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전투의 끝
“까륵, 므……!?”
카니발이 그제야 갑자기 나타난 존재감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사이 그의 두개골을 관통한 검은 오러는 그대로 다시 심장을, 아니 심장이 있었던 부분을 찌른 뒤 전신을 난도질해 왔다.
퓨수수슉.
달그락.
물론 그래 봐야 리치인 그의 뼈다귀가 부서질 뿐이었지만, 그 단검에 담긴 힘은 엄연한 오러.
아무리 그의 ‘핵’이 다른 곳에 있다곤 하나 제법 타격을 받은 것은 틀림없었고, 그것만으로도 허공에 형성되던 마법진을 분쇄하기에는 충분했다.
- 감히!
성대가 없는 몸으로 억지로나마 인간의 기분을 내기 위해 마법으로 짜내던 목소리 대신, 진심으로 분노가 섞인 정신파가 습격자를 향해 쏘아지고.
“죽어!”
“주, 주 죽어!”
“죽. 어!”
그 의지를 따라 그림자에서 솟구친 데스 나이트들 역시 적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대검과 장창, 할버드가 짙은 암흑 오러를 두른 채 습격자가 있던 공간을 난도질하는데, 어느새 사라진 습격자는 카니발의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파지지지지직.
“큭!”
일순간 전개된 방어막, 검은 전격이 습격자의 오러를 피해 그 몸을 옭아맸다.
자연스레 데스 나이트들의 무기가 습격자를 난도질하려는데, 카니발의 손짓이 그들을 멈춰 세웠다.
- 그래, 그놈 옆에 있던 여자구나! 푸하하하. 잘됐다!
극심한 분노가 일순간 절반 정도는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습격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타깃의 옆에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던 여자.
존재감이 흐릿해서 잊고 있었는데, 이런 실력자였다니.
- 오러유저, 거기다 하프 엘프라? 나이가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어째서 들어 본 적이 없을까?
검은 로브의 후드가 자연스레 젖혀지고 새하얀 백골이 드러났다.
구멍이 뚫렸던 두개골은 차츰 균열이 메꾸어지고 있었다.
죽음의 오러가 그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자, 습격자 루나의 표정은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아니었…….”
- 크크크. 이 몸은 인간으로 태어나 마계의 귀족이 된 승리자다. 너는 저놈과 무슨 관……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지. 어찌 됐건 광휘의 기사가 동료를 버리진 않을 테니 미끼로 적당하다.
푸른 귀화가 타오르는 두 눈이 아직도 폭음이 한창인 전장으로 돌아가는데, 그와는 별개로 루나를 옥죄며 그녀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 마기는 점점 더 강력해지기만 했다.
심지어 그것은 특별한 마법도 아니었다.
“끄으으으…….”
- 네 죄의 대가다, 하프 엘프.
장로들까지 희생시킨 대마법의 파편이, 그 마법을 망친 원흉에게 고스란히 주입되고 있는 것이다.
중간계의 생명체에게는 독과 같은 마기가 막대한 물량으로.
시간상 오러유저에게도 통할 만한 저주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는 판단의 결과였다.
- 오러유저니 쉽게 죽지는 않겠지. 그렇게 서서히 죽어 가라. 그리고 놈의 약점이 되어라. 크흐흐흐.
카니발의 시선이 여전히 전장에 머무는 가운데.
그의 손짓에 따라 떠오른 루나의 몸이 마치 방패처럼 그의 전면을 막아섰다.
동시에 그 뒤와 좌우로 늘어서는 세 기의 데스 나이트.
확실한 인질과 데스 나이트 3기의 존재는 카니발의 마음속 혹시나 하던 염려마저 확실하게 지워 냈다.
물론.
“카니발 님!”
“인형이 다 소모되어 갑니다!”
“대책을!”
전장의 가운데서 서서히 솟구치는 노을빛 기운을 바라보던 말룸의 정예들 사이에선 공포가 커져만 가고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 내게 오라. 와서 내 힘이 되어라!
“예?”
“아, 아니. 설마…….”
“아, 안 돼!”
“카니발 님!”
카니발의 정신파와 함께 거미줄처럼 퍼진 마기가 순식간에 말룸의 정예들에게로 이어졌고, 이내 몽롱하게 눈이 풀린 부하들이 하나둘 그의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지지직.
우드드득.
