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203화 (203/500)

203화. 검제의 결단

“……그렇게 웨어비스트 왕국은 그 체베르라는 자가 거의 장악한 것 같습니다. 일곱 장군 중 셋이 중립을 지키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제나스의 보고에, 인상을 찡그리며 듣고 있던 검제가 짧은 한숨과 함께 물었다.

“실버 팽은?”

“타이니 군이 말한 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 무섭던 자가, 아군으로 대할 땐 생긴 것과는 다르게 꽤 신사적이더군요.”

“아니, 그 체베르란 놈에 대해 뭐라고 하드냔 말이다.”

“아. 그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은혈의 라이칸스로프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뭐, 그자가 말룸과 연관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제 모두가 짐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고대에 사라진 수인족의 조상이 갑자기 이 시대에 나타났다라……. 하여간 타이니 그 녀석의 정보는 매번 중요한 게 하나씩 빠져 있어, 씁.”

검제는 답답함에 또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마다 왜 스스로 회귀하지 않았는지, 전생의 자신이 내린 결정이 아쉬울 뿐이었지만.

‘아니, 아니야. 분명히 그 무모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거야. 아니, 녀석은 재능도 출중하니, 그 무엇보다 무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걸지도.’

그는 지금 자신을 믿는 것만큼, 전생의 자신 또한 믿었다.

다만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돌아오면 한 번 더 찐하게 굴려야지. 썩을 놈.’

타이니에 대한 심술을 한 무더기 쌓아 놓은 채, 당장 벌어진 일을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금 최악인 것은.

“……그놈들이 웨어비스트 왕족의 맹점을 제대로 찔렀어.”

같은 부모 아래에서도 각기 다른 변신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수인족들.

하지만 왕족만큼은 늑대인간의 모습을 거의 지켜 왔는데, 그 특별함이 웨어비스트 왕국의 시작이었다.

고대 여신과 대적하던 악마를 물리치고 세상을 구원했다는 수인족들만의 전설. 그 전설에 등장하는 라이칸스로프의 후예라는 구실로 추대된 게 그들 왕족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왕국을 세울 당시, 고대의 라이칸스로프가 재림하면 그에게 후계의 자리를 넘기겠다는 율법까지 만들었다.

물론 수인족의 핏줄은 신화시대의 마법, 그 흔적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인 만큼 후대로 갈수록 그 피가 옅어지니, 그럴 확률은 희박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라이칸스로프가 정말로 나타나 버렸다.

붉은 피가 아닌 은빛 피를 흘리는 늑대인간이, 그것도 굉장히 공교로운 타이밍에 등장한 것이다.

“고대의 순혈 종 라이칸스로프를 현시대에 되살린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더구나 악마추종자들이?”

“글쎄, 뭔가 다른 방법을 썼겠지. 웨어비스트 쪽에서 검증을 안 했겠냐만은.”

사실, 이제 와 그 수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타이니가 말했던, 전생의 역사와 가장 크게 달라졌다는 그 부분이었다.

‘데스 나이트들의 등장. 그래, 그게 가장 큰 문제야. 어떻게 말룸이 초월급 마수들을 부리게 되었을까?’

실버 팽을 축출하게 만든 암습 사건의 진정한 원흉이자, 오크족의 분란과 성물의 도난 사건에도 등장했던 초월급 몬스터.

이 정도라면 타이니의 전생에는 분명 등장하지 않았던 것들일 터였다.

하지만, 그 역시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세계수의 수호자와 오크의 대전사가 말룸의 장로를, 그것도 넘버링 중 하나인 5호를 사로잡았다고 연락해 왔었다.

- 고문은 인간의 특기이니, 부탁 좀 하겠소.

기사가 듣기엔 모욕이나 다름없는 부탁이었지만, 검제는 흔쾌히 그것을 수락했다.

하지만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주나 자살을 막아 가며 정보를 뽑아내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아는 게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뱉어 낸 것이 없었다. 뜬금없는 단어 하나만 남기고 결국 머리가 터져 버린 것이 놈의 최후였으니까.

“정령이라니.”

엘프에게 모독이 될까 싶어서, 세계수의 수호자에겐 차마 전하지도 못했다.

