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대미궁의 주인 (2)
드드드드드.
미약하게 떨리는 바닥 위에서 정신을 차린 루나는 어느새 보랏빛을 되찾은 눈을 끔뻑이며 자신을 안고 있는 타이니를 올려다보았다.
“……이걸, 고쳤어?”
그 멍한 표정에 타이니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시는 예고도 없이 이런 무모한 짓은…….”
“역시! 내 동생, 대단해. 이런 회복술까지…….”
“아니, 그건 아닌데. 지금은 특이한 경우…….”
“대단해, 타이니!”
언제 죽어 갔었냐는 듯 그를 와락 끌어안고 등을 팡팡 치는 루나.
어이가 없었지만,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이내 너무 엉겨 붙는 루나를 억지로 떼어 낸 후, 그녀의 양어깨를 잡은 채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또 고치지는 못해. 앞으로는 절대 이런 짓 하지 마. 알겠지?”
그에 불퉁한 표정을 짓던 루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검은 눈을 보더니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 모습에 뭐라 위로라도, 아니 솔직히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랬다가는 언제고 또 저지르겠지.’
전생의 사신과 달리 인간미가 있는 것은 좋지만, 그게 도를 지나쳐 자신을 희생하는 데까지 가면 곤란하다.
‘누군가를 희생시켜서 얻을 위업 따위는 필요 없어. 절대로.’
특히나 ‘누나’를 잃는 일이라면 정말이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으니, 타이니는 루나가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일 때까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가 너무 기죽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은 후에야 넌지시 말을 보탰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은 운이 좋았어. 전화위복이랄까. 몸도 강해졌을 테고.”
“전화, 뭐?”
“불행이 복이 되었다고. 한번 점검해 봐.”
타이니가 어깨를 두드리며 손짓하자, 어리둥절해하던 루나가 슬그머니 일어나 몸을 움직여 보기 시작했다.
“어……?”
중상을 입은 직후라 조심스럽기만 하던 움직임은 이내 점점 빨라지더니, 곧 그림자조차 잘 보이지 않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오……!
마치 회색빛 광장 위에 검은 선이 죽죽 그어지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루나의 목소리에서 들뜬 마음이 느껴졌다.
타이니가 보기에도 그럴 만한 일이었다.
확실히 움직임은 3할 이상 빨라진 듯하고, 내구력 역시 그 정도는 올라갔을 것이다.
‘경험이나 숙련도는 몰라도, 이제 기본적인 스펙은 전생의 사신보다 낫겠어.’
다행스럽기도 하고 안심도 되어서 슬쩍 미소가 나오는데, 그 순간 다시 슥 하고 타이니의 눈앞에 나타난 루나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흥분한 듯 물었다.
“이, 이거, 어떻게?”
“잘. 우연이야. 더는 불가능해. 그러니 이젠 정말 무리하지 마.”
불가능하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초인의 경지를 넘어섰으면서도 다른 특성을 얻으며 육체의 힘은 제자리걸음이었던 루나가, 마기에 본능적인 거부 반응도 하지 못할 정도로 중상을 입은 상황.
거기에 생명력을 쥐어짜서 죽어 본 적 있는 타이니가 세상에 다시 없을 마나 감응력에 정령의 권능까지 더해서 그 상태를 조율해 낸 것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세세한 설명까지 더해 줬는데, 루나는 자신의 무모함을 반성하긴커녕 어쩐지 감동한 듯했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아니, 위해서가 아니라…….
아니, 위해서 한 게 맞지. 그래도…….
‘하…….’
할 말이 많았지만, 루나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그냥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앞으론 조심해.”
“응!”
활기찬 대답에 절로 웃음이 나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히죽 웃으며 그 손길을 받아들이던 루나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근데, 우리 이제, 어떻게 해?”
“어? 아……!”
그렇게 눈앞의 위기가 지나고 나서야 타이니는 지난 전장의 마지막 순간과 대미궁의 변화를 떠올렸다.
* * *
우르르릉.
“일단 무슨 심각한 변화가 생긴 건 확실한데.”
“가장, 간단한 방법은, 우리는 이대로, 밖으로, 나가는 거야.”
“그렇지…….”
그래. 그러면 된다.
‘전생에 내가 왔을 때도, 마수병단이 강림할 때도 결국 대미궁의 변화는 없었어.’
그러니까 그냥 정복을 포기하고 나가면 된다.
녹턴을 못 가져가는 건 조금 아쉽지만, 놈이 여전한 걸 알았으니 나중에라도 다시 와서 찾으면 된다.
자신도, 루나도 오러 각성이라는 소기의 목표는 기대치 이상으로 충족했다.
거기다 자신은 정령술 7단계까지 도달했으니, 더 성장했을 미래에 다시 온다면 놈들을 잡는 게 지금보다 확연히 쉬울 터.
