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드디어 밖이다!!
꽈아아아아앙!
회색 동굴 벽이 터져 나가는 순간 그 너머에서 누군가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껏 뚫어 놨더니 언제 다시 길이 바뀌어 가지고…… 하여간 지긋지긋하다.”
“동감.”
“그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 어?!”
애써 다시 투지를 북돋우던 타이니가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자연스레 탄성을 터트렸다.
시야를 가리던 회색빛 먼지가 가라앉자, 저 멀리서 희미하게나마 칙칙한 회색빛이 아닌 밝은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밖이다!”
“밖이야!”
“컹!”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터져 나온 환호성과 함께 두 사람과 한 정령은 그 빛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이게 얼마 만이던가.
생체 리듬만으로 시간을 가늠하던 타이니도 미궁에 들어온 지 일 년이 지난 후부터는 그마저도 포기하고 있었다. 그저 대략 들어온 직후부터 최대 2년 가까이 흐르지 않았을까 짐작하고 있었을 뿐.
들어올 때보다 반년만 지났어도 현생에서도 성년이 된 셈이고, 거기서 1년 이상 더 지났다면 17세가 넘었을 테지만, 애초에 회귀한 후로 나이에 대한 관념이 희미해진 타이니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저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물! 목욕!”
“제대로 된 음식! 침대!”
그리고.
“컹!”
달빛 정도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뛰어나온 바깥세상.
소박한 희망에 젖은 그들을 반긴 것은 거대한 검은 전갈의 독침이었다.
“스아아아!”
검은 사막의 모래를 펑 터트리며 튀어나온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공격.
하지만.
“어딜!”
“잡것이!”
꽈아아아아앙!
스각.
고작 4단계(?)의 마물일 뿐인 자이언트 스콜피온은 나타난 즉시 망치에 짓이겨지고, 검은 오러에 급소가 꿰뚫렸다.
그리고.
뻐어억.
그렇게 죽어 가는 괴물의 몸뚱이를 거대 늑대가 앞발로 후려쳐 단숨에 저 멀리로 날려 버렸다.
“끼에…….”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허공에서 스러져 가는 괴물.
그 단말마는 드디어 바깥세상에 나온 일행의 벅찬 가슴을 다시 싸늘하게 식혀 주기에 충분했다.
“아, 여기도 마역이었지? X발…….”
“잠시, 착각.”
루나도 우울한 표정으로 애꿎은 검은 사막의 모래들을 차 날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역의 칙칙한 공기는 어쨌거나 마기 가득한 미궁보다는 훨씬 많은 마나를 품고 있었고, 그 신선한 마나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햇살은 그들의 실망했던 마음을 삽시간에 녹여 주었다.
땀이 좀 나고 눈이 이상하게 따끔거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뭐 금새 적응되었다.
“그래도…… 바깥이다.”
“그러네.”
“컹!”
마역이면 어떠한가.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대미궁에서 벗어났는데 말이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라 했던가. 생각이 바뀌는 순간, 그들의 표정은 또다시 급변했다.
“이야아아아아! 좋구나! 푸하하하”
“꺄하하하하!”
“컹! 컹!”
발밑의 검은 모래를 사방으로 차올리며 격한 기쁨의 율동(?)을 이어 가는 일행.
누군가 보았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미친 자들의 광란이라 생각하겠지만, 대미궁에서 오랜 기간 시달려 온 그들은 이 순간만큼은 참지 않고 사방으로 꽥꽥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쳐 댔다.
그것만으로도 영혼과 몸을 짓누르던 중압감과 스트레스가 대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으니까.
물론 그 소란에 이곳의 주민들이 다소 항의를 하기는 했지만.
“캬오오오오오!”
“닥쳐!!!”
쾅!!!
워해머는 언제나 그랬듯 훌륭한 협상의 수단이었기에, 그들의 주변은 금세 조용해졌다.
한편, 대미궁의 입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정말 광휘의 기사 맞나?”
“……행색도 그렇고, 그냥 미친놈들 같습니다만.”
마역의 마기를 이용한 대규모 은신 결계.
그 안에서 대마법을 준비하면서 원견(遠見, Wide Sight)의 마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말룸의 정예들이 그 말에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맞다. 그놈.”
그들의 등 뒤에서 들려온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 반론을 잠재웠다.
“정령은 예상 그대로. 여자 하나가 조력자인가.”
물론 그 여자도 제법 강해 보이기는 했지만, 릴리스가 그렇게 전력을 다하라고 강조했던 이유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거리를 꽤 두었기에 정확한 탐지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설령 저놈과 여자 둘 다 오러유저라는 터무니없는 가정을 해도, 나 혼자서도 충분하거늘…….’