악마추종자가 정령을 이용해 무슨 수작을 부렸다?

그로서도 이해가 안 가는 소리였으니, 확실하지 않은 추측만으로 엘프들이 단체로 광분할 만한 소식을 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대체 정령이랑 라이칸스로프가 무슨 상관일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검제와 제나스는 한숨과 함께 고민을 거듭할 뿐이었다.

만약 타이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질렀겠지만, 그와 월랑의 만남에 대해 자세히 물어본 적 없는 두 사람으로선 마땅한 답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전에, 로히터 건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각하.”

“안 그래도 곧 폐하를 뵙기로 했다.”

“라프탄 그 녀석이 이번에는 제대로 한 건 했습니다.”

“그래. 폐하께서도 더 이상은 다른 귀족들 핑계를 대지 못 하실 테니 말이다.”

이미 황군이 로히터 가문을 포위, 압박하고 있는 상황.

검제의 입가에 모처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발렌티아에서 확보한 증거는 라프탄이 가져온 영상구 속에 담긴 대화뿐만이 아니다.

동북부 변경에서 이뤄진 로히터 가문 병력의 움직임에 더해 실버 팽과 그들의 대립까지, 그 모든 것이 한 가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나스가 로히터 가문의 장자이자 7대 신성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가브리엘을 두들겨 패고 구금한 것이 사소한 일로 치부될 정도였으니.

“적어도 내부 정리는 끝났다.”

이제 아스란에서 발렌티아의 목소리에 태클을 걸 수 있는 가문은 없을 테니, 온전한 제국의 힘으로 미래의 재앙을 대비할 수 있다.

게다가 엘프와 오크족까지 그들에게 힘을 보태 주는 상황.

그런 희망 앞에서, 웨어비스트 왕국의 변란 정도는 작은 장애물일 뿐이었다.

적어도 검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황궁의 심처.

국정의 혼란 때문에 미루고 미루어 두었던 결혼식을 치른 지 이제 두 달.

신혼부부인 황제와 클로이의 사이는 화기애애하기만 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다른 날과 분위기가 달랐다.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폐하.”

클로이의 푸른 눈이 근심을 담고 황제를 향하자, 제국의 주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 황후. 좀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요. 이거 내가 불편한 티를 내었나 보군요. 허허.”

만인지상의 자리에 선 자로서 굳이 황후에게 존대할 이유가 없는 젊은 황제.

하지만 그는 현명하고 아름다운 부인을 항상 존중하는 의미에서 결코 말을 낮추지 않았다.

“……로히터 공작가의 문제입니까?”

“음…….”

누가 구중궁궐 안에 있는 황후에게 바깥의 소식을 전했나 싶어서, 순간적으로 신음이 나왔다.

그러다 이내 그녀의 호위 기사인 붉은 머리 여기사를 떠올린 황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오랜 시간 제국을 지탱해 온 명문을 잘라 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입술을 질끈 깨무는 황제.

그 무거운 표정을 지켜보던 클로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을 굳힌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후에 대적자가 없어진 저희 가문, 발렌티아의 위세가 걱정되시는 것은 아니고요?”

그 말에 황제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허. 하하, 나를 어찌 보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황후? 그건 아닙니다.”

바로 변명해 보지만, 그 대답이 나오기 전에 몇 초간의 공백이 있었다.

이내 굳어지는 클로이의 표정을 확인한 황제의 얼굴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버님은 절대 개인의 욕심으로 제국이나 황실에 위해를 가하실 분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클로이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심중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검제,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의 성품과 명성은 자신도 믿는다.

하지만 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르고 보니, 명망 있는 신하이자 장인인 그의 능력이 유독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그대의 아버지가 제국의 힘을 결집시키려 하고 있어요. 그것도 이종족과 손잡아 가면서 말입니다. 그건 왜일까요?’

황후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터전이 멀리 있는 엘프는 둘째 치고, 거의 수십 년간 전쟁을 해 온 오크의 손은 왜 빌리는가.

그로선 악마추종자라는 ‘작은 벌레들’ 때문에 두 종족과 발렌티아가 손을 잡았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난번 있었던 황궁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선황과 배덕한 마도사가 놈들에게 빈틈을 허용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뿐.

