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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216화 (216/500)

216화. 몰아붙여라!

그 이상할 정도로 희미한 존재감을 먼저 느낀 것은, 내상을 입은 루나보다는 빠르게 힘을 회복하고 있던 타이니였다.

“아니!?”

놀란 표정으로 재빨리 뒤를 돌아보는 타이니.

하지만 그보다 먼저, 소름 끼치는 정신파와 함께 이질적인 마력이 그들을 덮쳐 오고 있었다.

- 너희, 불쾌하고, 하찮고, 위험한, 것들아.

우우우웅.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마력.

하지만 타이니와 루나가 황급히 투기를 북돋운 것이 무색하게, 그 마력은 별다른 살기도 없이 그들의 몸 안으로 스며들 뿐이었다.

스아아아아.

- 그 불쾌한 기운을 쓰면서도 우리 힘까지 잘도 사용하더군. 그러니 받아들여라.

마나로 치환될 수 있다 한들, 대량의 마기가 일순간에 스며드는 느낌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당장은 그게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어찌 됐건 눈앞의 눈깔 괴물이 느닷없이 보인 호의는 이상했다.

“어째서……!?”

스아아아.

- ‘괴물’을 잡겠다는 투지. 확인했다.

“허…….”

그래도 몬스터가 자신들을 돕는다니?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도 처음 겪는 일에 타이니조차 멍하니 눈을 껌뻑이며 눈앞의 괴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을 알아챘을까.

스아아아.

- 나, 천 개의 눈은 어리석지 않다. 대적을 앞에 둔 지금, 적의 적은 아군.

- 커맨더 역시 ‘괴물’의 진짜 힘을 알지는 못하니, 지금은 모을 수 있는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 그것이 비록 불쾌하게만 느껴지는 외부의 것들이라도.

놈이 몬스터답지 않게 긴말을 전해 왔다.

더구나 그 영파에는 선천적인 교활함과는 구별되는, ‘지혜’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놈을 보는 순간, 천 개의 눈이 그를 응시하는가 싶더니 스르륵 하고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에야 타이니는 자신이 왜 놈의 존재감을 쉽사리 느끼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분신…….”

“분신에, 이런, 마력. 가능해?”

“……저놈은 가능한가 보지.”

경계심이 담긴 타이니의 시선이 전장에 있을 천 개의 눈의 ‘본체’를 향했다.

분신이 나타났을 때도, 사라질 때도 거의 티가 나지 않았을 정도로 은밀한 마기 운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패턴이나 흐름이 없었기에 감지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마법도 아닌데, 마법처럼 마기를 부린다.’

굳이 따지자면, 저 천 개의 눈이 스스로 개발한 고유 마법이라 봐야 할까.

‘아마 특성도 그쪽이겠지.’

놈에게서 느껴지는 격이 남작이나 자작급 정도라는 것을 고려하면 놀라울 정도의 마기 운용이었다.

아니, 아니지. 정말 자작급이 맞나?

‘생각해 보면 놈도…….’

거대한 구체 형태의 몸에 자리한 눈 사이사이, 무언가 뽑혀 나간 듯한 흉터가 잔뜩 있었다.

놀라운 마기 운용을 보여 주는 마물이 재생하지 못한 상처.

마치 그 고릴라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육체가 아닌 영혼이 잘려 나가 격이 추락한 듯한.

‘저것도 영혼이 깎여 나간 상처라면, 원래는 훨씬 강했다?’

차이가 있다면 고릴라의 상처가 깔끔하게 잘려 나간 흔적으로 보이는 데 반해, 눈깔 괴물은 신체 일부가 거칠게 뽑혀 나간 듯했다는 것.

그것이 이 밑에서 올라오고 있는 ‘괴물’의 의한 부상이라는 사실은 놈의 영파에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설프지만 영혼살이 가능한 수준의 괴물, 그렇다면 역시 밑에서 올라오고 있는 것은…….’

타이니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몬스터한테, 도움, 기분, 이상해. 착한, 몬스터라니?”

창백한 얼굴에 살짝 홍조가 돌기 시작한 루나의 말에서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에 본능적으로 감응력을 끌어 올리는 순간, 타이니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X발 놈.”

“뭐?”

“주의해, 루나. 놈의 마력이 이상한 걸 심어 놨어. 치환할 때 걸러 내도록 해 봐.”

“뭐!?”

“자신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주고, 공통의 적에 대한 적개심을 심는 마력. 감정을 부추기고 자극하는 형태의 요상한 마력이야.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패턴이 없는데, 그만큼 마기의 본질에 깊게 녹아 있어.”

우우웅.

