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220화 (220/500)

220화. 보이지 않는 곳의 변화

- 운명이 크게 틀어졌다!! 고대부터 예비된 칼이 부러졌다!!

- 당장! 지금 당장 변수를 찾아 제거하라!!! 당장!!

마계의 일곱 대공에게 기나긴 세월 동안 고요히 지켜보기만 하던 지배자의 분노가 전해졌다.

그에 누군가는 느긋하게, 누군가는 기대감에 부풀어 강림의 때를 기다리던 마계 대공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 그린 아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말룸에게 힘을 주긴 한 것이냐!

- 카르마를 아끼려고 했겠지. 질투니까.

- 자신이 손해를 덜 보려고 대계를 망치다니. 정말 질투답다고 해야 하나.

- 그래 놓고, 내게 무식하다 말하는 건가, 질투? 크르릉.

연달아 정신을 때리는 영파에, 깊은 어둠 속에서 번뜩이던 한 쌍의 녹색 귀화가 부르르 떨렸다.

- 멋대로, 헛소리를…….

분노로 인한 농밀한 투기가 어둠을 밀어 내고 그 어둠보다 짙은 색 갑옷을 입은 인간형 몸체가 윤곽을 드러내자, 7개의 뿔이 달린 투구 안에서 번뜩이는 녹색 귀화와 함께 분기 어린 영파가 울려 퍼졌다.

- 웃기지 마라!!

우르르르릉.

분명 정신파임에도 물질화된 파동이 주변 수 킬로미터의 공간을 타격했다.

그 순간.

우드드득.

“끼릭?”

“크우우우우.”

쿵.

마계의 무덤, 가장 깊은 어둠 속의 땅을 뚫고 새하얀 뼈다귀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 나는 군주의 뜻을 충실히 이행했다!!!

연이어 울려 퍼진 분노 섞인 정신파.

우르르르르릉.

“끼리릭.”

쿵.

마계 대공 그린 아이. 그가 분노를 표출하는 것만으로 그의 군단이자 충실한 손발들인 언데드 군단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 정말 그렇다면, 어찌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 그린 아이?

나른하게 그린 아이의 영혼을 두드리는 정신파에, 투구 안에서 번뜩이던 녹색의 불꽃이 거세게 흔들렸다.

- ……중간계의 추종자. 말룸의 무리들이 무능하기 때문이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나온 정신파.

그러자 그 대답을 들어야 할 나른한 목소리 대신 다른 이들의 비웃음이 돌아왔다.

- 비겁한 변명이다, 그린 아이.

- 저런 소리를 지껄이면서 마계 대공을 자처하는가.

- 나라면 부끄러워서라도 닥치고 있을 텐데.

그에 다시금 녹색 귀화가 거칠게 타올랐다.

- 시끄럽다!! 카르마의 소모를 무릅쓰고 귀족의 위계까지 내렸다. 그리고 데스나이트 3기까지 보냈다. 이것을 몸을 사린 것으로 보는가!!!

그 타당한 변론에 그를 비웃던 이들이 잠시간 침묵했다.

- 귀족의 위계?

- 그건 그렇다 치고, 데스나이트라니, 지금 어떻게 초월체를 3기나 내보냈지? 아직 차원 구멍이 그만하게 뚫리진 않았을 텐데?

- 영혼을 뽑아냈다. 미약한 영성만 남긴 채 무력만 챙겨서 말룸의 수장에게 귀속시켰다. 이래도 내 처치가 부족했는가?

바로 이어진 그린 아이의 답변에 다른 마계 대공들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아무리 귀족급이 아니더라도, 최정예 병사를 만들기란 어려운 법.

그런 정예 셋을 사실상 인형으로 만들고 차원의 장벽을 넘어 중간계의 흑마법사에게 귀족의 위계까지 내렸다니, 거기에 소모된 카르마가 얼마나 될지 대략 짐작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 그렇다 한들, 폐하의 명이 수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긴 침묵을 뚫고 이어진 나른한 목소리가 기세등등하던 그린 아이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 ……개선책을 생각 중이다. 내게 시간을 달라, 솜누스(Somnus).

