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악마급 몬스터
황궁에서 검제와 황제, 클로이가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각.
검제가 무모함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게 만든 당사자는, 전혀 다른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내가, 무모하다, 했잖아!”
“말로 힘 빼지 말고 뛰어!”
다다다다.
파바바바박.
대미궁의 회색 동굴 안에 검은 번개가 친 듯 벼락처럼 내달리는 일행.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내달리는 와중에도 타이니는 멀리서 느껴지는 흉포한 기운에 감각을 집중했다.
뒤쪽 아득한 곳에서부터 전해지는 거대한 존재감들 덕에, 강력한 괴물들이 자신들을 타깃 삼아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 발버둥 쳐 봐라, 하찮은 것. 그래 봤자 벗어날 수 없다.
내내 신경을 거스르는 저 정신파의 주인 덕분에 조금 상황이 바뀌었다.
‘어라?’
지금의 타이니는 거듭된 정령술의 발전에 아니무스의 효과까지 더해서 영혼이 크게 성장한 상태. 거기에 마기와 마나의 치환, 즉 에너지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으며, 월랑의 유니크한 능력 소울 사이트까지 체화한 상황이었다.
그 결과, 안 그래도 인간을 벗어난 수준으로 평가받던 그의 감응력은 이제 명실공히 초월의 영역에 들어섰는데.
그 감각이 직감적으로 기발한 가능성의 순간을 포착했다.
“잠깐만! 조용히!”
“왜!?”
그런 그가 계속 달리면서도 감각을 집중하자, 사방에서 찌릿찌릿하게 엄습해 오는 정신파의 형태가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거 잘하면…….’
좀 더 감각을 집중하자, 그 영파를 타고 그의 의식 일부가 순식간에 ‘먼 거리’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보였다. 생각보다 먼 거리에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괴물의 군세가.
‘……된다!’
우우우우우.
강력한 정신파를 뿌리는 산양 머리 괴물을 비롯한 적들의 정체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게 될 줄이야.’
타이니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감탄하면서도 정신을 집중해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읽어 내기 위해 애썼다.
그에 따라 좀 더 명확히 드러난 괴물의 군세에, 그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역소환되기 직전 월랑의 감각이 전해 준 정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것은 위안이라기보다 좀 더 현실적인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또 하나 결정적으로 다른 면이 있었다. 그것도 나쁜 쪽으로.
놈들의 모습에, 월랑의 눈으로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세세한 차이가 있었다.
‘멀쩡해. 젠장.’
먼저 산양 머리는 왼팔이 없었던 전생과는 다르게 몸뚱이가 온전해 보였고, 그 옆에 있는 거대한 다두 도마뱀 역시 머리가 3개가 아니라 6개였다.
거기다 그놈들의 앞뒤로, 그 못지않은 강력한 존재감을 뿌리는 것들도 있었다.
머리 둘 달린 괴조와 뿔 달린 외눈박이 거인, 그리고 반대로 온몸에 눈만 달린 구체형 괴물과 어둠으로 뭉쳐진 듯 새까만 퓨마 형태의 거대한 몬스터.
모두가 처음 보는 놈들이지만 확실하게 8단계, 악마급에 도달한 괴물들로 느껴졌다.
특이한 점이라면, 괴조는 멀쩡한 날개 위에 달린 다른 날개 한 쌍이 반쪽은 잡아 뜯긴 것처럼 흔적만 남아 있고, 외눈박이 거인은 전생의 산양 머리처럼 왼팔이 없다는 것.
그리고 둥둥 떠다니는 구체형 괴물은 그 수많은 눈 사이사이에 움푹 팬 듯한 상처가 있었고, 거대한 퓨마 같은 몬스터도 체형에 비해 머리가 한쪽으로 쏠려 있어서 마치 반대쪽에 머리 하나가 더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게 뭐지?’
적수가 없을 것 같은 악마급 괴물들이 대체 왜 저런 상처를 달고 있는가?
마치 전생에 만났던 저 다두 도마뱀과 산양 머리 같지 않던가.
‘서로 싸우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랬다면 협력할 리가 없다. 몬스터는 원한을 잊지 않으니까.
‘분명 뭔가가 있는데…….’
정보가 없으니 그게 무엇일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당장은 알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지상에 나타난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재앙이 될 만한 몬스터가 무려 여섯.
