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214화 (214/500)

214화. 마수들의 전장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은빛 바람.

그것이 가진 이질적이고 불쾌한 느낌에, 산양 머리에게 세뇌된 마물들의 시선마저 그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반응이 큰 것은 그 목표가 된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꾸어어어엉!”

- 마나!? 흐하하하!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이 네놈이로구나!

허공을 달려오는 타이니를 향해 하나밖에 없는 주먹을 내뻗는 거대 철갑 고릴라.

그 거대한 몸이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순간 주변에 작은 폭풍이 일었다. 주변에서 놈을 향해 달려들던 마수들이 일순간 주춤하며 물러설 정도로.

하지만.

‘움직임이 다 보인다, 고릴라!’

놈은 너무 큰 덩치 때문에 예비 동작을 숨기지 못했고.

파아아아아아앙!

검은 불꽃 같은 기운이 이글거리는 거대하고 긴 팔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후려칠 뿐이었다.

그리고 그 궤도를 살짝 피해 낸 은빛 바람이 일순간 노을빛에 뒤덮이더니, 그대로 놈의 머리를 강타했다.

꽈아아아아앙!

“캬아아악!”

우르르르릉

폭음에 이어지는 괴성. 그리고 사방으로 퍼지는 충격파.

하지만 정통으로 안면을 얻어맞은 고릴라의 얼굴은 충격에 일그러졌을지언정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궤도를 꺾은 탓에 힘을 완전히 집중시키지 못했다고 한들 작은 상처조차 없다니, 그야말로 상식 이상의 단단함이었다.

‘더럽게 튼튼하네.’

물론 애초에 순조로운 전투가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정령 합신으로 인해 강화된 육체는 분명 전생의 수준을 확실하게 뛰어넘었지만, ‘영역’의 효과를 상쇄하지 못하는 지금 그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녹턴도 없고…….’

거기다 상대는 거대 마수, 애초에 태생부터 인간과 차원이 다른 괴물인 데다 경지조차 자신보다 높았다.

‘하지만 제대로 한 방 먹일 수만 있으면.’

가능하다.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전생에 폭식의 장군들 역시 그러했으니까.

놈들을 처리한 그때의 방식 그대로.

‘타격을 누적시켜 확실한 틈을 만든다.’

타이니가 비틀거리는 거대 고릴라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리며 다시 워해머에 노을빛 오러를 응집시킬 때.

우우우웅.

“킁!”

쾅!

그 순간 고릴라의 콧바람과 함께 놈의 몸에서 검은 파동이 뿜어졌다.

“윽!?”

오러치고는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을 튕겨 내기에는 충분한 충격.

내팽개쳐진 타이니의 시야가 일순간 반전된 틈을 타, 그의 머리 위쪽으로 거대한 손바닥이 하늘을 뒤덮을 듯 덮쳐 오고 있었다.

물론 그대로 허공을 박찬 타이니의 몸은 그 궤도를 피해 다시금 놈의 뒤통수 쪽,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말 그대로 바람 같은 움직임.

‘다시!’

이내, 다시금 노을빛으로 달아오른 워해머가 이번에는 제대로 전력을 담아 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꽈아아아아아앙!

“캬아악!”

굉음과 함께 비틀거리는 거대 고릴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쿵.

- 이 벌레 같은 놈이!

고개를 숙인 고릴라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다시 사방으로 폭풍 같은 암흑 오러를 뿌렸다.

‘이것도 버텨!? 빌어먹을…….’

콰콰콰콰콰콰콰.

말 그대로 넘치는 마기를 변환시킨 암흑 오러가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새 노을빛 마나 대신 검은 구체를 두른 워해머의 주인은, 마치 암흑 오러의 폭풍 따윈 없다는 듯 그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아니, 오히려 그 오러를 흡수하며 돌진했다.

우우우.

‘좋아!’

놈의 마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단 한 순간의 흡수만으로도 꽤 많은 에너지가 워해머에 모여들었다.

‘아직 부족해. 하지만…….’

지금은 타이밍과 시간이 더 중요했다.

퍼버벙.

그의 발밑에서 연달아 터지는 폭음은 전생에도 급할 때만 사용했던 ‘폭렬 질주’가 공간 밟기의 능력에 더해진 결과였다.

다행히 정령 합신으로 강해진 육체는 사용할 때마다 다리가 반쯤 작살났던 그 다중 가속도 거뜬히 버텨 줬고, 곧 엄청난 속도를 만들어 냈다.

일순간 고릴라의 뒤통수에 접근한 그의 기척을 놈이 뒤늦게 알아챘을 정도로.

그렇게 가속된 시간 속에서 놈의 고개가 뒤로 천천히 돌아가는 기색이 보일 때.

‘지금!’

검은 기운을 띠다가 순간적으로 새하얗게 백열하며 빛을 뿜어내는 워해머.

그 위로 노을빛 오러가 덧씌워지며 상서로운 빛을 더했다.

“합!”

정령 합신 상태에서 온몸의 힘을 쥐어 짜낸 일격.