몇 대를 이어 온 다른 마계 대공과는 달리, 지배자와 더불어 태곳적부터 쭉 홀로 존재해 온 대마족.

서열 1위인 마계 대공, 나태의 지적은 그에게 양보를 얻어 내기에 충분했다.

- 지금은 슬로스(Sloth)로 족하다. 인비디아(Invidia)가 그린 아이(Green-eye)가 되었듯이, 운명의 흐름은 귀찮아도 따라가야 하는 법이니…….

거의 동문서답과도 같은 말이었지만, 그린 아이는 그 대답을 자신의 말에 납득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티를 내진 못해도 속으로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말룸의 수장에게 귀족의 위계를 내릴 땐 그에 준하는 제물을 받았으니, 그가 손해 본 것은 약간의 카르마와 최정예 데스나이트 3기뿐이었다.

마계 대공들이 동지이기는 하나 그 본질은 경쟁자나 다름없었으니, 홀로 큰 손해를 감수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뼈아픈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확실히 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배자의 분노는 그가 마계 대공이 된 이후 처음 접하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수단을 강구하기에 앞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분명히 있었다.

- 그런데 예비된 칼이 무엇인지 아는가, 슬로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자신이 선을 넘은 게 아닐까 싶었던 그린 아이가 바로 말을 덧붙였다.

- 상황을 확실히 파악해야 다시 수단을 강구할 수 있…….

그리고 그 직후.

- 초대의 폭식, 굴라(Gula)다.

던져진 슬로스의 대답은 마계 대공들 사이에 파란을 일으켰다.

- ……!!?

- 뭐라!?

- 그게 무슨!!?

- 초대의 폭식!? 말이 안 된다. 우리 폭식은 선대를 잡아먹으며 계승해 왔다!!

- 나태를 제외한 고대의 마계 대공이 아직 남아 있었던가?

- 아니 그 전에, 그럼 우리와 같은 급의 마족이 중간계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뜻!?

지고한 존재들답지 않게 시끄럽게 교환되는 정신파.

그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시 슬로스의 목소리가 정리했다.

- 당연히 반신의 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중간계에 남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으니. 현재의 그는 후작급보다 못하다고 봐야 한다.

일순간에 다시 침묵하는 정신파들.

하지만 다른 대공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린 아이의 속내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한들 적어도 백작급을 꺾을 변수가 중간계에 있다는 거야. 말룸의 수장이 귀족의 위계를 소화한다 해도, 백작급 전력이 하나 정도는 더 필요하다는 건데.’

생각보다 더 큰 지출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알았을까.

- 그가 부러진 만큼, 운명이 크게 비틀린 만큼 차원의 장벽은 더욱 얇아졌다.

슬로스가 그답지 않게 장황하게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 강림의 시간 또한 더욱 빨라질 터이니, 그 전에 확실한 정리를 해 놓아야 한다. 카르마의 효율은 크게 올라갔겠지만, 어쨌든 큰 손해를 감수하라, 그린 아이. 그분의 명, 그 성과를 내지 못한 대가다.

직접적으로 카르마와 대가, 성과 등을 언급함으로써, 그린 아이가 후퇴할 구멍을 막아 버린 것이다.

거기다.

- 확보한 여신의 파편 중 하나를 써도 좋다.

- 뭐라!?

- 슬로스! 그건…….

- 반론은 받지 않는다. 그분의 뜻이다.

슬로스가 그럴듯한 당근까지 던져 주자 그린 아이 역시 진심으로 응할 수밖에 없었다.

- ……그분의 명을 충실히 수행하겠다.

그리고 이내, 마계의 가장 어두운 곳을 지배하는 그린 아이의 영지에서 막대한 마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성산, 니두스.

그 정상에서 산 전체보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커다란 규모의 건축물, 중앙 신전 솔.

여신교의 사제 중에서도 기대주나 고위 직책이 아니라면 들어설 수 없다는 신전의 중심부에서, 최근 백여 년간 볼 수 없었던 광경이 벌어졌었다. 대륙 각 신전의 대표 사제들이 모조리 몰려드는 진귀한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중앙 신전 전체에는 피의 폭풍이 몰아쳤다.