굳이 미지의 위험을 마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릴까.’
지저의 울림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전생에 없던 일이 현생에 벌어지는 것은 이미 몇 번이고 봐 왔다.
물론 대미궁의 사건은 자신이 미래를 바꾼 바깥세상의 일과 상관있을 리가 없지만, 왠지 이 마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는 체했다가는 큰 후환이 남을 것 같았다.
“혹시 또, 그 녹턴, 때문에?”
“아니야!”
루나가 미심쩍은 듯 물었지만, 정말 녹턴 때문은 아니었다.
마지막에 들었던 산양 머리의 영파만 해도.
- ‘괴물’이 움직였다!!!!
‘악마급 몬스터들이 괴물이라 칭하는 존재면…….’
어쩌면 마계 대공급 이상의 괴물이 지저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런 놈이 전생에 왜 안 움직였는지, 대미궁의 악마급 마물들이 왜 놈에게 저항하려고 하는 건지.
의문점이 많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추측할 수 있는 사실도 있었다.
- 우리의 합을 시험할 만한 제물…….
- 연습, 의미 없다!!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영파들의 의미가 이제야 비로소 한 방향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바로 8단계, 악마급 마물들이 뭉쳐서 마계 대공급 마물에 맞서는 전투.
‘어쩌면 전생에 그 산양 머리의 왼팔도, 도마뱀의 머리 3개도 놈과 싸우다 잃은 걸지도.’
아니,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 외에는 상상이 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전생에는 결국 그놈들이 이겼다는 건가?
그 사실이 약간의 혼란을 주었다.
정말 추측대로 마계 대공급 괴물이 움직인 거라면, 저번에 보았던 그 괴물의 군세로는 절대 이기지 못한다.
악마급 몬스터가 다섯이나 있었으니 분명 강력한 조합이지만 놈들은 잘해야 8단계의 초입이나 숙련 수준이었으니, 전생의 10대 기사의 합에는 미치지 못했으니까.
그건 놈들이 거느린 초월급 마물들을 모두 동원해도 결코 좁힐 수 없는 차이였다.
“……그게 좀 이상해.”
“그럼, 마계 대공급이, 아니야?”
“어……?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그 괴물이 9단계에 발만 걸쳤거나, 더 희망적으로 보면 8단계일 수도 있었다.
8단계라고 다 같은 수준은 아니니까.
‘공간의 권능, 그 정도에도 차이가 있지.’
그 차이는 워낙 커서, 8단계의 극에 이른 인간이라면 초입의 거대 마물 정도는 어렵지 않게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굳이 단계를 나누자면 ‘영역’이 발현, 확장, 변이, 진화하는 특성에 따라 구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기준으로는 초입, 숙련, 달인, 극의로 구별되고, 마족 기준으로는 남작, 자작, 백작, 후작의 계급으로 나뉜다.
만약 후작급의 거대 마물이라면, 놈들에게도 괴물이라 불릴 만했다.
하지만 정말 그 정도라면 희망이 생긴다. 한 끗 차이라 해도 마계 대공급, 9단계와는 격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상대가 마계 대공급이라면 악마급 마물들이 도망치면 도망쳤지, 고작 그 정도 뭉쳐서 대항할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희망적인 추론에 점점 힘이 실렸다.
‘글러터니급은 아니야.’
그렇다면 지금은 꼭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
거기에 생각이 닿는 순간 타이니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거 잘하면 어부지리를 노릴 수도 있겠는데?”
“어부, 뭐?”
“둘이 싸우는 걸 지켜보다가 살아남는 쪽 뒤통수치는 거 말이야.”
“양아치 짓……?”
컥.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거 따질 상황이 아니잖아. 지하에 뭐가 있는지 확인은 해야겠어. 만약 마계 대공급이 아니라면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동의.”
사실 고작 오러유저 수준의 둘이 할 만한 말은 아니지만, 그들에겐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물론 예상대로 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다만 어부지리를 노리자면,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산양 머리, 걸려…….”
“그래. 그 녀석이 생각이 있다면 분명 후방도 경계하고 있을 거야.”
원거리 정신파를 보내다가 당한 경험이 있으니, 이번엔 직접 보내지 않더라도 말이다.
애초에 층계를 넘어서 존재를 감지하고 뜻을 전하는 것도 가능한 놈이니.
“그럼,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사라졌다가 다시 와야지.”
“음?”
“위층으로 올라갔다가, 존재감을 감추고 바로 다시 내려오자고. 통로는 그 녀석이 공들여 살핀다고 해도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을 테니까.”
대미궁은 신화시대의 흔적.
통로를 통해서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그 구조는, 단순히 층계를 오르내린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바닥을 한참 뚫어도 아래층은 나오지 않으며, 오직 정해진 통로로만 갈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래. 마치 그때처럼…….’
