”
“좋아! 아, 그리고 또…….”
순간 에헤헤 하며 괴상하게 웃는 그란돌의 모습에 루나가 흠칫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서는데.
“그, 테르티우스에, 그 무구 만든 게 나라는 것도 확실히 소문내 줘야 해? 알겠지? 그게 내가 인건비 안 받는 조건이야.”
그 말을 하는 그란돌의 시선은 대화 상대인 루나보다 타이니를 향해 있었고, 타이니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료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초월무구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는 그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도 기대가 되기도 했으니까.
“알았다.”
그에 비로소 안심이 되었는지, 그란돌이 주먹을 불끈 쥐며 돌아섰다.
“이야호! 드디어!!”
그리고 이내 미친 듯한 환호성을 지르며 뒤뚱뒤뚱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싸! 초월무구!”
역시나 비슷한 모습으로 주먹을 불끈 쥔 루나도 그제야 배정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그 상황을 지켜본 끝에 이제야 비로소 쉬겠구나 싶어, 타이니 역시 후련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러다.
쿵.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녹턴을 잠시 내려놓고 보니, 번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란돌!”
“응?!”
아이처럼 활기차게 뛰어가던 그란돌이 그 말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며 뒤돌아섰다.
“줘, 줬다 뺏는 건 진짜 나쁜 거다! 알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졌지만,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 예전에 스탬프 만들 때, 참고한 자료 같은 게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망치 좀 봐 봐.”
타이니가 일부러 억제하고 있던 녹턴의 기운을 풀어 버리자.
우우웅.
자연스러운 진동과 함께 녹턴에서 살이 떨리는 마나가 올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응?”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다시 후다닥 뛰어오는 그란돌.
“이, 이게, 이것도 초월무구야?”
“그래.”
그가 홀린 듯 녹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이건 정말, 굉장해……. 어떻게…….”
몽롱한 눈빛을 보아하니 그대로 두면 밤이라도 샐 기세라, 타이니는 헛기침을 하며 바로 그란돌의 시선을 끌었다.
“크기는 좀 다르지만, 스탬프랑 닮지 않았어?”
“응?”
“기운 말고 이 모양을 봐 봐. 네가 만든 스탬프가 그대로 커진 것 같지 않아?”
“어……. 어!? 그러네.”
그걸 이제 알았냐.
또 한숨이 나왔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이게 우연은 아닐 거 아냐. 내가 이 워해머의 유래를 알고 싶어서 그러는데, 설명해 줄 수 있어?”
“어, 음. 스탬프라……. 근데 내가 너무 어릴 때 만든 거라…….”
“어릴 때?”
그 말에 그란돌의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음. 한 70년 전쯤이었나. 그게, 테르티우스에서 우리 부자가 도망치듯 쫓겨나고 발렌티아 영지에 간신히 정착했을 때였어. 어린 시절에 왕궁에서 봤던 자료를 떠올리며 만들었었지. 그땐 바로 초월무구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아버지를 다시 왕국에 모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대로 넋두리를 하게 놔두면 곧 울 것 같은 기세라, 타이니는 황급히 말을 끊었다.
“그래서 그 자료가 뭔데? 아니, 그래서 뭘 보고 만든 거야? 그게 이 망치 아니야?”
“……이젠 잘 기억이 안 나.”
“뭐?”
“막 성년이 된 해에 도망치듯 나온 거였단 말이다. 그리고 70년이 더 흘렀다고! 기억이 나겠어!?”
“그래도 이렇게 똑같이 만들 정도면 인상이 깊었을 거 아냐.”
“그랬겠지. 왕궁 대장간에서 본 자료집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기억이 안 나.”
“하…….”
뭐라 다그치고 싶었지만, 70년이라는 장생족 특유의 엄두가 안 나는 세월 단위에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일단 자신만 해도 고작 몇 년 전 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까.
타이니가 또다시 한숨을 쉬는 걸 본 그란돌이 이내 옷자락을 쥐고 인상을 쓰며 엉덩이를 반쯤 뒤로 뺐다.
“기억 안 나면, 핵 뺏을 거냐?”
“그러겠냐…….”
위협적이기는커녕 우습기만 한 모습이었기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지!?”
“그래.”
“야호! 그럼 간다! 하프 엘프 아가씨한테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해 줘!”
다시금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사라지는 그란돌의 뒷모습을 보며, 타이니는 작은 한숨과 함께 생각을 정리했다.
‘테르티우스에 들러 봐야겠군.’
왕궁 대장간이면 드워프들의 비처겠지만, 하이넨을 설득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실버 팽도 만나 봐야 하는데. 하이넨도, 아르곤도…….’
옛 동료들도 최소한 전생 이상의 전투력을 가지게 만들어야 하는데, 강림의 시간이 빨라진다면 더욱 서둘러야 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지만, 당장은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욱신.
“크…….”