그리고 그들보다 조금 못한 기세를 풍기는 소형 몬스터 여섯이, 각각의 군세를 이끌고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작은 인간형 개체로 보이는 놈을 포함해, 하나같이 주변의 괴물들보다 훨씬 작아 보이는 놈들.
‘전부 7단계 중에서도 꽤 강한 편, 아니 7.5단계라고 해야 하나?’
느껴지는 기세에 비해 저렇게 덩치가 작다면, 그리고 각기 백여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를 분란 없이 이끌고 있다면.
‘전부 지휘관 스타일. 빌어먹을!’
심지어 초월급 마수도 몇 마리씩 이끌고 있으니, 앞서가는 산양 머리의 열화판이라고 봐도 될 듯했다.
적의 정보를 대략적이나마 알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 탓에 압박감은 더욱 무거워지기만 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그나마 다행인 점이 하나 있었다.
‘멀어.’
꾸준하게 느껴진 근거리의 압박감이 허상이었다.
무슨 수법을 쓴 건지는 몰라도 존재감을 부풀려서 심리적으로 몰아붙이려는 듯했지만, 실제 놈들과의 거리는 상당했다.
정신파에 담긴 의식과 본체 사이의 거리도 얼추 짐작이 가고 있었으니.
‘대략 월랑의 전력 질주로 두 시간 정도 거리.’
말이 두 시간이지, 그 정도면 보통 기마가 한나절 내내 전력 질주해야 겨우 다다를 수 있을 거리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는 건 불가능하니, 사실상 일반적인 기마로는 하루 이상 걸린다고 봐야 했다.
그 거리라면, 뭉쳐진 괴물의 군대가 빠른 시간 내에 자신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 없을까?’
타이니가 머리를 굴리던 그 순간.
- 감히!!!
“끼에에에에에!”
갑자기 산양 머리가 놈의 정신파 사이에 끼어들어 있던 그의 의식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눈이 그를 직시하는 순간.
- 생각보다, 더, 위험한 놈이구나.
- 하찮은데, 위험한 놈.
- 이상, 이상하다.
그 정신파와 함께 타이니의 의식이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여기까지인가.’
타이니는 이를 악물며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애썼다.
그리고 점차 멀어지는 의식을 느끼던 마지막 순간, 놈들 중 하나가 갑자기 속도를 높여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눈으로, 아니 감각으로 인식했다.
“컥, 쿨럭.”
우당탕탕.
“타이니!?”
달리다 말고 갑자기 피를 토하며 나뒹구는 타이니의 모습에 루나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타이니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루나를 달랬다.
“괘, 괜찮아! 일단 멈추자!”
“무, 무슨, 일이야?”
캬악. 퉤.
“후.”
입 안에 남은 핏물을 뱉으며 산양 머리가 남긴 충격의 여파를 털어 낸 타이니가 이내 자신이 본 것을 루나에게 말했다.
특히 마지막에 본 것.
무식한 괴물의 독단인 건지 아니면 그놈이 정찰병 역할을 맡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급속도로 가까워져 오는 것을 보니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속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분명 한 놈이 튀어나왔어. 그 새처럼 생긴 놈 같아!”
“그럼……?”
“그놈 먼저 잡고 가자.”
“좋아.”
타이니의 검은 눈에 살기가 번지는 순간, 그가 뱉어 낸 핏줄기를 보던 루나 역시 살기를 피워 올렸다.
고작(?) 오러유저 둘이서 상위의 몬스터를 잡아 죽이겠다는 얘기였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나건 루나건, 일격만 제대로 맞추면 죽일 수 있다.’
문제는 격상의 존재, 그것도 속도를 특기로 하는 적을 상대로 공격 타이밍을 맞추는 방법이다.
물론 전쟁에서건 개별 전투에서건 간에, 빠른 속도는 가장 유리한 무기임에 틀림없다.
전생의 사신이나 그녀가 기습해 죽였던 극속의 벤투스나, 둘 다 경지에 비해 압도적인 전투력을 가졌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달리 말하면, 바로 거기에 답이 있었다.
“속도가 특기라면, 다른 데에 분명 약점이 있어. 보통…….”
그때, 루나가 갑자기 손을 들어 말문을 막았다.
“왜?”
“뜻은 몰라도, 감정, 읽는다며? 그 산양 머리. 그럼 지금, 우리가, 싸우려는, 것도, 알 텐데?”
“아, 지금은 정신파를 그렇게까지 정교하게 뿌리지 않을 거야. 놈들도 조심하고 있을 테니.”