“끄, 끄으윽…….”
카니발의 발밑에서 전개되어 대지를 붉게 물들인 마기 안에서, 그들의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검붉은 마력이 된 그들의 잔해는 곧 카니발에게 모조리 흡수되었다.
- 이렇게 전부 소모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든 확실한 게 좋겠지.
이윽고 두개골에 남아 있던 미세한 균열마저 치유한 카니발이 이전보다 더욱 막강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할 때.
그 폭심지에 자욱하던 먼지가 가라앉고, 지름이 4, 5백 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난 정경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중심에 꼿꼿이 서 있는 거대한 망치 자루.
……응?
- 놈이……?
타오르는 푸른 귀화가 의아함에 잠시 흔들리는 순간.
카니발의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온 ‘반투명한 손’이 그의 발목뼈를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노을빛 오러가 벼락처럼 치솟아 오르며 카니발의 몸을 찢어발겼고.
- 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퍼지는 순간 그의 그림자에서 검은 머리 남자가 튀어나왔다.
이내 남자의 몸이 빠르게 부풀더니, 순식간에 머리까지 새하얗게 변했다.
그 광경에 데스 나이트들이 한 박자 늦게나마 반응하려 했지만, 그 순간 그들을 향해 검고 작은 뼈 칼들이 무수히 몰아치기 시작했다.
“너희는, 나랑, 놀아.”
거의 죽어 가는 듯했던 인질, 루나의 손에서 쏟아진 뼈 칼들.
루나식 모르스 비전, 죽음의 비.
그 모든 칼날에는 강렬한 오러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마력에 의해 죽어 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보충하기라도 한 것처럼.
“죽, 죽어.”
“죽어라.”
“죽여!”
그 물량 공세에 데스 나이트들이 주춤하던 찰나.
머리를 새하얗게 물들인 거한, 타이니가 손에 쥔 인간, 아니 해골 망치를 사방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야.”
쾅!
“쓰레기!”
꽈앙!
“뽑아 놓은 다리를!”
콰아아아앙!
“잘도 붙였네!”
우드드득.
뻐어어어어엉!
몇 년 전 신화 속 괴수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흑마법사를 처리했던 그때처럼 놈의 발목 하나를 손에 든 타이니가, 완전히 분쇄되어 날아가는 말룸의 수장을 바라보며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루나가 몰아붙이고 있는 세 데스 나이트들을 향해 돌아서려는데.
“그놈, 이상해. 안 죽어!”
루나의 한마디가 그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이해할 순 없었지만, 자신이 가루로 만들어 버린 흑마법사의 마기가 완전히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느낀 것이다.
“씁!”
그 순간 타이니는 본능적으로 방향을 틀어 전장 한가운데에 남겨 놓은 녹턴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안 죽는 괴물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설령 있다 한들.
‘녹턴으로 가루를 만들어도 안 죽나 보자.’
없앨 자신이 있었으니까.
다만 문제라면, 보이는 것처럼 그의 상태가 좋진 않다는 것이었다.
자폭 인형들을 속이기 위해 녹턴에 과도한 마나를 부여해서 인간의 형상으로 부풀려 놓은 데다가, 대미궁에 있는 동안 루나가 반강제로 자신의 머릿속에 주입해 놓은 모르스 비전 ‘그림자 숨기’를 반정령화의 힘을 빌려 억지로 시전하기까지 했다.
마나바디와 그림자의 법은 근본 원리부터 전혀 다른 절기이기에 그로 인해 심각한 내상까지 입었지만, 감당할 만한 대가였다.
‘저걸 그냥 몸으로 때우는 것보다는 낫지.’
용암처럼 녹아 버린 모래 속에 꽂혀 있는, 아직도 후끈할 열기가 남아 있는 녹턴을 집어 든 타이니는 다시금 투지를 북돋웠다.
‘이 기회에 말룸의 뿌리를 뽑는다.’
오직 그 생각에만 집중했다.
7서클의 흑마법사, 쓰레기이긴 하지만 분명 인간이었던 놈이 웬 뼈다귀 괴물이 되어 나타났다. 그것도 이야기 속에서나 들어 본 8서클의 흑마법사가 되어서.
저런 괴물을 포함해 놈들이 이곳에서 쏟아 낸 전력이 몇 배 더 있다면, 말룸은 지금 숨어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이미 전설 속 암흑 왕국을 세웠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으니, 지금 저놈만 박살 내면 말룸을 거의 멸절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니.
