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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210화 (210/500)

210화. 대미궁의 주인 (1)

- 오랜만에, 다시 때가 왔다.

그그그그그그극.

오래전 ‘그분’의 권능에 더해, 타락한 세계수를 지지대 삼아 자신의 영혼 일부까지 바치며 만들어 낸 자신의 둥지.

그 천장이 주인의 의지를 받듦과 동시에 ‘법칙’을 뒤틀어 ‘그’의 거체가 날아오를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그’의 세 머리에 달린 세 쌍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이 둥지를 만들기 위해 바쳐진 영혼. 그 탓에 영락해 버린 격.

그 상태로 다시 또 수천 년의 세월을 버티기 위해 잘 익은 영혼들을 수확할 때가 온 것이다.

“그오오오오오오오!”

“크르르르르르.”

“크롸롸롸롸롸롸.”

쿵.

쿵. 쿵.

‘그’의 거체가 서서히 기지개를 켬에 따라 대미궁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정한 미궁의 주인. 영락했다고는 하나 종의 한계를 두 번 초월한 귀족급들 중에서도 최상, 후작급의 격은 유지하고 있는 ‘그’였다.

거기다 태생부터 남다른 ‘그’의 육체는 마족 중에서도 월등한 무력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으니, 과거의 영광이 아니라 현재 가진 힘만으로도 최강의 마수라 불릴 만했다.

- 이런 육체가 있기에 내가 남겨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분이 강림하실 그때가 오면, ‘그’는 잃어버린 격을 되찾고 8번째 대공이 되어 ‘균형’을 깰 것이다.

사실 격을 잃으며 퇴화한 지능 때문에 ‘균형’이 무엇인지, 왜 자신이 다시 격을 찾을 수 있다 확신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가 폭식의 때마다 그렇게 되뇌며 자신의 사명을 각인하고 있을 뿐.

그때.

- 또 ‘이변’입니다.

- 중층의 계층주들이 한데 모여 있습니다.

-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그’와 함께 지상에 남겨진, 영혼이 연결된 오래된 수족들이 영파를 전해 왔다.

70층에서 76층까지, 혹시나 있을지 모를 침입자를 막아 내기 위한 방패이자 그날을 대비하기 위한 자신의 진짜 전력.

스스로의 영혼을 깎아 가며 자신과 영혼의 계약을 맺고, 그날이 올 때까지 생을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잠들어 있다가, 가끔 이렇게 변수가 발생할 때만 깨어나는 충실한 수하들.

그런 그들의 걱정이 영락한 자신의 처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 그러거라.

애초에 자존심을 챙기려 했다면, 이렇게 영락하여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소멸을 택했을 것이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 먹이들과 드잡이질 하는 것도 이젠 지친다.

몰락한 자신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는 것 같았으니까.

이미 얼마인지 모를 세월의 부침 속에 지쳐 가는 것은 ‘그’로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이변에는 수없이 반복된 변수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 운명(Karma)의 냄새가 묻은 것들이 안에 들어왔다.

영락하였다곤 하나 한때는 영혼의 힘을 다루고 운명의 힘을 느끼던 ‘그’였기에 알 수 있는 일.

그래서 일부러 예정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난 것이기도 했다.

덕분에 능력에 약간의 제한이 더 걸리기는 했지만 감수할 만한 일이었다.

덕분에 먹이들이 그 변수를 삼키려는 것을 멈추었으니까.

- ‘징조’일지 확인해 볼 것이다.

그 말에 ‘그’와 영혼이 연결된 일곱 부하의 정신파가 제각기 들끓기 시작했다.

- 예!?

- 그럼 드디어……!

- 그때가……!

그러나.

- 아직 확신할 수 없다.

‘그’는 부하들의 설레발을 단호하게 끊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긴 세월 동안, 이번에는 혹시나 하며 기대했던 상황이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 큰 기대는 깊은 실망을 가져온다.

- 그저 퇴화를 늦춰 줄 또 하나의 별미일 수도 있으니, 확인 후에 기뻐해도 늦지 않다.

지성이 퇴화했다고는 하나 긴 세월이 가져다준 인내심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렇게 뜻을 전하는 ‘그’의 세 쌍의 눈동자는 어느새 더욱 짙은 붉은색으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이내, 열려 버린 천장을 향해 ‘그’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공을 누비던 거대한 날개가 퇴화해 버린 것이 유난히 아쉬웠다.

그러니 일단.

- 힘을 회복하기 위해, 아래층부터 수확하며 올라간다. 뭉치지 않은 것들부터.