마지막 산양 머리에게서 느껴졌던 영파만으로도 놈의 심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전생에 네가 죽였던 벤투스 같은 경우는, 공격을 하기 직전에는 반드시 잠깐 멈춰 섰었거든. 그것 때문에 우리 중 반응 속도가 가장 느렸던 하이넨도 어느 정도 버티는 건 할 수 있었어.”
“그런 놈이, 왜 위협?”
“오러유저들 말고는 아무도 그 ‘잠깐’을 포착하지 못했거든. 그래서 우리 외에는 그냥 학살당했어. 특히 마도사들이.”
“아…….”
“그걸 네가 처리한 거고. 그리고 그때 네가 했던 말이…….”
“방어력도, 약하겠네.”
“그래. 그거야.”
최고의 속도는 분명 엄청난 무기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보통 인간만 해도 전속력으로 뛰고 있는 와중에 무기를 휘두르거나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경우 균형을 잃기 십상이다.
그냥 달리는 와중이라면 나뒹구는 수준에서 끝나겠지만, 만약 음속을 넘어가는 속도로 달리다가 균형을 잃는다면?
그대로 자기 자신이 박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속도 쪽으로 특성 개화를 한 초인이나 몬스터들은 반드시 움직임에 패턴이 있다.’
제어하기 위해 속도를 늦추면 애써 개화한 특성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니 최대 속도에서 특정 패턴을 반복해 스스로 익숙해 짐으로써 균형을 잃는 것을 방지해, 속도라는 무기를 제대로 살리는 것이다.
“그 패턴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의 공격을 때려 박는다.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놈들이 알아서 부딪치고 박살이 나는 거지. 물론 어렵겠지만.”
단순히 전투 중에 상대가 움직이는 패턴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그것을 떠나 다른 문제도 있었다.
‘도망가면 못 잡는다.’
아마 그래서 혼자 오는 것일 수도 있다.
벤투스도 수 차례의 격전 끝에 자신의 패턴이 읽혔다는 판단을 내린 순간 바로 튀었었다.
다른 10대 기사들이 도망치는 놈을 막지 못했을 때, 사신만이 그 그림자에 숨어 놈에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홀로 목숨을 걸고 일주일 동안 몸을 숨기고 있다가, 놈이 경계를 완전히 푸는 순간 참살하고 돌아왔었다.
그때 도망간 놈이 열이 받은 탓인지 곧장 본진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연합군을 습격하러 돌아다닌 것은 그야말로 우연.
그렇게 화풀이를 하던 놈이 복귀하기 직전에 경계를 풀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여긴 우리뿐이야. 지금 다가오는 놈이 싸우다가 자신이 불리하다고 판단해서 튄다면, 그땐 아마 바로 본진으로 갈 거야. 그걸 쫓아가면 너 죽어. 절대 따라붙지 마. 알겠지?”
“……응.”
대답하는 목소리가 영 미덥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한 실랑이나 벌일 때가 아니었다.
굳이 기감을 날카롭게 세우지 않아도, 멀리서 다가오는 파공음이 점점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막을게. 버티면서 패턴을 찾을 테니.”
“내가, 죽일게.”
“그래.”
짧은 대화로 두 사람의 역할이 정해진 순간.
스윽.
루나가 대미궁의 어둠 속에 숨어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니가 월랑의 눈과 자신의 의식으로 보았던 괴조가 멀리서 형상을 드러냈다.
갑옷 같은 비늘, 새가 아니라 도마뱀 같은 2개의 머리, 그리고 마치 금속으로 만든 흉기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3개의 발을 가진 괴물.
- 끼에에에엑!
멀찍이서 그 괴성이 들려오는 순간.
한 뼘만 하게 보이던 괴조의 모습이 한순간 집채만 한 크기로 확대되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꽝!
그의 눈앞에서 무언가가 새하얗게 백열했다.
놈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황급히 자세를 잡아 방어 태세를 갖춘 것.
하지만 소울웨폰 그래비티 홀(블랙)의 기운을 끌어들인 워해머로 전면을 막고, 충만한 노을빛 오러를 끌어 올려 펼쳐 낸 철신갑으로 방어력을 극대화했음에도 그의 몸은 쉽게도 튕겨 나갔다.
‘큭!’
속으로 신음성을 삼키는 순간.
“끼에에에에!!!”
파아아아아아아앙!
새까만 마기와 함께 울려 퍼진 괴성과 파공음이, 한 박자 늦게 주변의 공간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