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217화 (217/500)

217화. 등장

우르르르르르릉.

엄청난 지진과 함께 거대했던 구멍이 더욱 넓어지고, 그 안에서 나타난 여섯 개의 붉은빛이 전장을 향한 순간.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투의 기세가 급속하게 사그라들었다.

대미궁에서 태어난 모든 마수가 본능적인 위압감을 느끼며 움츠러든 것이다.

동시에 모두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태생지, 그 근간에 자리한 근원과 같은 무언가가 다가왔다는 것을.

하지만.

“캬아아악!”

- 움직여라! 멈추는 자는 놈에게 먹힌다!!

스아아아아.

- 내 기억을 보아라! 저놈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괴물이다!

“크와아아앙!”

- 동의한다!

몬스터 군단의 악마급 마수들 중 ‘그것’을 겪어 본 적 있는 이들이 연이어 경고의 뜻을 전하는 순간, 사태가 급변했다.

천 개의 눈이 수백 개의 촉수를 모조리 잡아 뜯긴 순간의 기억이.

쌍두 안개 퓨마가 한쪽 머리를 잡아먹혔던 때의 공포가.

그리고 무엇보다.

“꾸어어어!”

- 동의!!!!

왼팔과 함께 영혼이 뜯겨 나갔던 외뿔 거인의 끔찍한 기억 속 그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몬스터들의 생존 본능을 일깨웠다.

영파로 뜻을 전하지 못할 정도로 영락했다던, 외눈 외뿔의 거인이 피를 토하면서까지 알린 원한과 공포.

그 안에 담긴 절절한 위기감이 격하의 몬스터들에게까지 ‘괴물’이 주는 위압감을 이겨 내게 만든 것이다.

“취이이익!”

- 계층주가 아닌 것들은 그분의 관심사가 아니다!! 한심한 것들!

왕관 뱀, 아르스가 진실의 일각을 전해 보지만, 그의 전투력은 커맨더를 앞설지 몰라도 세뇌 마법으로는 놈의 방해를 뚫지 못했다.

하지만 아르스는 실망하지 않았다.

취이익.

- 그래 봤자 다 죽을 뿐이다. 어리석은 것들.

그 비웃음과 함께 거대한 구덩이에서 폭풍이 일어났다.

콰콰콰콰콰콰콰.

이내 진한 마기가 일순간 폭풍에 섞여 들며 몬스터들의 시야를 가리는가 싶더니, 마침내 ‘그것’이 나타났다.

- 이건 또 생각지 못한 변화로구나.

세 개의 머리에서부터 뒷다리까지 200m는 될 듯한 덩치.

각기 녹색, 빨간색, 검정색 머리에서부터 꼬리 끝까지 촘촘히 박힌 세 가지 색깔의 비늘은 회색 빛 세상 안에서 스스로 광채를 뿌리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얼핏 도마뱀처럼 생긴 세 머리는 날카롭게 선이 살아있는 턱과 수염, 머리 위로 두 개씩 돋아난 뿔과 붉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듯한 눈빛 때문에 더욱 위엄 있게 보였다.

몸통의 앞쪽에 달린 짧은 발과 등 뒤의 작은 날개가 조금 부조화스럽기는 했지만, 그 몸에서 풍겨 나오는 형언하기 어려운 수준의 마력은 그 거체가 날아오르는 데에 굳이 커다란 날개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려 주는 듯했다.

말세의 끝을 마주했던 괴력의 기사도 처음 보는 생명체.

하지만 그 형상에 대한 묘사는 분명히 어디선가 본 듯했다.

현실이 아닌, 신화 속 존재.

그래, 듣던 것과는 달리 머리가 3개고 날개가 좀 작기는 했지만.

“드래곤……?”

멀리서 지켜보던 타이니의 입에서 멍한 음성이 흘러나올 정도로, 그것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모두가 얼어붙은 듯 멈춰 있던 그 순간.

- 모두, 꿇어라!!!

갑자기 울려 퍼진 강렬한 정신파가 다시금 몬스터 군단을 강타했다.

단순한 세뇌 마법이 아닌, 생존 본능까지 억누르는 공포심.

“끄……!”

대다수의 몬스터가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 우리의 주인.

본능에 새겨진 명령에 굴복한 것이다.

애초에 종의 한계를 한참 벗어난 악마급의 지배자들마저도 그 정신파에는 움찔하고 말았다.

한계를 깨고 자아를 얻은 마수가 아닌, 태생부터 초월종이었던 생명체의 영격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것이다.

더구나 그 기저에는 자신들의 태생에까지 관여한 권능의 흔적이 느껴졌으니.

“크륵!?”

- ……주인?

“키야아악!”

-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여섯 머리!!

여섯 머리 도마뱀의 신음 같은 영파에 커맨더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 네놈이구나, 이번 변수의 시작은.

그 순간 붉은색, 검은색, 진녹색의 세 머리가 일시에 자신을 바라보자, 커맨더는 일순간에 위축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가까스로 공포심을 이겨 냈다.

애초에 그는 저 괴물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스아아아아.