진정한 제국의 전력에 비하면, 그 벌레들은 하찮고 또 하찮은 놈들이었다.

‘유명무실한 성물 좀 없어졌다고 해서 그 벌레들이 세상을 멸망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꼴이라니.’

자연히 그의 생각은 한 가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공작이 세상을 움직이려는 거야. 권력이 사람을 변질시킨다더니.’

거기다 최근에는 적국이었던 수인족의 나라에서 쫓겨난 초인까지 가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심증은 자꾸만 굳어져 갔다.

‘발렌티아를 견제할 균형추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더는 로히터를 감쌀 수도 없어. 이를 어찌한다…….’

점점 무거워지는 황제의 눈빛.

그는 자신이 그토록 멸시하고 원망했던 무능한 선황과 같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자연히 그런 황제를 보는 클로이의 눈빛 역시 점점 더 무거워져 갔다. 그녀 역시 지금의 침묵이 무슨 의미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이건 아니야.’

결심을 굳힌 클로이가 애써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폐하 곁에 있는 한,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음?”

“아버지는 제게 해가 될 일을 하실 분이 아니거든요. 어쩌면, 저를 위해서라면 가문도 버리실걸요? 저희 오빠들도 그렇고요. 폐하께서도 아실 텐데요?”

애써 웃으며 꺼낸 그 농담 섞인 말이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황제의 눈빛을 흔들었다.

“확실히…… 처가 식구분들은 모두 그런 경향이 있으시지요. 재미난 비유입니다, 황후.”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에요, 폐하.”

“네?”

“그러니, 무슨 상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하시려는 일은 절대 안 좋은 쪽은 아닐 거예요. 저를 믿어 주세요. 예?”

그 미소를 본 황제가 쓴웃음과 함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황후를 걱정케 했나 봅니다.”

“예, 좀 그래요.”

“어……?”

“그러니 이번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그럽시다.”

언제나 의젓하기만 하던 그녀답지 않게 약간의 어리광이 섞인 말.

그 말 덕에, 내내 심각한 안색이던 황제의 표정에 옅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한참 후.

또각. 또각.

대전을 걸어 나오는 클로이의 표정은 조금은 밝아져 있었다.

하지만.

- 안 그래도 곧 장인어른과 독대하기로 했습니다. 오해가 있다면 풀어 봐야지요.

그리 말하던 황제의 얼굴에는 아직도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현명하고 다정한 분이셨는데, 왜 우리 가문을 경계하시는 걸까?’

여전히 남아 있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깨웠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주변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어조가 딱딱하긴 했지만, 그녀에겐 더없이 반가운 목소리.

대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 기사 비비안이었다.

“……아니, 아니야.”

클로이는 바로 고개를 저었지만, 그 좋지 않은 표정을 본 비비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내 뭐라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재차 고개를 젓는 클로이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어디에서 누가 보고 있을지 모를 곳에서는 얘기하지 않겠다는 속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모시던 아가씨이자 아끼는 동생을 따라 황궁까지 따라 들어온 천재 여기사의 눈빛이 그때부터 가라앉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황후와 호위 기사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황후의 침소에 도착한 뒤에나 한숨과 함께 평소의 태도로 돌아왔다.

“……그렇게 된 거야.”

“폐하께서 저희 가문을 경계하신다는 거군요. 이거 문제네요.”

“그래.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 나라도 나서서 풀어 주고 싶은데,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겠어.”

울상을 짓는 클로이를 본 비비안이 작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각하께서 이제 곧 입궁하신다는데, 그 전에 잠깐 만나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응? 아버지가?”

“예. 황제 폐하께서도 말씀하셨다면서요.”

“아……. 그 ‘곧’이 오늘을 말하는 거였어?”

곧이란 말이 며칠 뒤 혹은 한 달여 뒤로도 쓰이는 황실의 시간관념에 그새 익숙해졌던 클로이가 반색했다.

현명한 아버지라면 이 답답한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 것이다.

그녀는 즉시 행동에 나섰고.

- 기왕이면 같이 만나지요.

그 요청과 황제의 의지가 묘하게 조합된 끝에 황궁의 심처에서 황제와 클로이, 그리고 검제의 3인 대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 * *

“황후 덕분에 정말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소통도 없이 멋대로 상상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요.”