그 말을 하는 순간 타이니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조금은 이질적인 마기.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감각을 지닌 인간이라 해도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지만, 다행히 루나의 감응력도 범인의 상식을 초월한 것은 마찬가지인지라 그 미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내 안색이 확 변한 그녀가 인상을 쓰며 주저앉아 내면에 남은 그 마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몬스터는 역시 몬스터라는 거지. 썩을 것. 뭐, 두고 보자고.”

어쨌거나 놈의 마력이 당장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니, 타이니는 밑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존재감에 계속 신경을 쓰면서도 본인의 컨디션을 끌어 올리는 데 몰두했다.

물론 중간중간 전장의 상황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 * *

전투의 초반과는 달리 전장의 분위기는 몬스터 군단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철갑 고릴라와 금속 박쥐가 떨어져 나간 덕에 악마급 몬스터의 머릿수도 비등해졌고, 그때부터는 여전히 절반 이상의 전력이 건재한 몬스터 군단의 수가 실질적인 압박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캬아악!”

- 죽여! 모두 죽여라!!

산양 머리, 커맨더는 전장을 장악하는 정신파를 연신 퍼트리면서 왕관 뱀과 대치하고 있었다.

취이익.

- 성가신 놈이로구나.

커맨더의 정신파는 왕관 뱀의 세뇌 마법과 저주를 분쇄하며 몬스터 군단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녹턴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있으면서도 왕관 뱀, 아르스의 공격을 정면에서 막아 내긴 버거웠다.

바로 지금처럼.

꽈아아아아아앙!

검은 오러를 온몸에 두른 거대한 왕관 뱀이 몸을 한껏 웅크렸다 튀어나오는 순간.

“캬아악!”

마치 지면이 통째로 튀어나와 덮치는 듯한 압박감에 반사적으로 녹턴을 휘둘러 보지만, 충격과 함께 형편없이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 커맨더를 도와라!

- 괴물의 부하를 죽여라!

곁에 있던 초월급 마수들과 그 부하들이 그 틈을 메우며 왕관 뱀을 몰아붙였다는 것.

물론 그 대가로.

- 하찮은 것들이!!!

콰과과광!

“캬아아악!”

“끼이이…….”

지상에 나왔다면 네임드급 괴물이 되었을 수도 있는 5, 6단계 마수들이 거의 미물처럼 학살당했다.

다만 그 덕에 커맨더는 다시 여유를 찾을 수 있었고, 왕관 뱀은 다시 고스란히 공격당하는 처지가 되어 그 자리를 지켜야 했다.

취이익!

- 이, 이 버러지들이!!

그리고 그것은 다른 쪽의 상황도 마찬가지.

“크와아아아앙!”

- 영락한 반쪽짜리가 감히!

“꾸어어어어어!”

꽈아아앙!

육체파 악마급 둘이 서로 충돌하는 곳.

우르르르르르릉.

쩌저적.

암흑 오러가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돌기둥이 거대한 사자의 앞발과 부딪치는 순간, 주변으로 퍼져 나간 그 충격의 여파만으로도 지면이 통째로 뒤집혔다.

그리고.

“꾸어어억!”

바닥을 구르며 밀려 나는 외팔이 거인.

분한 듯 외눈을 번뜩이며 다시금 암흑 오러를 끌어 올리지만, 이미 같은 패턴이 반복된 지 수십 번째였다.

“크르르르.”

- 역겹구나! 지성조차 잃어 가는 놈이, 어딜……!

콰아아아앙!

소리를 지르던 검은 사자의 금속 같은 갈기가 갑자기 사방으로 뻗어 나가더니, 측면에서 그를 향해 달려들던 마수들을 일제히 꿰뚫었다.

“끄륵!”

“끄르르르.”

그렇게 붉게 물든 눈의 마수들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 가며 틈을 만들면, 그 틈을 타 다시 거인이 돌기둥을 휘둘렀다.

“꾸어어어어!”

쾅!

- 빌어먹을.

이 역시 이미 수차례 반복되고 있는 패턴.

거대 검은 사자, 케뤽스(Cervix)는 외팔이 거인을 연신 밀어붙이면서도 주변의 잡다한 마수 떼들 때문에 끝장을 내진 못하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으니까.

그 옆에서는 또 다른 악마급 몬스터들이 각각 여섯 가지 색깔의 브레스와 한 줄기 진녹색 브레스를 쏘아 내며, 주변에 지독한 충격파와 독기를 뿌려 대고 있었다.

“크롸롸롸롸!”

- 이 되다 만 놈이!!

“그그그그그극.”

- 무시. 분노. 짜증. 욕망. 우울. 쾌감.

본래 지면을 파고들었다가 솟구치며 적을 농락해야 할 자이언트 웜, 이테르(Iter)가 지면 위에 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여섯 머리 도마뱀과 대치하고 있는 광경.