말룸의 추종자들을 상대하며 얻은 내상이 여전히 큰 차도를 보이지 않았으니, 무리하다가 자신의 전력을 깎아 먹기라도 하면 그건 정말 최악의 수다.
‘일단은 좀 쉬자.’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여태 참아 왔던 게 한꺼번에 터진 것처럼 지독한 피로감이 전신을 덮쳐 왔다.
“후으으.”
끼이익.
다행히도 엘프들의 거처는 언제나처럼 아늑했고, 특히 물의 소서러들이 만들어 낸 시스템, 샤워실은 예전에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만큼 지금도 너무나도 환상적인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쉴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며칠은 푹 쉴 거다.”
자신에게 다짐처럼 하는 말과 함께 피와 때에 찌든 옷가지를 벗어 던지는 타이니.
그리고 그 기대치에 걸맞게, 1년 반이 훌쩍 넘는 시간 만에 피부에 닿는 바깥세상의 물은 넘치도록 시원했고, 침대 또한 안락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이게 진짜 사는 거지. 흐…….”
그렇게 달콤한 휴식의 시간을 가진 지 사흘째.
예상치 못한 태클이 들어왔다.
“한동안 엘븐하임에 있어야 한다고?”
“어…….”
“당연한 말이잖아. 초월무구를 만드는데, 주인 각인은 기본 과정이니까.”
떨떠름한 루나의 대답에 옆에 있던 그란돌이 보충했다.
“억지로 조건을 맞추는 것보다, 애초에 주인의 마나를 불어 넣어 가며 제작하면 자연적으로 그 주인에게 조건이 맞춰진다고. 그게 최상이야!”
그란돌은 열변을 토하며 루나가 엘븐하임에 남아야 할 이유를 역설했고, 동료의 역량 강화라는 대명제를 지향하는 타이니로선 차마 그 논리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일 년, 아니 반년이면 돼. 그 정도면 잠깐이지. 무려 초월무구를 얻는 건데!”
일 년에서 반년이 잠깐이라니. 새삼 장생족의 시간관념에 위화감이 들었지만, 그란돌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 정말 만들 수만 있다면.
“……진짜 성공 확률이 높은 거냐?”
“당연하지! 반드시 만들 수 있어.”
“나도, 힘낼게. 반년만, 기다려 줘. 누나 없다고, 쓸쓸해하지 말고.”
“안 쓸쓸하거든!?”
타이니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랬구나.”
오히려 루나가 급격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 말은, 그, 쓸쓸하지는 않지만, 보고는 싶을 거란 말이었어. 진짜야!”
“진짜?”
“진짜!”
이건 무슨 애도 아니고.
간신히 상황을 수습한 타이니는 엘븐하임에 마련된 그란돌의 공방 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둥근 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지만 며칠 전에 비해서도 확연히 작아진 핵은 그럼에도 더욱 진한 마나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초기 결과물을 보자 조금 더 믿음이 가는 듯했다.
“믿는다, 그란돌.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내 운명이다. 반드시 성공할 거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고개 떳떳이 들고 사실 수 있도록 다시 왕국에 모실 거다.”
막연히 성공한다는 말보다, 부언한 뒷말에 더 신뢰가 갔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타이니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고민할 때, 에스티나가 찾아왔다.
“검제에게 답이 왔어. 상황도 전했고. 너는 일단 그를 만나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어차피 지금은 웨어비스트 쪽 문제가 관건이니까. 제국에 가서 힘을 실어 줘.”
사흘 동안 매일같이 찾아와 사소한 담소를 나누고 함께 산책을 하던 에스티나의 표정이,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별로 좋지 않았다.
평화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는 또다시 헤어져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그 표정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래야지.”
아쉬운 것은 타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 년 이상 이어진 개고생 끝에 얻은 안락함과 편안함은 쉽게 떨치기 어려운 마약과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만큼은 두 사람 모두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나와 저릭은 함께 못 가. 알지? 말룸이 정말 사라진 것인지 확인도 해야 하고…….”
“알아. 너희 신분으로 제국에 들어서는 것은 부담스럽겠지. 아직 완전히 인간을 믿지는 못할 테니까. 그렇지?”
“넌 믿어.”
달리 말하면 아직 제국은 못 믿는다는 뜻.
엘프와 오크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타이니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에 에스티나가 픽 웃으며 예상치 못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널 검제에게 데리고 갈 사람도 이제 곧 엘븐하임에 도착한다고.”
“연락을 언제 했길래 벌써 와? 아니 그전에, 뭘 굳이……?”
내가 길치도 아닌데?
“뭐, 정확히 말하면 말룸 추적대 중 한 사람이었지. 이리로 오고 있을 테니 챙겨서 함께 보내라고 한 거야, 검제가.”
한 사람?
그 모호한 설명에 괜히 더 궁금해졌지만, 에스티나는 미묘한 웃음만 지을 뿐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타이니는 이틀 뒤에나 그 이유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