그 명령에 옛 수하들이 ‘그’의 옛 호칭을 그대로 부르며 복종의 뜻을 전해 왔다.

- 대공의 뜻대로!

‘그’가 상승하는 속도에 맞춰 천장의 균열도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 * *

대미궁답지 않게 주변에 몬스터 한 마리가 없이 조용하기만 한 통로.

두두두두두.

회색빛 동굴, 아니 들판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드넓은 공간을 바람처럼 질주하는 은빛 늑대가 있었다.

그 늑대는 방금 빠져나온 곳에서부터 거리가 충분히 멀어졌다 생각되는 순간 그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수고했어, 월랑. 조금만 더 경계 부탁해…….”

“컹!”

창백한 안색으로 그리 말한 검은 머리 남자, 타이니가 기절한 루나를 안고 늑대의 등에서 내려섰다.

하지만.

- 우르르르릉.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으로 인해 미약하게 떨리는 바닥이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자, 이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비, 빌어먹을…….”

고작 그 여진조차 버티고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 버린 것이다.

물론 이곳이 대미궁인 이상 이것이 단순한 지진일 리는 없었지만, 타이니는 그 이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쿨럭.

“루나!”

자신이 쓰러진 충격 탓에 또다시 피를 토해 내는 루나의 상세가 심상치가 않았으니까.

우우웅.

타이니는 다시 바닥나 버린 마나를 황급히 긁어모아 엉망으로 꼬여 버린 그녀의 몸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전투 전 동족 강화와 산양 머리와의 일전, 거기다 녹턴을 억지로 움직이는 일까지 해낸 그였으니, 강화된 영혼력과 마나바디가 아니었다면 이미 오버리바운드의 후유증으로 사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몸으로 거듭 마나를 쥐어짜고 나니 이젠 일어설 힘조차 남지 않았지만, 루나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정신 차려!”

“괘, 괜찮…….”

창백한 안색으로 억지로 웃어 보이지만, 그녀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불규칙한 심장 박동과 무너진 생체 리듬, 그리고 급속도로 떨어져 가는 체온이 그녀가 어떤 수법을 썼는지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생명력을 끌어다 썼어. 이런 바보 같은……!’

애초에 악마급 몬스터의 추적을 받으면서 초월급의 계층주를 격살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초인급에 불과한 그녀가 방법이 있다고 했을 때부터 이런 사태를 짐작했어야 했는데…….

‘생명의 근원이 무너졌다.’

지금 루나는 경지를 초월한 힘을 쓰려 무리한 탓에 그 기본이 되는 육체, 즉 생명력이 닳아 버린 상태.

애초에 그런 식으로 힘을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녀의 재능을 방증하는 것이었지만, 교황급 성직자가 옆에 있는 게 아닌 이상에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녀를 치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우웅.

“버티라고!”

다만, 루나 역시 자신처럼 마나 운용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이 있기에 이대로 상태를 유지할 수는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지친 둘 중 한 명이라도 의식을 잃는다면, 루나는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안고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가 지금 지저에서 일어나는 이변에 신경을 쏟지 못하는 이유였다.

“차라리 내가, 내가 하라고 하지! 왜……!?”

애초에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못난 말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루나가 다시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나. 위험한 일……. 내가 해…….”

여전히 이해 못 할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만 그 바보 같은 소리가 타이니의 결심을 굳혀 주었다.

소중한 동료가, 아니 ‘혈육’이 이대로 폐인이 되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모험을 할 수밖에.’

입술을 질끈 깨문 타이니가 감각을 최대한 집중해 주변의 마기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아파도 참아.”

“뭐?”

우우우웅.

평상시에 쓰는 힘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한 기운이지만, 지금은 이것을 다시 마나로 치환할 여유도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됐다.

지금 기댈 수 있는 것은.

“타이……니? 끅!?”

우드드득.

“참아!”

마나에는 없는, 마기가 가진 신체 변형 효과뿐이니까.

“끄읍…….”

창백하던 루나의 얼굴에 혈액이 급격하게 몰리면서 낯빛이 눈에 띄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결코 좋은 상태로 보이지 않았지만, 당하는 이도 그 상황을 유도한 이도 더 이상 부언은 하지 않았다. 루나는 타이니에 대한 믿음으로, 타이니는 오직 번뜩이는 영감에 대한 직감 하나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우우웅.

우드득.

‘충분히 가능해.’