그 상황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주특기를 쓰는 게 아님에도 이테르는 각기 다른 정신파를 내뿜는 여섯 머리 도마뱀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놈을 몰아붙이기만 하면 다른 한편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들 때문에 상처가 조금씩 늘어 갔다.

물로 그 대가로 몬스터 군단의 숫자는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판세가 점점 불리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상태가 심각한 것은, 그들 중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검은 연기 형태의 거대 새, 벨로치타스(Velocitas)였다.

“끼야아아!”

- 이 반편이가!

“크르르르릉!”

- 뭐라는 거야? 내 한쪽 머리, 멀쩡했으면, 넌 벌써 끝.

기동성을 포기하고 자리를 지키는 길을 택한 벨로치타스는 자신과 비슷한 특성을 지닌 검은 안개 퓨마를 힘겹게 막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상처투성이인 그의 옆에서는 천 개의 눈이 회색 뿔 도마뱀, 라피스(Lapis)의 석화 브레스를 무효화하며 마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스으으으으.

- 다른 수법은 없는가, 옛것이여.

“키에엑!”

- 네놈?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냐!

스으으으.

- 글쎄…….

검붉은 마력과 회색빛 마력이 전장의 일각을 차지하며 서로 대치하는데, 전세는 점점 폭식의 장군들에게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가 그들 뒤쪽에 쓰러져 있는, 중상을 입은 두 동료를 지키기 위해 방어적인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까닭.

- 부하들을 끌고 왔어야 했나. 빌어먹을!

-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봤자…….

- 이게 다 변수 때문이다. 그 운명의 파편들, 내 저주에도 죽지 않았다.

- 죽이려 했단 말이냐! 그분이 아시면……!

- 지금 그게 문제……!

밀리는 분위기 속에서도 정신파를 나누며 서로 대치하는 폭식의 장군들.

내부에 분란이 일어난 것 같은 상황에도, 그들은 여전히 투지를 잃지 않은 채 의식을 잃은 등 뒤의 동료를 지키고 있었다.

수명을 유지하기 위해 긴 잠에 든 뒤로 주군을 따라 몇 번을 자고 깨어났는지 모를 그들이, 아득한 옛날부터 수없이 합을 맞춰 온 성과.

- 우리는 지지 않는다!

오래전 용사와 그 동료들에게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입고 영락했으면서도 여전히 합이 잘 맞는 ‘영역의 동조’는, 밀리는 전세 속에서도 그들의 힘을 한계까지 증폭시키며 끝까지 굳건함을 자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불리하다고 도망칠 필요는 없다.

- 곧 그분이 오신다.

자신의 권능과 함께 이 대미궁을 유지하는 마력의 근본마저 스스로 만들어 낸 자.

그 때문에 영지가 손상되었다고는 하나, 그 위대함의 일부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자.

잠시 영락하였다고는 하지만 언제고 다시 영광의 좌에 오를, 진정한 마계 대공.

격하된 격에도 불구하고 태생조차 남다른 존재이기에, 감히 언급하기 힘든 ‘위대한 분’이나 현재의 칠죄종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다 확신하는 강대한 포식자.

바로 그들의 주군이 오고 있는 것이다.

- 시간은 우리 편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적들 또한 그 생각을 짐작하고 있었다.

- 변수는?

- 심어 놨다.

커맨더와 천 개의 눈이 남몰래 은밀히 나눈 대화.

막막했던 상황을 유리하게 바꿔 놓은 외부의 것들이 또 한 번의 변수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며, 대미궁 태생의 가장 똑똑한 두 악마가 권능을 합쳤다.

지친 상태의 그것들은 그 암시를 피하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작고 하찮지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그것들은 곧.

- 우리의 무기가 될 것이다.

두 악마급 몬스터가 음습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 그 전에 저것들 먼저 정리해야 한다.

- 물론.

- 휘하의 모든 몬스터를 갈아 넣어라. 한 번 허물을 벗은 것들까지.

- 좋은 생각이다.

둘만의 미묘한 교감이 오간 직후.

“끼에에에에에!”

커맨더의 정신파가 그 어느 때보다 짙은 마력을 머금고 몬스터 군단에게 퍼졌다.

- 모두 생명력을 쥐어짜서 틈을 만들어라. 놈들의 숨통을 끊는다!!!

“캬아아아아!”

“크롸롸롸!”

“크와아앙!”

그에 각양각색의 몬스터들이 붉게 물든 눈을 일제히 희번덕거리며 기운을 증폭시키던 그때.

“갑자기 빨라졌어, 훨씬.”

멀리서 그 전장을 지켜보던 한 인간이 발밑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르르르르르르릉.

강렬한 진동과 함께 바닥에 뚫린 검은 구멍이 더욱더 넓어지면서, 그 안에서 거대한 세 쌍의 안광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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