자신이 넘칠 수밖에 없었지만, 대마족이 직접 경고한 일이니만큼 일단은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테이밍한 마수들부터 쏟아 넣어라. 그 후 인형들을 차례로 투입. 그러고도 제거하지 못했을 시 우리가 나선다.”
“우리라 하시면……?”
“흐……?”
명령에 토를 다는 새로운 3호의 말에 카니발의 해골 안 푸른 귀화가 꿈틀거리자, 그것을 본 3호가 바로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히익! 죄, 죄송합니다!”
최근 제국까지 나서서 가해 오는 압박에 기존의 장로들이 연달아 죽어 나가다 보니, 새로운 장로들은 죄다 능력이 부족하거나 담이 약한 놈들뿐이라는 사실이 새삼 뼈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은 처벌로 기강을 확립하기엔 도구가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니, 카니발은 오랜만에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데스 나이트들과 나 역시 함께할 터이니.”
설령 오러유저라 해도 물량 공세에는 답이 없다.
그러니 카니발은 자신이 나설 상황까지는 오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쉽게 대답했다.
마기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듯한 놈들의 행동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자신들을 그토록 괴롭혔던 광휘의 기사라면 모종의 수단이 있을 것이라 치부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착각이 깨어지기까진 불과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 * *
“캬오오오!”
“크롸……!”
콰아아아아앙!
마역이나 대미궁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종이 섞인 마물들의 합동 공격.
하지만 미궁의 심부도 아닌 바깥의 마역에, 지금의 타이니와 루나를 위협할 마물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러니 갑작스레 몰려들기 시작한 수백, 수천 마물의 공세는 그들에게는 그저 조금 짜증스러운 상황일 뿐이었다.
“귀찮게. 읏차.”
쾅!
놀과 트롤이 반쯤 섞인 듯한 초록 피부의 개 대가리 마물이 타이니의 워해머에 공깃돌처럼 튕겨 나가고.
콰아아아아아!
이내 그 뒤에 달려오던 다른 마물들과 부딪쳐 폭사하며 전열을 무너트렸다.
솔직히 큰 힘을 쓸 필요도 없는 하급 마물들은 이제 그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되지 않았기에, 그 장면을 보며 감탄하거나 놀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냥, 월랑 타고, 피하면 안 돼?”
타이니의 뒤에 얌전히 달라붙어 있는 루나는 왜 굳이 싸우는지 모르겠다는 듯 손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타이니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래도 되지만, 신경이 좀 쓰이거든.”
“신경?”
“저걸 봐.”
생체 폭탄, 괴력의 기사가 악명을 떨치는 데 일조한 그 기술은 여전히 끔찍하게 위력적이었다
생존 본능이 있다면 그것을 보고 움찔하기라도 해야 정상일 텐데, 붉은 눈으로 달려드는 마물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계속해서 꾸역꾸역 돌진해 왔다. 마치 몬스터 웨이브 시기처럼.
그러나 마물들은 몬스터 웨이브와는 정반대로 대미궁 쪽,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저게, 뭐?”
“이걸로 납득이 안 된다면 뭐……. 월랑, 가라! 보여 줘!”
“킁?”
“별로 부담도 안 되잖아. 부탁해.”
“끼힝.”
귀찮다는 듯 코를 씰룩인 월랑이 한숨을 푹 쉬고는 이내 그들의 전면에 나서서 마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아우우우우우우!”
강렬한 하울링과 함께 마물의 무리에 피 보라를 일으키는 월랑.
놈들이 싫어하는 마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정령이 그 가운데 뛰어들었음에도, 마물들은 월랑을 피해 가며 꾸역꾸역 그들을 향해서 몰려오고 있었다.
마치 정령의 주인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처럼.
“봐, 누가 조종하는 거 같지 않아?”
“응, 그렇네.”
그 말 한마디에 루나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흑마법사, 그럼 그냥, 갈 수는 없지.”
대미궁에서의 지독한 경험은 안 그래도 보통 사람들에 비해 짙은 살기를 타고난 모르스의 핏줄들에게 더욱 살벌한 투쟁심을 선사했다. 누군가 시비를 걸어 오는데 피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을 정도로.
그런 루나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타이니가 녹턴으로 마물들 너머 뒤쪽을 가리켰다.
“저쯤. 겁쟁이인가, 한참 멀리에 있네. 마역의 마기를 사용해서 숨어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여기서 1~2km 사이인 거 같아, 마역이라 그런지 흑마법을 찾기 애매하네. 읏차!”
쾅!
콰콰콰콰콰쾅.