마계의 기운인 마기는 정상적인 중간계 생물에게는 독이 될 뿐이며, 그것에 적응해서 신체의 변이를 겪게 되면 마물이 되고 만다. 강화된 신체와 흉포한 성정을 가진, 중간계의 모든 것에 적의를 드러내는 파괴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타이니는 그녀를 마물로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

‘그중에서 신체 강화 효과 하나만 적용시킨다. 딱 거기까지만.’

마학적으로 무지한 데다 평소 남들에게 무식하다 평가받는 이가 직감으로 벌이는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지만, 타이니는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루나가 겪고 있는 부작용은 그 역시 잘 아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이런 식으로 죽었으니까.’

전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단순히 이 정도 부작용으로 그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죽을 각오로 육체를 쥐어짰었다.

그리고 그렇게 쥐어짠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

‘거기다 현생에서는 내 육체를 강화해 보기도 했지.’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지금 루나는 그때의 자신 정도로 망가지지 않았으니까.

‘그릇이 아예 박살이 난 게 아니라 살짝 부서진 거야.’

비록 그 보수 작업에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소재가 쓰여 그릇을 변형시키더라도, 내용물만 온전히 담을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발상으로 벌이는 일이었지만, 그 효과는 바로 눈에 보이고 있었다.

우드드득.

“끅……!”

“정신 집중해! 마기가 머리로 스며들면 절대 안 돼!”

“알았, 끅, 어.”

전체가 미세하게 조금씩 어긋나며 망가져 가던 육체가, 강제 변이 작용에 의해 다시 하나의 리듬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투드드둑.

우득, 따다닥.

한층 더 난폭하고, 파괴적인 리듬.

타이니가 유도하는 방향을 따라서 강인하고 질기게 변해 가는 육체.

하지만 그 과정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창백하기만 하던 루나의 피부가 점차 얼굴까지 검게 물들더니, 자수정 같던 눈동자에도 붉은색이 진해지기 시작했다.

“끄, 끄륵.”

피가 나게 깨문 입술 사이로 거품이 새어 나오고, 이내 루나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히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어 간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만약 이 상황에서 의식을 잃는다면.

‘마인이 된다.’

그것도 초인급 마인이 되어 버릴 터.

물론 루나의 자아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 후유증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상황.

‘안 돼……!’

절로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 컹!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영혼으로 울리는 월랑의 울음소리가 그의 정신을 깨웠다.

이내 녀석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제시했다.

정확히는, 이제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 주는 것이었다.

- 컹! 컹!

“아……!”

월랑이 원래 가지고 있지 않던 압축 강화 능력을 깨달으면서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진화의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소리다.

그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서 정령의 현신 상태를 유지하는 동시에 타인의 성질을 근본부터 바꾸려는 시도를 하는 와중이었으니, 인간과 정령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지불식간 ‘아주 조금’ 깊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준비가 된 인간과 정령에게는 그 ‘아주 조금’의 깨달음만으로도 충분했다.

단 반걸음만 남겨 놓았던, 정령술로도 초인의 경지에 이르는 길이 환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웅.

다시금 눈앞에 붉은 빛과 노란빛이 섞이며 새롭게 노을빛 마나를 만들어 내는 순간.

어깨 갑옷, 아니무스가 황홀한 서광을 토해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아우우우우우!”

“우아아아아!”

타이니는 영혼이 승격하는 기쁨 속에서 자신이 정령, 월랑의 힘을 온전히 이해하고 체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순간적으로 경지가 상승하며 오버리바운드의 후유증이 사라졌고, 바닥났던 마나가 한순간에 가득 차올랐다.

아니무스의 효과로 인해 육체 또한 한순간에 월등하게 강해졌다.

영혼과 육신의 강화, 존재 자체의 격이 올라가는 기쁨, 그 황홀한 희열을 길게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좋아. 이거면……!’

‘반정령화’, ‘정령 합신’ 등 에스티나에게 들었던 초인급 정령술사가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일어나! 루나!!”

그의 목소리에 어린 노을빛 마나가 지금 이 순간 체화한 월랑의 세 번째 능력 ‘동족 강화-인간’의 권능으로 변해 루나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같은 계통의 어떤 마법보다 효율적인 정령의 권능.

그 권능이 타이니의 모든 마나를 한 번에 싣고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된 것이다.

눈이 멀 것처럼 눈부신 노을빛이 회색빛 공간을 가득 메운 순간.

그의 마나가 멀어져 가던 루나의 의식을 일깨우고, 생명력을 보강하고, 변이되던 육체의 진행을 멈추고 강화했다.

그리고 이내.

“끄……응?”

검게 변색되었던 피부마저 본래의 색으로 돌아온 루나가 작게 신음하며 눈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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