그것은 무려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성전 기사단의 일부가 일으킨 대혈사였으며, 신전 역사에도 다시 없을 위로부터 이루어진 혁명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야 신전은 가까스로 다시 평안을 찾아 가고 있었다.

성산 니두스의 중앙 신전 바로 아래, 돌산을 올라 신전으로 들어가는 길에 반드시 볼 수밖에 없는 순교자들의 무덤.

그중 가장 큰 규모의 무덤 지대에 수많은 사제들이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커다란 돌 위에서 높고 빛나는 법관을 쓴 중년의 남자, 교황 센티널 3세가 무거운 얼굴로 축문을 읽고 있었다.

“……위대하신 여신의 이름으로 이곳에 잠든 모든 형제, 자매분들의 평안을 빕니다.”

“여신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아센시오(Assensio).”

교황의 축문이 끝나자마자 둥그렇게 성호를 긋는 사제들.

그들 대다수는 새롭게 생긴 수백의 무덤을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제는 모두 부자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다 낡은 사제복을 입고 있는 이들. 이 자리에 모인 사제들이야말로 썩어 버린 신전을 정화하고자 모인 결사이며, 결국 혁명을 이루어 낸 영웅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교황이 뿌듯한 웃음을 내보였다.

“이제야 비로소 순교한 형제들을 보냈으니, 신전의 개혁은 이제 우리로부터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형제들.”

“아센시오.”

“아센시오.”

“여신의 이름으로.”

교황의 말에 사제들의 시선이 다시금 그들의 수장에게 집중되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주름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의 교황.

하지만 법관 아래로 드러난 그의 머리에는 털 하나 없이 매끈한 살결만이 보이고 있었으니, 몇 년 전만 해도 풍성하던 그의 머리숱을 기억하는 사제들로서는 안쓰러운 표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혁명의 과정에서 교황이 받았을 스트레스를 짐작하고도 남았으니까.

그런 그들의 표정을 살핀 교황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돌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수고하셨습니다, 성하.”

1년 사이 더욱 늙어 버린 얀센 추기경이 그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서로 고생한 마당에 이제 와 새삼 인사치레하기도 쑥스러운 터라, 교황은 고마운 마음은 담아 둔 채 가장 궁금한 일부터 물었다.

“갓 핸드 경은요? 여전히 똑같습니까?”

진짜 신의 칼을 밖으로 내보낸 사이에 벌였던 혁명.

혁명이 끝나고 갓핸드가 돌아왔을 당시, 교황은 칼을 뽑아 든 그와 성전 기사단 앞에서 개혁파 사제들과 함께 고개를 숙였었다.

- 신민들에게 믿음을 주는 신전, 타락하지 않은 신전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에 어긋났다고 여기신다면 제 목을 베셔도 좋습니다, 갓핸드 경.

당시 갓핸드는 그런 그와 사제들을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기도실에 들어가 버렸고, 성전 기사단의 보호 속에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들 그가 여신의 뜻을 듣고자 기도하는 것이라 짐작했지만, 감히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을 가진 이는 교황인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좋은 일 아닙니까. 그가 나온다면, 더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얀센 추기경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젯밤 신탁이 있었습니다.”

“예!?”

“이것은 저와 갓 핸드 경, 그리고 추기경들만 알아야 하는 신탁입니다. 그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아니, 이참에 새로운 추기경들도 다 데리고 가지요. 이제는 그도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니까요.”

“……대체 무슨 신탁을 받으신 겁니까?”

“말세의 때가 더욱 가까워졌다. 파멸의 운명이 다가왔다.”

“예!?”

“그러니…….”

말을 이으려던 교황은 순간적으로 주춤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자신에게 주목하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얀센 추기경에게 속삭였다.

- 용사를 깨워라.

아주 오랜 고대부터 이어져 온 신전의 비밀.

그 일각을 전해 들은 얀센 추기경의 눈동자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