단순히 결계로 가렸다기에는 그 존재감과 덩치가 지나치게 컸지만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아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하던 또 다른 신화의 파편. 세계수처럼.
하지만 그의 주장에 루나가 바로 태클을 걸었다.
“난, 가능, 그런데, 동생은? 혹시 그림자의 법, 배울래?”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은 이참에 잘됐다 싶어 하는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 주었지만, 타이니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젠 가능해. 적어도 원거리 탐지로는 알 수 없을 정도로는.”
“……??”
“보면 알아.”
타이니는 그렇게 웃으며 장담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장담을 현실로 보여 줬다.
* * *
저벅저벅.
48층으로 올라가는 통로.
그 안에서 다시 내려오는 두 그림자의 모습은 특이하기만 했다.
그중 비교적 가느다란 체형의 인영은 검은 그림자를 두른 듯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탓에 그 얼굴을 확인하기 힘들었으며, 다른 한쪽은 반투명하게 변한 몸으로 발걸음 소리만 내며 걷고 있었다.
자신들도 그것이 신기한지 검은 그림자의 인영, 루나가 반투명하게 변한 타이니의 몸을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렸다.
우우웅.
“……마나를 쓴 채로 닿으면 바로 티 난다니까.”
- 이게, 반정령화?
그림자 속에서 묘하게 울리는 루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타이니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능이 실리지 않은 공격은 그냥 통과시키는 수법이야. 정령술의 7단계 권능 중 하나지. 강자들과의 전투에서야 큰 의미 없지만, 이런 경우에는 꽤 유용하지.”
반정령화란 정령의 본질을 이해하여 몸과 거기에 닿은 일부 물질을 반쯤 마나화시키는 권능이었다.
그와 같은 원리로 구현되는 ‘정령 합신’과는 완전히 반대의 효과를 내는 능력.
다른 이능력자들에 비해 본체가 약한 초인급 정령술사가, 자연 속에서 몸을 숨기거나 수련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그래도 원거리 탐지 마법을 흘려 내기에는 딱이지. 뭐, 그놈이 마법을 쓰는 건 아니지만.”
- ……신기해.
그림자 인간이 반투명 인간한테 할 소리냐.
“지금 네 모습이 더 신기하거든?”
타이니가 루나의 반응을 일축하며 헛웃음을 짓는데.
우르르르릉.
바닥에서 다시금 거센 진동이 전해졌다.
“그새 더 커졌다. 빨리 움직이자.”
- 응.
“예상대로라면 놈들은 그 자리에 진을 치고 있을 거야. 아니더라도 크게 움직이지는 않았겠지.”
- 동의.
혹시나 들킬까 월랑을 소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더 큰 힘을 낼 수 있는 정령 합신 역시 지금은 안 쓰는 것이 나았다.
“그럼 달려 보자고.”
타이니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반투명한 육체 그대로 다시 대미궁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가까운 위치에서 적들이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 *
고오오오오오오오.
마치 대미궁 바닥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한 광경.
- 구멍 못 뚫는다며?
‘쉿.’
나도 모른다. 묻지 마라.
‘저게 뭐야 대체?’
타이니는 손짓으로 루나의 말을 막은 채, 광장 한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구멍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산양 머리와 악마급 몬스터들의 군세.
아래층에서 다른 몬스터들을 더 끌어모았는지, 그들의 숫자는 고작 며칠 사이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천여 마리도 되지 않던 무리가 이젠 지평선을 까맣게 물들이고 있을 정도였으니, 무리의 대다수가 최소 5단계 수준의 괴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몬스터 군단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그래, 많아. 그 사이에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끌어모은 모양이야. 으음…….”
타이니 역시 침음성을 흘리며 상황을 지켜볼 정도로.
‘이거 이 녀석들뿐이라면, 무조건 튀어야 할 상황인데…….’
바깥세상에 튀어나온다면 바로 대륙 전체에 비상이 걸릴 만한 괴물의 군대였다.
원래대로라면 서로 싸우기 바빠야 할 마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마…….
‘확실히 저 산양 머리 놈은 위험해.’
타이니가 그렇게 산양 머리와 놈들의 군세를 살피며 안색을 굳히던 그때, 변화가 시작되었다.
- 호응하지 않았던 자들, 어리석은 지배자들이 거의 다 먹혔다.
- 가까워진다.
- 멀지 않았다.
악마급 몬스터들의 정신파가 하나둘씩 이어지다가.
- 가만……? 다른 기척이?
당혹감이 실린 산양 머리의 정신파가 울려 퍼지고, 그에 기겁을 한 타이니와 루나가 잔뜩 몸을 웅크린 순간.
검은 구덩이 안에서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