블랙홀이 흡수한 에너지가 조금 부족했음에도 충분한 파괴력의 노을빛 유성이 만들어졌다.

타이니식 전투 살법 3식. 유성 떨구기.

버언쩍!

꽈아아아아아아앙-----!!!!

충돌의 순간 터져 나온 굉음은 전장에 난무하던 모든 괴성과 비명을 일순간에 집어삼켰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콰콰콰.

“끼에에에!?”

“크롸!!!!”

우르르르르릉.

반 박자 늦게 이어진 충격파가 사방의 전투를 십수 초간 정지시키며, 모두의 시선이 그 충격파의 근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충격파를 만들어 낸 당사자, 비산하는 흙먼지 사이에서 허공을 밟고 서 있는 타이니는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퍼어어어어엉.

회색 흙먼지 사이로 드러난 괴물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지면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5m 크기로 ‘작아진’ 고릴라는 어떤 타격도 입지 않은 듯 보였다.

“끄어어엉!”

- 아찔했다, 인간. 역시 그분이 말씀하신 자답군.

짐승 같은 울음소리에 섞여 명료하게 전해지는 정신파에는 감탄과 비웃음, 모순되는 두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빗나가다니…….’

단순히 시선을 끄는 게 아니라 아예 끝장을 낼 생각이었다.

보통의 오러유저라면 오버리바운드로 인한 쇼크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끌어모은 것이니, 정령술로 인해 격이 오른 영혼력과 초월무구 아니무스가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힘을 압축한 일격이었다.

놈의 영역 효과로 위력이 감소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반드시 죽일 수 있게 휘두른 한 방.

그 일격이 빗나간 후유증은 컸다.

- 크르릉.

정령 합신이 흐트러지며 월랑의 모습이 다시 분리될 뻔했을 정도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망치거나 회피할 여력은 남겨 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아직 아냐. 조금만 더 집중.’

- 컹!

간신히 월랑을 달랜 타이니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애써 투지를 북돋웠다.

“크륵. 어쩐지 백작급 마족치고는 쓸데없이 너무 크다 싶었더니, 그게 권능이었나.”

놈은 그의 일격을 정면으로 막아 낸 것이 아니었다.

영역의 효과에 의해 유성 떨구기의 위력이 감소하는 그 짧은 순간, 놈이 덩치를 확 줄이는 바람에 타격이 허공에서 터져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빠른 육체의 변이가 가능하다면, 그건 잔재주라기보다 권능급 특성일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쿠엉!”

- 하찮은 것들을 청소할 때와 강자를 상대할 때가 같을 필요는 없지.

그의 마음을 읽은 듯 지껄이는 정신파는 둘째 치고, 작아진 놈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오러는 거대했을 때와는 밀도 자체가 달랐다.

아마도 육체의 강도 역시 비슷한 비율로 강화되었을 것이다. 마치 자신처럼.

“크륵. 이쪽이 본모습인가?”

“킁.”

- 그렇다, 인간.

그 대답에 타이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인간. 그 명확한 의미를 가진 ‘단어’가 정신파로 바로 전달이 된다는 것은.

‘나 말고 다른 인간을 만난 적이 있거나 알고 있다.’

이 대미궁에서?

설마 진짜 폭식의 장군이라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데, 순간적으로 다른 이상한 점이 뇌리를 스치며 섬뜩한 생각이 떠올랐다.

말에 담긴 감정이나 의지를 읽는 것만으로 이렇게 빠르게 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까지도 놈의 영역…….’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엄습하는 위기감.

“흡!”

황급히 허공을 박차자마자 그가 있던 공간이 암흑 오러에 뒤덮이며 터져 나갔다.

퍼어어어어엉!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에 나타난 고릴라가 그 흉악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히죽 웃었다.

“크르르!”

- 감이 좋군. 능력도 특이하고. 하지만…….

“꾸어엉!”

- 나도 비슷한 걸 할 줄 알지.

쾅!

검은 마기를 ‘밟고’ 돌진해 오는 고릴라의 모습에 일순간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마법도, 마기를 이용한 특별한 운신법도 아니다. 그저 영역을 ‘밟고’ 움직이는 기동.

그게 가능하단 건 단순히 영역의 기본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변이시키는 게 아닌, 개별의 특성까지 부여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했다.

즉, 영역의 진화.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후작급!? 느껴지는 힘은 분명 백작급 수준이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었지만, 놀랄 시간은 없었다.

- 그분이 오시기 전까지 나와 좀 놀아 보자, 인간!

한순간에 뒤바뀐 전세.

작아진 몸으로 허공을 질주하는 철갑 고릴라와의 술래잡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파바바바방.

쾅!

거대한 고릴라가 난동을 피울 때보다는 훨씬 소박해진 전투의 파공음.

하지만 형태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번개 같은 속도로 지상과 허공을 누비는 두 전사는, 그런 전장의 상황과 상관없이 자신들만의 치열함 속에서 맞붙고 있었다.

- 팔이 하나뿐이라는 것은, 확실히 불편하단 말이지.

파아아아앙!