“예?”

반가운 딸을 안아 보지도 못하고 존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던 팔불출, 검제가 클로이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애매하게 말을 받은 그때.

황제의 폭탄 발언이 이어졌다.

“허식을 제외하고 직접 묻겠습니다, 장인어른.”

“아, 예. 뭐든지 말씀…….”

“혹시 이 자리가 욕심나십니까?”

“폐하!”

젊은 황제가 옥좌를 두드리며 하는 말에 클로이가 정색하며 그를 바라보는데, 검제는 일순간 고개를 갸웃하다가 반 박자 늦게 그 뜻을 이해하고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헛, 크흠, 말씀이십니까, 폐하?”

“진심……이시군요.”

장인의 표정을 살피던 황제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해진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럼 대체 왜 그리 제국의 힘을 결집시키려 하시는 겁니까? 그것도 이종족의 힘까지 모아서.”

“그거야…….”

“말룸, 그 잡것들 핑계는 그만 대시지요. 솔직히 우리 제국이 전력을 다하면 그런 벌레들을 소탕하는 것 따위 문제도 아닐 텐데요?”

몰아치는 황제의 말에 검제의 안색이 대번에 굳었다.

‘사실 좀 과장된 말이긴 하지만…….’

이미 엘프와 오크 두 종족이 대륙 서부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는 상황.

물론 주목할 만한 결과는 없었지만, 소소한 성과는 거둬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놈들의 조직 이름이 민간에까지 알려질 정도였으니까.

이제 제국이 대륙 중부로 수색 범위를 넓히고 왕국 연합까지 호응해 준다면, 놈들의 뿌리를 뽑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다만.

“이유를 솔직히 설명해 주신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지요. 발렌티아의 주도가 아닌 황실의 주도하에 놈들을 일망타진하는 것. 그것이 제국 전체로 봤을 때 더 그림이 예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황족은 모든 일에서 제국이 우선이라 교육받고 자란다. 간혹 제국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폭군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 황제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아직은.

다만.

‘모든 것은 제국을 위해. 그 사상은 동일하지.’

인류와 인간, 두 단어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아스란 제국은 기본적으로 인류라는 말 대신 인간이라는 말을 선호하며, 다른 지성체들을 이종족이라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제국의 정점에 있는 황제에게, 마계가 현세를 침식하고 마족이 강림하려 한다는 상황을 전해도 될까?

그랬다가 타이니의 회귀에 관한 정보가, 인류 전체가 아닌 오직 제국을 위해 이용되는 건 아닐까?

‘최악의 경우, 황제가 제국만 위하겠다 나서는 순간 인류 연합이 박살 난다.’

검제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한 검은 머리 소년과 나누었던 몇 년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 미련한 것아! 고작 내기에 목숨을 건다고? 그게 제정신인 사람이 할 짓이……!!?

- 어쨌거나 이겨야 하는 판 아니었습니까……? 저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 그랬다.

그렇게 머리가 나쁜 놈이 자신을 대신해 회귀한 이유.

전생의 자신이 녀석을 보낸 이유.

그것을 그때 짐작하지 않았던가.

- 저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 때로는 뒷일 생각하지 않고 무모한 짓도 해야 하는 거겠지. 그렇지, 타이니?’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결단은 내려졌다.

“……폐하,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특히 사제들에게는요.”

“아버지!!?”

“황후 전…… 아니, 내 딸 클로이. 너에게도 같은 약속을 받아야겠다. 약속해 줄 수 있겠니? 클레릭으로서, 모시는 여신을 걸고.”

신하가 그 윗사람에게 언약을 강요하는 상황.

하지만 검제의 그 진지한 표정에, 젊은 황제와 클로이도 얼른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워 냈다.

그리고 이내.

“약속하겠습니다, 장인어른.”

“예. 저도요, 아버지.”

그들이 황제와 황후가 아닌, 사위와 딸로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작은 망설임조차 지워 버린 검제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저희 집안의 가보, 템퍼스가 사라진 사건에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폐하께서도 익히 아시는 사람, 타이니 경이 가문을 찾아왔지요…….”

검제의 말이 이어질수록, 황제와 클로이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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