우우우우웅.
까드드드득.
이가 갈리는 통증을 견뎌 내며 타이니는 다시금 녹턴을 잡고 내달렸다.
목표는 자신이 박살 내듯 내 던져 버린 놈의 해골 조각들.
멀리 검은 마력이 움직이며 놈의 몸체가 다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 감히, 감히, 감히! 이 몸을……!
- 신세계의 왕이 될 이 몸을……!
잇따른 충격에 정신이 나간 듯 진득한 분노가 어린 정신파가 두서없는 말을 담아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데, 그럼에도 모여드는 마기만큼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분명 오러로 몸을 찢어 버리고 인간 해머로 산산이 조각내기까지 했는데.
‘바퀴벌레보다 더한 놈.’
하지만 그런 놈이라 해도 다시는 재생할 수 없게 가루로 만들어 버리면 된다.
결심이 서는 순간, 다시금 그의 전력이 녹턴에 집중되었다.
스스로 만전의 상태에서 그 이상의 외부의 힘까지 흡수해야 쓸 수 있는 빅뱅은 무리라고 하더라도.
‘확실하게 끝장내는 건 어렵지 않지.’
우우우우웅.
검은 사막의 마기와 열기, 그리고 주변의 혈기까지 모조리 빨아들인 블랙홀의 힘은 이내 타이니의 몸까지 뒤덮으며 붉은빛으로 달아올랐고,
타이니식 전투 살법 3식. 유성 떨구기
이내 거대한 붉은 구체가 된 그의 몸이 그대로 목표를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아앙!
그 경로에 있던 이성이 없는 데스 나이트들이 루나를 상대하면서도 일순간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기세.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여파만 남긴 채 빠르게 곁을 스쳐 지나간 붉은 유성은, 막 다시 형체를 갖추어 가던 검은 해골을 그대로 직격했다.
그 순간.
꽈아아아아아아앙------!
단 일격의 여파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의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퍼져 나가고, 그에 따라 모래들이 파도처럼 일어나며 일대의 지형이 일순간 춤을 추듯 출렁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마치 검은 모래 속 지하에서 폭풍이 몰아치기라도 한 듯한 모래의 파도들이 불규칙적으로 퍼져 나가며 전장을 쓸어 버리는데.
우르르르릉.
‘지금!’
그리고 그 와중에 유일하게 그 후속파를 짐작하고 있던 한 하프 엘프만이, 균형을 잃어버린 자신의 목표들을 향해 침착하게 한 줄기 검은 선을 그었다.
루나식 모르스 식 비기, 사신의 낙인.
푸슉.
가벼운 소음과 함께 일직선으로 꿰뚫린 세 명의 데스 나이트.
“주, 죽어.”
“죽어어어.”
“죽어. 으?”
일순간 그들의 전신에 거미줄 같은 검은 기운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빠지직하며 균열이 일어남과 동시에 몸에 두른 갑옷이 형체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그 앞에 사뿐히 착지한 루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제는 에너지가 사라져 가는 갑옷 더미들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틈을 노렸다고는 하지만 7단계의 괴물 셋을 일시에 해치우는 위업을 이룬 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표정.
“아까, 그것도, 이것들도, 뭔가, 찜찜해.”
하지만 그렇게 생각에 빠진 것도 잠시.
이내 충격파가 사그라들고 그 폭심지에서 거대한 망치를 짚고 선 타이니의 모습이 보이자, 루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때.
- 끼루루!!!!
멀리 하늘에서 마치 확대되듯 빠르게 다가오는 거대한 새의 모습과 함께, 마역 전체에 높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타이니!!!
그 목소리를 들은 두 사람의 얼굴에 동시에 미소가 떠오르며 시선이 자연히 하늘을 향하는데, 은빛 마나 메탈 갑옷을 입은 엘프가 환한 웃음과 함께 그들을 향해 뛰어내리는 광경이 보였다.
“에스티나!”
“올케!!”
뭐 인마!?
창백한 얼굴로 미소 짓던 타이니의 눈이 루나를 향해 부릅떠지는 순간.
녹색의 향을 풍기는 부드러운 바람이 그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멀리서 결계 속에 숨어 그것을 지켜보던 한 여인, 아니 마족은 가볍게 혀를 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