표현과 달리, 가볍게 휘젓는 고릴라의 손길에 십여 미터 범위의 공간이 검게 물들며 충격이 퍼져 나갔고.

“끼에엑!”

놈의 뒤를 노리던 하피 다섯 개체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그 사이 워해머 끝에 만들어 낸 검은 구체로 적의 공격을 일부 흡수한 늑대인간은, 그 후유증을 떨쳐 내면서 이어지는 타격을 회피하느라 이를 갈고 있었다.

지금 타이니에게 팔이 어쩌구 하는 놈의 말은 그저 비웃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생명력도 상식을 초월하는 마족, 그중에서도 귀족급이 어찌 팔 하나를 재생 못 하겠는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놈이 일부러 스스로에게 핸디캡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런데 몇 번의 공방이 이어진 끝에,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영역의 진화는 분명 후작급의 권능이지만, 놈의 역량 자체는 명백히 후작급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저 팔은, 녹턴 같은 초월무구나 영혼살의 권능이 실린 타격을 처맞고 잘린 거야.’

일부러 재생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육체를 넘어 영혼에 새겨진 상처일 터.

그렇다면 이 상황도 납득할 수 있었다.

본래 후작급이었던 괴물이 그 상처로 인해 격이 떨어진 것.

대미궁 심부에 있던 마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앞서 놈이 정신파로 지껄이던 말과 현 상황이 합쳐지니 머릿속 한구석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캬오오!!”

- 고작 한 번 ‘한계’를 넘어선 놈이 ‘남작’급은 어렵지 않게 이겨 내겠구나. 정말 ‘운명’을 가져온 놈인가? 기대가 되는구나.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계. 남작. 운명.’

정신파로 전해지는 뜻이기는 하나, 놈은 그저 본능대로 살아가는 마수라면 알 수 없을 ‘문화적 개념’이 들어간 단어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쓰고 있었다.

‘확실히 대미궁에서 자란 마수가 아니야.’

스스로를 폭식의 장군이라 말하는 것들.

영혼에는 상처가 새겨진 데다 분명 어떠한 사회에 속해 있었다는 게 티가 나는 마수.

‘정말 마계 귀족이다.’

그렇다면…….

무언가 떠오를 듯한데, 더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크와아앙!”

- 더, 더 보여 보거라.

‘젠장.’

쉼 없이 몰아치는 놈의 공격을 피하고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바빴으니까.

‘힘을 너무 썼어.’

차라리 시선을 끄는 데 집중할 걸 그랬나 싶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게 확실한 기회로 보였었다.

그리고 이제 와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지금은 그저.

‘조금만 더. 더.’

놈의 공격을 블랙홀로 흡수해 가며, 다시 일격을 먹일 틈을 노릴 뿐.

‘제대로 맞추기만 하면 돼.’

이제 일격의 순수한 위력은 전생 못지않다. 아니, 블랙홀로 힘을 최대한 모은다면 그 이상을 보여 줄 수도 있다.

아직 모자란 경지 탓에 공간의 권능을 상쇄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백작급 마족 정도는 쳐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할 정도였으니까.

문제라면.

“쿠어어엉!”

- 더! 더 발악해 보거라! 네가 가진 운명(Karma)의 가능성을 더 보여 다오!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는 저 요란한 정신파는 둘째 치고, 그렇게 연신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공격을 퍼붓는 고릴라의 눈빛은 분명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흥분한 척하는 기만, 혹은 정말 흥분한 와중에도 최소한의 경계심을 놓지 않을 정도로 전투 경험이 많다는 뜻일 터였다.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몰아붙이면서도 빈틈을 전혀 보이지 않는 놈.

“캬아악!”

- 날파리 같은 것들.

그러면서도 사방에서 달려드는 비행 마물들까지 착실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우우웅.

- 컹!

‘안 돼! 조금만 더 참아, 월랑!’

타이니로선 슬슬 정령 합신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지고 있었다.

마치 오러유저가 지속적으로 오러를 방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니, 블랙홀로 흡수한 에너지 중 ‘소화’시킬 수 있는 일부의 힘으로는 간신히 시간을 연장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기회가 왔다.

- 마누스, 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끝내라. 아니면 내가 도와줄까?

비웃음 섞인 정신파.

“꾸어어엉!”

- 내가 장난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느냐, 아르스! 이놈이 그리 쉬운 놈이……!

왜인지 모르지만, 놈의 동료가 만들어 준 기회.

잠시간 놈의 주의가 다른 쪽으로 쏠린 그 틈.

순간을 순간으로 쪼갠 듯한 아주 짧은 시간.

퍼어어엉.

폭발 속성과 공간 밟기의 힘이 일순간 극대화하며 발휘되고, 수십 미터의 거리가 단숨에 압축되었다.

그리고.

우우우우웅.

충분히 힘을 머금은 워해머의 검은 구체가 다시금 새하얀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고.

“꾸……!!!”

- 빌어……!!!

그 위에 덧씌워진 노을빛이 이전보다 더욱 찬란해진 광채와 함께 철갑 고릴라의 몸통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