- 정신 차려라. 허물을 벗은 자들아! 그대로 먹잇감으로 전락할 셈이냐!?

“크와아아앙!”

- 저항하지 않으면 먹힌다!

“꾸어어어!”

- 또 먹히기 싫다!

놈에게 신체 일부를 뜯어 먹히고 그 영격까지 추락한 천 개의 눈, 안개 퓨마, 외눈 거인이 또다시 몬스터 군단을 자극하는 정신파를 뿜어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몬스터가 제자리에 머리를 박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한 번 종의 한계를 벗어난 초월급 마수 삼십여 마리는 정신을 차린 듯 머리를 털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이내.

“캬오오오오!”

- 먹히기 싫다면 싸워라! 우리가 먹이가 아닌 포식자임을, 저 괴물에게 보여 줘라!!

커맨더가 새끼일 때부터 저 괴물을 극복하기 위해 특화시켜 온 강렬한 정신파가, 본능을 극복한 초월급 마수들의 투지를 자극했고.

스아아아아.

-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 미궁의 주인!

천 개의 눈이 뿜어내는 마력이 몬스터 군단 전체가 아닌 그 소수의 초월 마수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인간에게도.

“크! 역시, 이럴 생각이었어.”

타이니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의 몸속 마력이 커맨더의 정신파에 꿈틀하더니, 천 개의 눈의 정신파가 이어질 때는 일순간 저 드래곤을 향해 정신이 아득해지는 수준의 적개심이 일었다.

미리 알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휩쓸렸을 만큼 강렬한 악의.

타이니는 그것을 간신히 떨쳐 낸 뒤.

“루나!!”

두 눈을 붉게 물들이며 불나방처럼 뛰어나가려던 루나의 어깨를 잡아 세우고는 그녀에게 마나를 쏟아부었다.

그오오오오.

한순간에 주변의 마기를 압도하는 노을빛 마나가 체내에 퍼지자, 그제야 눈빛이 돌아온 루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으윽. 고, 고마워.”

그런 그녀의 육체에서 밀려 나오는 이질적인 마기를 느끼며, 타이니는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멀리 보이는 트리플 헤드 드래곤에게로.

저놈이 진짜 신화 속 용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해 보였다.

“저 녀석, 육체의 힘만이라면 글러터니보다 세겠어. 정말 고대의 폭식인가? 빌어먹을…….”

루나로선 타이니의 말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말에서 공포심이 아닌 투지가 느껴진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에 이제 막 정신을 차린 그녀의 얼굴에 정말이지 질린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타이니, 정말, 싸울 생각?!”

어떻게 저런 걸 보고 싸울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런데.

“당연하지. 저런 걸 봤는데 어떻게 그냥 돌아가겠어? 저놈, 이 기회에 여기서 죽여야 해. 바깥에 나오기 전에.”

그녀와 똑같은 관점에서 나온,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이곳에서 저런 괴물 잡는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이 꿈이라면서,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걸려고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동생이 왜인지 더 든든하게만 느껴졌다.

‘역시, 내 동생…….’

그리고 그런 루나의 시선을 뒤로한 채 타이니는 다시 전장을 살피기 바빴다.

그는 아직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저 괴물은 확실히 무시무시했지만, 우려했던 9단계, 반신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물론 정말 자신의 추측대로 고대의 폭식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완전한 9단계는 아니었다.

‘저게 진짜 전설 속의 용, 그것도 머리가 세 개나 되는 용이라면, 그 일격을 완벽한 타이밍에 제대로 맞혀도 끝장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 그렇다면…….’

타이니의 시선은 저 괴물에게 뛰어드는 산양 머리, 커맨더의 손에 들린 녹턴에 꽂혀 있었다.

* * *

- ……어미보다 강해졌구나. 새로운 변화야.

거대한 드래곤의 정신파에서는 어쩐지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몬스터 군단의 정예들이 그대로 자신과 부하들에게 달려드는 모습이 그에게는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진 것이다.

영락했다고는 하나, 그는 이 차원에 남은 마지막 용의 후예.

나면서부터 마법을 쓸 줄 알았던 신화종의 후손이자 고대 마계 대전 이후 전설로 남은 마계 대공, 초대의 폭식이었다.

아무리 레벨이 다운되었다고는 해도, 동급 이하의 미물이 자신에게 싸우자고 엉겨 붙는 것 자체가 불쾌할 수밖에 없는 고귀한 존재.

마음 같아서는 지금의 자신과는 달리 완전할 것이 분명한 현역의 칠죄종한테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몬스터 군단을 가로막고 있는 부하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 오랜만에 별식이 되겠어.

거대한 드래곤의 세 머리에서 각기 비늘과 같은 색의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콰콰콰콰콰콰콰콰.

각각의 입에서 단숨에 전장 전체를 뒤덮을 만한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스치기만 해도 생명을 녹여 버릴 듯한 독기가 어린 녹색 안개가 가장 넓은 범위에 퍼졌고, 그 중심에선 모든 것을 불태울 듯한 짙은 화염이 그에게 달려드는 몬스터 군단의 정예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위에서는 진득한 죽음의 기운이 서린 검은색 광선이 군단의 가운데에 있는 커맨더를 노리고 쏘아졌다.