그리 말하면서도 다시 한번 녹턴을 휘둘러 마물의 전열을 뭉개 버린 타이니가 손짓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킬로미터 단위의 탐지를 감각으로 한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 타이니.
안 그래도 인간 이상의 초월 감각을 자랑하던 그가 월랑의 소울 사이트까지 체화하자, 탐지 능력이 거의 마법의 수준에 다다른 것이다.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루나는 놀라지도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찾아, 죽일게.”
“무리하지는 말고.”
- 무리, 일 리가.
자신감 넘치는 전성만 남긴 채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루나.
그것을 본 타이니는 다시 피식 웃으며 손을 풀었다.
“그래. 어떤 놈들인지 대략 짐작은 가지만, 어째서 지금 이 타이밍에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네. 잡아서 주리를 틀어 봐야지.”
마치 누가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한 타이니.
‘그 쓰레기들이 겁먹고 도망가면 안 되니까 오러는 자제할까? 시선만 끌어 주는 정도로.’
이내 그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마물들에게 뛰어들었고, 그때부터 본래 의도대로 배후 인물들의 시선을 제대로 끌기 시작했다.
“으랏차!”
꽈아아아아아앙!
망치질 한 번에 집채만 한 마물의 대가리가 터져 나가고.
“어딜!”
쿵.
발 구름 한 번에 검은 사막의 모래 속에서 튀어나오려던 거대 개미지옥이 그대로 뭉개졌다.
콰콰콰콰콰광.
사람보다 거대한 워해머가 잔상이 보일 정도로 빠르게 허공을 가르자, 연이어 튕겨 나간 마물들이 사방의 동료(?)들에게 부딪치며 함께 폭사했다.
그렇게 허공에 남겨진 노을빛 마나의 잔향은 이내 빙빙 돌아가는 워해머의 마나를 따라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기가 적으니 훨씬 쉽게 되네. 흐아압!”
콰콰콰콰콰콰콰콰콰.
능청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일어난 노을빛 토네이도가 약한 마물들을 그대로 갈아 버리며 말 그대로 피의 폭풍을 일으켰다.
그 폭풍에 휩쓸리지 않은 비교적 강하고 커다란 마물들은 거대한 늑대 정령의 앞발이나 해머에 허무하게 터져 나갔으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배후들은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굳어 있을 뿐이었다.
몇 년 전부터 조직의 척살 1순위 대상이었던 자의 전력(?)이 그들의 상상을 아득하게 초월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저 저게……?”
“어떻게, 인간이……!?”
“말도 안 돼!”
실력을 숨기려던 타이니의 의도가 무색하게, 그들은 그가 보여 주는 무력에 충분히 당황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초인이라는 증거인 오러가 보였다면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말도 안 되는 괴력을 자랑하는 괴물의 학살 쇼일 뿐.
상리에 벗어난,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그 장면에 말룸의 추종자들은 할 말조차 잃고 말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것은 수장인 카니발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인간의 몸을 버리게 만든 원흉이기에 더욱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 꼬마가, 완전히 변한 모습과 그 이상으로 오른 실력으로 파괴의 미학을 선보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오러가 없을 뿐, 그 파괴력은 웬만한 오러유저 이상으로 보였다.
‘데스 나이트를 막아 낸 게 황실에서 받았다는 초월무구 덕분만이 아니었어. 어쩌면 오러유저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해. 아니, 아니면 저 무력이 말이 안 돼.’
그런데 저 나이에 초인이라니, 그게 가능한가? 역사상 그런 인간이 있었던가? 그럼 역시 오러유저는 아닐까? 아닌데 저렇게 강할 수가 있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전력을 투사하라는 릴리스의 명이 내심 의아했기에 놈 말고 다른 변수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었는데, 이젠 그 생각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놈이 오러유저라 한들, 죽일 자신이 있지만…….
‘그때도 그랬지. 분명 약했는데…….’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력으로도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놈이다.
그러니.
“인형들을 투입해라. 싸우다 죽어서 폭파하게 두지 말고 그냥 한꺼번에 터트려!”
“예!?”
“인간이 아니라 괴물을 상대한다 생각하고 반드시 죽여라! 준비한 마법도 같이 투사한다.”
보유한 최대치의 전력을 한 번에 투하한다.
혹시나 만에 하나, 아주 희박한 확률이라도 자신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최소화해야 하니까.
파르르 흔들리던 카니발의 푸른 귀화가 더욱 거세게 타오르며 그들의 발아래 깔린 검은 마법진이 짙은 마력을 뿌리기 시작하던 그때.
자욱이 일어나는 검은 마력 사이로 이질적인 작은 그림자 하나가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