“끼에에에!”

- 여섯 머리!

“쿠륵!”

- 나도, 조금, 한다.

그러자 그에 맞서 여섯 머리 도마뱀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훨씬 작아 보이는, 그렇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어 보이는 여섯 가지 색깔의 광선을 정면으로 쏘아 냈다.

콰콰콰콰콰콰!

-----꽝!

여섯 색상이 합쳐진 브레스는 트리플 헤드 드래곤의 녹색 브레스를 뚫고 화염의 브레스까지 상당량 상쇄시켰다.

하지만 그 충돌의 여파가 전장 전체에 퍼져 나간 직후.

프슉.

가벼운 파열음과 함께, 검은색 광선이 여섯 색깔 브레스를 그대로 뚫어 내고 커맨더를 직격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천 개의 눈이 전신에서 그와 같은 색의 검은 광선을 쏘아 내기 직전까지는.

찌이이이이이잉!

쾅!

그렇게 드래곤의 브레스가 흩어져 버리자, 몬스터 군단의 사기가 껑충 올랐다.

“키에에에에!”

- 죽여라! 놈의 부하들부터 죽여! 놈들은 지쳤다!!

커맨더의 정신파가 다시금 전장을 강타하던 그때.

- 웃기는구나.

불쾌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드래곤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내.

쾅!

뒷발을 내딛는 충격만으로 지반을 푹 꺼트리더니, 몸통의 길이만큼 커다란 꼬리가 시커먼 암흑 오러를 넘실거리며 전방을 통째로 쓸어 왔다.

그 덩치만큼 예비 동작이 너무 크긴 했지만.

- 멈춰라!

- 느려질지어다!

- 돌이 되어라!

그의 부하 중 흑마법에도 조예가 깊은 왕관 뱀 아르스, 검은 안개 새 벨로치타스, 회색 뿔 도마뱀 라피스가 각기 저주를 거는 순간.

초월급 마수 중 반수 이상이 그 공격을 회피하지 못하고 드래곤의 꼬리에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콰아아아아아앙!

그리고 그 공격을 넘어서 드래곤의 품 안으로 뛰어드는 소수의 몬스터들은.

“캬오오!”

- 어림없다!

거대한 검은 사자, 케뤽스와 땅을 뚫고 튀어나온 자이언트 웜, 이테르가 막아섰다.

그리고 그 뒤에서.

“락[email protected]$!”

“크[email protected]!&”

“타[email protected]$!$!”

우우우우웅.

용의 세 머리가 각기 강대한 마력을 움직이며,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우우웅.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의 세 머리 위에 각기 조금씩 다른 거대한 육망성이 떠올랐고, 자연스레 모여든 마기가 전장 바닥을 거세게 떨어 울렸다.

대미궁의 마수들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자신들이 본능적으로 쓰는 마기 운용과는 격이 다른 고차원적인 수법이라는 것을.

최대한 몸을 사리려던 커맨더는, 그것을 느낀 순간 검은 사자와 자이언트 웜을 공격하고 있는 동료들을 뛰어넘어 저돌적으로 몸을 던졌다.

“끼야아아!”

- 빌어먹을, 그놈들은!?

주변의 방해를 모두 뿌리치고 드래곤의 몸통을 향해 달려든 커맨더는 망치를 휘두르기 직전까지도 뒤쪽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을 뿐, 그는 절대 이 괴물의 전면에서 선봉으로 돌격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 움직이고 있을 거다. 그래야 해!

그를 후방에서 받쳐 주며 심상치 않은 용의 마법을 흐트러트리려고 애쓰던 천 개의 눈이, 정신력의 일부를 할애해 가며 그 변수, 외부의 것들을 찾았다.

그리고 그 사이.

콰아아아아아아앙!

커맨더의 망치가 드래곤의 복부를 후려갈겼다.

“크롸롸롸롸롸롸!”

생각보다 충격이 큰 듯, 드래곤의 입에서 마치 짐승의 비명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전장의 모두가 움찔하며 그를 바라볼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

“끼에!!”

그러나 정작 녹턴으로 적을 후려친 커맨더가, 오히려 자신이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허공으로 튕겨 나오고 있었다.

- 이상한, 권능을!!

물론 그럼에도 그 투지는 전혀 죽지 않았다.

“캬오오오!”

- 공격해!! 놈도 상처를 입는다!

그의 정신파가 움찔하던 모든 마수를 다시 자극하는 순간.

- 우습구나. @$의 무기가 가진 힘을, 네 것으로 아는가.

분노를 담은 정신파와 함께, 드래곤의 세 머리 중 가운데에 달린 붉은 머리 위에 형성된 검은 육망성이 빛을 내며 사라졌다.

그리고 이내, 커맨더가 튕겨 날아가던 공간 전체가 검은 안개에 휘감기는 순간.

드래곤의 발밑에서, 전장의 몬스터들에 비하면 아주 작디작은 그림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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